내 맘대로 정한 마지막 출근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
어제 쓴 ‘퇴사 원고’를 좀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밤에는 감성 세포가 인정사정없이 살아나 차마 내 입으로 내뱉지 못할 말들을 써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성이 온전히 살아 있는 아침에 마지막 점검을 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어젯밤에는 생각보다 이성적이었던 것 같다. 흡족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닫고 천천히 출근길에 올랐다.
좀 더 산뜻하게 여유를 가지려고 30분 정도 일찍 나왔다.
석촌 호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직장 생활하느라 늘 걷고 뛰던 소중한 공간을 너무 오래 버려두고 살았다. 아침 시간엔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에 말끔한 느낌으로 걷기가 참 좋다. 내친 김에 한 바퀴를 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라 4분의 1쯤만 걷고 잠실역 방향으로 나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잠실에서 출발해 2호선 순환선의 절반을 돌면 신촌역이 등장하고 역에서부터 걸어서 10분 정도는 걸어가야 회사가 나온다. 오늘은 출근길에 좋아하는 노래를 20곡을 넘게 들었고, 사놓고 첫 장을 펼치지도 못한 책 50페이지 정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생산적인 출근길인가? 얼마든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며 이동할 수 있는 출근길이었다. 하지만 난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매일 움직였던 걸까? 몇 주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의미와 재미를 두루 잃은 출근길이었다는 생각에 지난 시간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 날의 출근길은 수 년 후, 본격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행복한 직장 생활’을 위한 강력한 행동지침으로 자리 잡게 된다.)
퇴사를 앞두고서야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다니. 난 퇴사할 준비를 해야만 즐겁게 직장 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인 건가? 잠시 심각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즐거우면 그걸로 된거다.
(나중에 좀 더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지금 내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 퇴사 생각 이외에 다른 마음이 들지 않을 때는 출퇴근길의 일상속에서 소소한 행복의 재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십수 년 전의 나도 퇴사 통보를 하러 이동하는 중에 산책과 지하철에서의 독서 등 나만의 행복한 출근길을 회복했다. 어떻게든 다시 즐거운 출근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즉, 구직 활동 재개라는 과제가 동시에 주어졌다.
지하철이 경쾌하게 입을 열어젖힌다. 사람들과 함께 와르르 쏟아지며 플랫폼에 몸을 내던진다. 간신히 균형을 잡으면서 눈으로 주변에 험한 말을 던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 왔다.
‘당신들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출근하고 있나요?’
마음속으로 물음을 던지며, 오늘의 거사를 치를 회사로 몸을 바삐 옮긴다.
아직 사무실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대신 내 자리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000 씨, 어제 부천 방문 상담 실패 건에 대해 피드백 해 드릴 게 있습니다.
출근하시면 전화 주세요. -00 상담팀 000"
어제 나의 ‘양심적’ 영업 활동이 회사에 가져온 불이익이 어마어마했나 보다. 사람들 지나다니면서 보는 곳에 ‘실패’라는 두 글자를 이렇게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써놓을 수 있다니. 나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지만, 이 회사의 질서라니 존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만 참으면 되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메모를 보자마자 화가 머리를 뚫고 나오려는 중이었다. 어차피 퇴사할 날이니까 한 번 시원하게 뒤집어엎고 나갈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래봐야 내게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너무 좁다. 지금 내가 내뱉은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미래의 내 발목을 세게 붙잡을 수 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온 힘을 다해 꾹 참았던 과거의 나를 정말 칭찬한다. 그 판단만큼은 정말 훌륭했다.
"안녕하세요, 000입니다."
"아니 대체 어제 어떻게 상담하신 거예요?"
어제의 대표님의 것과 거의 동일한 멘트가 이분 입에서도 나온다.
"저희 팀에서 상담 잡기가 정말 힘들어요. 그리고 그 상담을 갖고 가셔서 계약을 성사시켜야 그중 일부가 저희 팀 인센티브로 나온다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정말 너무 잘 알겠다.
내가 대표님 포함 몇몇 직원들의 밥상을 뒤집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분의 말 몇 마디로 인해 당연한 수순으로 기분이 상당히 나빠진다. 본인과 소속팀이 가장 힘든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직접 상담하는 나의 노고는 보잘 것 없다는 말로 들렸다. 시종일관 그 분은 나를 바닥 끝까지 무시하는 멘트로 일관하고 있었다. 회사에선 아무리 상대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 나의 상한 마음을 쏟아내도 늦지 않다. 그게 우리 팀이 아닌 타팀과의 소통이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주 작은 오해로도 부서 간의 목숨을 건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런데 감히 저런 무례한 대사로 남을 가르치려 든다니, 회사의 수준은 각 부서의 수준, 개인의 수준과도 직결된다. 이날 퇴사를 통보할 나의 전투력은 절정을 향해 치솟는 중이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역량 부족이었던 것 같아요. 가보니 집안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 더 이상 강제로 계약할 수 없었어요."
"아니, 언제 강제로 계약하라고 했나요?"
어제 대표님한테서 몇 번이나 들었던 멘트가 토씨 하나 안 바뀌고 그 분의 입에서도 마치 녹음 파일을 틀어놓은 것처럼 재생되고 있다.
‘제가 언제 00 하라고 했나요?’
생각해 보니 나와 같은 업무를 하는 선배님들도 이런 말을 농담 삼아 입에 달고 있었다.
어떤 선배와 점심을 먹으러 갔었다. 메뉴로 택한 김치찌개가 맹맹해서 별로라고 하자 그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제가 언제 김치찌개 시키라고 했나요?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책임지세요!" 라고 하면서 낄낄 웃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공유하고 구체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정신, 즉 기업문화였다. 대표부터 실무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이 ‘책임’이라는 고귀하고 막중한 것을 마치 폭탄 돌리기 하듯 다루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다는 걸 느꼈다. 기업문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입과 행동을 통해 공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오는 모든 것이 기업문화를 보여준다.
이 회사의 기업문화는 "난 제대로 얘기했는데 당신이 이상하게 알아들은 거야." 였다. 상호간 신뢰가 쌓일 리가 없다. 존중과 배려가 이뤄질리 만무하다. 이래갖곤 동료들 얼굴만 봐도 짜증부터 나지 않겠는가? 촌스러운 기업문화를 가진 조직에 있다 보면 나도 촌스러워 질 것이 뻔하다. 만 이틀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중요한 정보를 파악한 과거의 나 자신을 매우 칭찬한다. 퇴사를 결심한 나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확신 때문에 마음이 한 없이 편해졌다.
다시 전화상담팀 직원과의 대화로 돌아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고, 제가 다시 그 집 전화해서 다시 상담 잡을 거거든요?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다른 분이 가실 수 있도록 할 거예요. 만약 계약이 잘 안되면 000 씨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지셔야 할 거예요. 대표님도 어제 그러셨어요."
‘호오, 재미있네.’
"네 잘 알겠습니다.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제가 어떻게 책임지면 될까요? 오늘 마지막 출근이라서요. 시간이 많이는 없을 것 같네요."
"네...?"
예상대로 상대가 잠시 당황한 찰나를 드러내자 나는 바로 간단히 할 말만 했다.
"조치 방법 파악되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아, 최소 한 시간 내로 알려 주셔야 제가 뭔가를 하고 갈 수 있을 거예요."
"아, 네..."
속이 다 시원했다. 생각해 보면 그분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다. 다만 당시엔 그 회사에 있던 모든 분들과 한 번씩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순간의 나는 멘탈이 참 약했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센스 있게 나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스킬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나마 화를 내고 소리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곳을 나의 무력으로 파괴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회는 크게 남지 않았다. 아무리 엉망인 회사라도 한 사람이 쉽게 무너뜨리진 못한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다. 어떻게든 서로 웃으며 직장 생활을 이어갈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옳은 방향이다. 그게 잘 안돼서 문제지만.
전화를 끊고 대표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제 작성한 원고를 꺼내서 마지막 리허설을 혼자 해본다. 참으로 유난을 떨지 않았나 싶다. 무슨 면접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퇴사 원고를 이렇게나 정성스레 준비해서 소리 내 읽으며 연습하는 모습이라니. 얼마 되지 않아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나오고 마지막에 대표님이 상기된 표정으로 나오셨다.
난 바로 대표님께 달려갔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어, 그래 000선생, 이리 좀 들어와 봐."
오, 나이스! 만약 대표님이 다른 직원들 앞에서 바로 어제 일에 대해 얘기하며 갑자기 모든 이목이 집중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 있게 준비한 것을 선보일 수 있을까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대표가 스스로 1:1 독대 상황을 연출한다. 정확히 바라던 바다.
"000선생, 처음이라 뭘 잘 모르는 거 같아서 좀 교육 좀 다시 해줄게. 우리 전화 상담팀이 얼마나 고생해서 잡은 콜인데 그걸 그렇게 갖고 나가서 말아 먹고 오면 자네뿐 아니라 그 상담 직원, 나아가 우리 회사가 잘못되는 거야. 알겠어?"
"네, 죄송합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 제대로 하자고. 오늘 상담은 몇 건이지?"
‘자, 이제 게임을 시작해 보실까?’
"대표님, 오늘부터 상담하지 못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응?"
"2 주 동안 일을 하면서 제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저의 고객들, 그리고 회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의 장래와 공부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학부모님들의 또 다른 영역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어제 대표님과 콜센터 000 씨의 반응을 보니 제가 갖고 나가는 서비스가 과연 진정 그들에게 궁극적인 해결책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고객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우린 계약서를 쓰고 와야만 하고, 그 계약으로 인해 돈 몇 푼을 나눠 먹는 것이 지상 최대 과제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전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 회사가 정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에 제가 오늘부로 그만두는 것이 저로서도, 회사로써도 상호 간에 이득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신나게 내가 할 말만을 쏟아 냈다. 한 번의 더듬거림도 없이, 아마도 확신이 가득한 양보 없는 미소도 함께였을 거라고 믿고 싶다.
대표님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으셨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하실 말은 없고요?"
어제의 살기등등했던 대표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웬 기운 없는 한 아저씨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추측하건데 아마도 나와 같은 이유로 회사를 금방 나가는 직원이 많았을 것이다. 직원들의 퇴사의 원인을 대표인 본인이나 조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퇴사를 결심한 자에게만 돌리려는 무책임한 경영 철학은 다시금 자기 자신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니면 그의 어두운 표정은 ‘이렇게 못난 놈 하나가 제 발로 나가주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고 있는 표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든 상관없다. 난 퇴사만 하면 된다.
그렇게 보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내가 나간다고 하면 또 채용공고를 올리고 서류를 받고 면접을 보는 과정을 또 반복해야 하니까. 그리고 또 한 명의 예비 사기꾼을 이 회사로 끌어들여야 하니까.
하지만 안쓰러움과 나의 최종 결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표님의 최후 변론이 끝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벌써 회사 문을 지나 훨훨 날아가고 있다.
"000선생, 이건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2주간 실적 낸 것에 대한 급여는 미안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저 때문에 손해 본 다른 직원분께 위로금으로 주시거나 하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상담팀 000씨요. 인센티브 때문에 걱정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내가 아주 신이 날 대로 났었구나. 대표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잘라버리고 내 할 말로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워버린다. 예의와는 제대로 등져버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멘트는 무궁무진했다. 대표님은 잠시 날카롭게 흘겨보더니 이내 질린다는 표정을 하시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하셨고 잘 지내요."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감사와 미안함 두 감정 모두 진심이었다. 나랑 맞지 않는 곳이라는 걸 빨리 알려줘서, 계속 행복한 직장 생활을 준비하고 꿈꿀 수 있도록 해줘서. 그리고 마지막에 대화한 000 씨와 대표님의 심기 불편한 목소리와 표정을 떠올리니 인지상정의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나쁜 곳도 다 사람이 사는 곳이고,
회사 정문을 나섰다. 그리고 출근길에 매일 들르던 테이크아웃 커피집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다. 기억에 남는 시원하고 맛있는 커피였다.
그날 내가 한 것도 여러 모양의 회사 생활이었다.
아주 재미있었던.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내일부터 뭐할지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