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안에서 흐느끼던 소년, 리디아를 만나다.

뮤지컬 <비틀쥬스>

by 하작가

뮤지컬 <비틀쥬스> 리디아 이야기


"아빠 말 이제 안 들어

미치기 전에 깨어나

엄마를 볼 수 있게 만들게 내가."

(Dead Mom 中)



누군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그 직전에 극심한 결핍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뮤지컬 <비틀쥬스>의 주인공 리디아 역시 그렇다. 그녀는 엄마의 사랑이 가장 절실한 어린 시절에 엄마를 잃는다. 유쾌하고, 무례하며, 제멋대로인 에너지가 가득한 이 작품이 놀랍게도 '장례식'으로 문을 연다는 사실은 극을 반복해 관람한 뒤에야 비로소 뇌리에 깊게 박혔다. 이는 작품이 앞으로 이끌어갈 방향을 예고하는 묵직한 오프닝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앗아갈 테니, 이제 인물들이 어떻게 울고 웃으며 부딪히는지 지켜봐." 마치 극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어둑시니가 내려앉은 무대 위, 온통 검은색뿐인 리디아에게 조명이 잠시 머문다. 준비되지 않은 채 거대한 비극을 맞닥뜨린 이는 외려 울지 못한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세상의 모든 말을 집어삼킨 채 아무것도 내뱉지 않겠다는 듯 완강히 닫힌 입술. 그 침묵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응축되어 있다.


리디아 역을 맡은 배우들은 매일 무대에 오를 때마다 엄마를 잃으며 공연을 시작한다. 그 반복되는 상실을 지켜보며 나는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처음 인지하기 시작했을 무렵,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옆방에 엄마가 멀쩡히 계시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상상 속의 이별을 하며 한참을 울다 잠들곤 했다.


어른이 되어 마주한 <비틀쥬스>의 리디아는 그때 이불 속에서 떨던 나의 투영이었다. 방에 처박혀 엄마를 그리워했을 리디아의 마음을 상상하자, 이 기괴하고 유쾌한 소동극은 어느새 오로지 리디아의 시선으로만 읽히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빠 찰스는 가정교사와 깊은 사이가 되었고, 집안에서 죽은 엄마의 이야기는 금기어가 되었다. 엄마의 흔적이 나올 때마다 황급히 화제를 돌리는 아빠의 모습은 리디아에게 원망의 불씨가 된다. 결핍에서 기인한 간절함은 갑자기 희한한 방향으로 튄다. 유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깨달은 리디아는 결심한다. 이 기괴한 능력을 가장 간절한 곳에 쓰기로. "그래, 엄마를 데려와야겠어."


어느새 친해진 유령 친구들(비틀쥬스, 아담, 바바라)의 도움으로 저승의 문을 통과한 리디아, 그리고 딸을 지키기 위해 그 뒤를 따르는 아빠 찰스. 그러나 저승의 문 너머에서 리디아가 마주한 것은 그리운 엄마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것은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상실' 그 자체였다. 현실에서 엄마를 잃었을 때보다 더 큰 절망,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뛰어든 저승의 참담함이 리디아를 덮치던 순간, 그녀를 거칠게 안아준 것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


리디아는 그제야 아빠의 진심과 대면한다. 누구보다 엄마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은 바로 아빠였다는 것을. 상실의 고통을 완벽히 극복할 '최선'의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걸 리디아보다 조금 더 잘 아는 어른이었기에, 아빠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과거를 묻어두고 억지로라도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의식적인 몸부림. 그것은 사랑하는 딸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아빠만의 처절한 생존 방식이었다.


현생으로 돌아온 리디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검은 상복 뒤에 숨어 독설을 내뱉던 그 가여운 아이는, 이제 가녀린 두 팔로 세상의 슬픔을 감싸 안을 줄 아는 '애어른'이 되어 있었다. 역시 인간은 절망의 밑바닥을 찍어본 뒤에야 비로소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모양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저승의 문을 제 발로 통과해 본 리디아가 아닌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녀에게 이제 삶은 더 이상 버텨내야 할 고역이 아니다. 상실의 여백을 억지로 메우려 애쓰기보다, 부족함을 가진 채로도 충분히 웃고 떠들며 살아갈 수 있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증명해낸다. 지독한 결핍이 낳은 리디아의 간절함은 결국 엄마를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대신 자기 자신을, 그리고 아빠와의 부서진 세계를 다시 살려냈다. 게다가 이젠 내 옆에 없는 엄마를 인정하고 대신 어떤 형태로든 나와 늘 함께 한다는 상상이 주는 안도감까지 장착해 단단하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힘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죽음으로 시작한 이 이야기가 이토록 찬란한 삶의 찬가로 끝맺음할 수 있는 이유다.


아직도 상실과 결핍이라는 좁은 다락방에 갇혀, 홀로 분노를 삭이며 울고 있을 이 시대의 수많은 리디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면 생각보다 당신의 편이 많다는 것을. 비록 그들이 내놓는 위로가 당장은 투박하고 시원찮아 보일지라도, 어찌 됐든 우리는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이다.


저승의 문을 열 용기로 차라리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자. 그 온기에 기대어 오늘을 버티다 보면, 상실의 구멍 사이로도 기어이 좋은 날들은 찾아오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