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하고 행복한 직장생활 가능함?(16)

‘미안하지만’은 미안한 게 아니다.

by 하작가

‘미안하지만’은

미안한 게 아니다.



어느 날, 회사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접견실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던 대표님과 눈이 마주쳤다.


대표님은 날 부르시고 이런 부탁을 하셨다.


"저기 사무실에 000 대리가 있을 거야. 미안하지만 커피 두 잔만 부탁한다고 전달 좀 해줘."


참고로 000대리는 여자분이고 나보다 선배님이었다.

대표님은 당시 60세 정도 된 남자분이었다.


여러분은 이 상황, 이 멘트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당시의 나는 이 말을 직접 듣고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느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냥 대표님이 바로 눈이 마주친 나에게 직접 커피를 시켰으면 별다른 저항 없이 했을 것이다. 대표님이 그 정도는 시킬 수는 있는 거니까. 나도 여기 직원이니 손님을 정성스레 맞이하는 기분으로 기쁘게 했을 것이다.



1. 커피는 역시 여자가


대표님의 부탁에는 여전히 커피는 여자가 타는 게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린 것 같았다. 달리 얘기하면 남자 직원은 커피를 타서는 안 된다는 전제도 함께 깔린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000 대리님은 나보다 상급자다. 즉, 아래 직급인 내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대리님께 가서 커피를 타서 졉견실로 배달하라는 미션을 하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또 있을까? 한편 대표님이 불쌍하기도 했다. 여직원만 커피를 타는 시대에만 살아왔기 때문에 이 상황이 왜 이상한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미안하지만’은 미안한 게 아니다.


난 대화하다가 누군가가 "미안하지만", "죄송하지만" 등의 사족을 붙이면 바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바로 "미안하면 안 하셔도 돼요!"라고 말한다. 자기가 할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미안하긴 한 거다. 하지만 미안함과는 무관하게 결국 내 뜻대로 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있는 000대리님에게 커피를 주문하라고 나에게 시킨 대표님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분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운을 떼긴 했는데 어떻게든 커피는 내 손으로 탈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시키긴 해야겠지만 마침 본인 눈앞에 나타난 남자 직원에게도 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똑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자 직원에게 커피를 시킨다? 그건 같은 남자인 본인이 언젠가는 커피를 타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상당히 염려하지 않았을까? 역시 한 조직의 리더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다.


난 그 순간 결단을 해야 했다.

나의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대표님, 제가 방금 그 부서 다녀왔는데 보니까 000대리는 자리에 없더라고요. 제가 커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탕비실로 이동했다.


우리 대표님은 따뜻한 커피믹스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난 큰 컵에 가득, 두 잔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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