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럽지만 진심이다
나는 하루에 10,000자를 쓰는 사람이다. 작가시냐고 물어보면 “작가 호소인입니다“ 정도로 웃으며 말하고 만다. 작가를 꿈꾸고 있고, 일상이 작가의 것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점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1,000자 정도의 모닝 페이지를 쓰며 본격적으로 쓰는 삶을 시작한다. 주변에서는 천 자, 만 자 쓰는 것도 신기해하지만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은 다름 아닌 새벽 5시 기상이다. 그렇다, 난 아침형 인간이다. 상당히 오랜 기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이 위대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식의 찬사를 들을 때면, 왠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의 새벽 기상은 제법 유서 깊다. 시작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30분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정류장에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늘 안쓰러운 시선의 대상이 됐다. 배명고, 영동여고, 정신여고, 휘문고 친구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나는 늘 가장 마지막에 너덜너덜한 상태로 버스에서 내렸다. 하루의 시작부터 버거웠기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답은 하나였다. 더 일찍 일어나는 것.
새벽 기상의 동기는 의외로 엉뚱한 데 있었다. 1세대 아이돌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그들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은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반면 우리 학교는 두발 단속 때 배드민턴 라켓으로 머리를 눌러 튀어나온 부분을 잘라내던, 지금 생각하면 다소 야만적인 시절을 살고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나는 H.O.T 토니안 머리를 끝까지 고수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 교문을 가장 먼저 열고 들어갔다. 아침 단속만 피하면 하루는 어떻게든 숨고 피해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소 불순한 의도로 나의 아침형 인간 인생이 시작됐다.
몸에 밴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다만 일찍 일어나는 것에 비해 시간을 그다지 의미 있게 쓰지는 못했다. 가장 생산적인 활동이라야 조조 영화를 보는 정도였다. 별다를 것 없던 나의 새벽은 결혼을 앞두기 전까지 큰 변화 없이 흘러갔다.
결혼을 준비하며 아내와 집에 TV를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TV를 보던 시간을 대신 채울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그 대체재는 다름 아닌 독서였다.
책과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던 건 아니다. 한두 달에 한 권 정도는 읽었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는 것도 좋아했다. 책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공간에 서 있으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고,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이 조금 더 가치 있고 멋져 보이기도 했다. 이제 독서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더해졌다. 원래 가지고 있던 호감 덕분에 새로운 결심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써봐야겠다’라는 생각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서는 본격적인 ‘취미’가 되었다. 마침 그 무렵, 회사에는 생일 선물로 책을 주는 근사한 문화가 있었다.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신청하면 대표님이 짧은 메시지를 적어 생일 때쯤 직접 건네주는 방식이었다. (이 좋은 문화는 왜 지금은 사라졌을까?)독서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막 싹트던 시기와 정확히 겹쳤다.
내가 고른 책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기사단장 죽이기』였다. 두 권으로 구성된 장편이었기에 1권은 선물로, 2권은 직접 사서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최애 작가의 방대한 소설은 어린 시절 막연히 상상하던 미지의 세계를 다시 불러냈다. 젊은 날 읽었던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과도 어딘가 느슨하게 연결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이 책을 읽고 인스타에 남겨둔 감상문을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루키 월드에 다시 돌아온 걸 환영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잘 알려져 있듯,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척 엉뚱하면서도 아름답다. 야구장에서 응원하던 팀의 1번 타자가 친 2루타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래, 소설을 쓰자”라고 생각했다니. 이런 글쓰기를 향한 결심이라니, 낭만 치사량 초과다! 나 역시 하루키 소설 속 어두운 우물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의 세계를 따라 내려가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나도 한 번.”
쑥스럽지만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