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직업 : 메뉴 및 식당 담당 직원
극한 직업 : 메뉴 및 식당 담당 직원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 지금까지 5번 정도 직장을 옮겨 다녔지만 어디를 가나 동일한 것이 있었으니 회식 장소나 식사 메뉴 정하기 담당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통상 여직원 중 막내가 바로 고정 담당이다. 군 생활을 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막내 소대장이 당직근무를 가장 많이 서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신임 소대장이 부임하면 선배들이 내 전투복에 당직사관 완장을 오바로크 쳐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 선배들은 더 심하게 당했겠지.
식사 장소나 메뉴 선정은 생각보다 고난도의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다양한 연령층, 개인 취향, 날씨, 거리 등의 TPO를 모두 고려해서 정해야 한다.
어떤 날에는 부서원들이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개인별로 물어봐야 할 때도 있다. 차라리 이럴 땐 전날 모두가 밤까지 거하게 음주를 한 날이 좋을 수도 있다. 해장 기능을 가진 메뉴를 선택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행운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이다.
그나마 어렵게 골라 놓은 곳이 맘에 안 들어도 못 이기는 척 다 같이 가주면 다행이다. 한 명이 토 달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씩 거들어 '메뉴 담당 직원'의 속을 뒤집어 놓기 일쑤다.
"나 그거 못 먹는 거 몰랐나 봐?"
"거기 저번에 가보니까 별로 던데... 뭐 내 돈 쓰는 거 아니니까 가죠. 뭐."
"난 옆집에서 다른 거 먹으면 안 되나?"
확 그냥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데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로 분위기가 정리된다.
"오늘은 그냥 중국집 가죠!"
"저기, 부장님. 이런 말씀은 30분만 일찍 해주셨어도 이 진상들한테서 이런 수모를 안 겪어도 되잖아요!"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가면서 동시에 입이 움직인다.
"사실 저도 중국집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요."
"중국집 최고지."
에라이.
약 5번의 이직을 거쳐 지금 회사에 정착한 지 몇 년이 지나고 있었다. 어김없이 우리 부서에도 ‘식당 및 메뉴 담당 막내 여직원’이 있었다. 점심 회식을 앞둔 날이면 여전히 검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회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부서에 공돈이 생겼을 수도, 부서원 누군가를 환영하거나 축하할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모두가 즐겁고 들뜬다. 한 분만 빼고. 게다가 그 분은 맡은 업무가 적은 직원도 아니었다. 이런 날만 되면 그분은 성과에도 잡히지 않는 ‘기타 부여된 업무’에 시달린다.
항상 밝고 빠릿빠릿하고 명석한 그분의 특징이 아니라면 ‘그 일’이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 것이었다. 부서장은 혹시 그걸 노리고 맡긴 건 아닐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음모론의 고수가 되어 가는 듯하다. 늘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의 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니.
그분께 말을 걸어 본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식당 추천하나 해드려도 될까요?"
순간 그분의 표정이 멍해지다가 순식간에 밝아진다.
"그…. 럼요, 당연히 당연하죠!"
당연히 당연하다니. 누군가가 이렇게 얘기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당연히 이런 관심이나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찾아와 고맙다는 눈빛이 스치움을 느낀다.
난 사실 추천할 메뉴를 생각해 놓고 말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내 동료의 성과지표나 개인 직무 기술서 등에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을 ‘그 일’에 대해 함께 관심을 가지길 원했을 뿐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던졌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그분의 선택지 중 아마 고기도 있었던 것 같다. 바로 몇 군데 고깃집이 단체 카톡방에 투표로 부쳐졌고 몇 분 만에 회식 장소가 정해졌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난 과연 내 동료분을 도와준 것일까? 내가 혹시 선을 넘은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미리 출발한 몇 명의 동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 업무 담당’ 동료분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00 님, 늘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네?"
"매번 이렇게 식당이랑 메뉴 정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아…. 네..."
"혹시 힘들진 않으세요?"
"뭐…. 검색하는 게 힘들진 않지만, 다른 게 힘들긴 해요."
"어떤 게요?"
"모든 분이 다 좋아하는 걸 고르기가 힘들어서요."
회식 장소와 메뉴를 정하는 것은 정답이 없는 질문에 계속해서 답을 찾아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답을 찾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에 대해선 일종의 책임을 져야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급여나 인센티브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인 업무 역량이 향상되는 경험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매번 이런 일이 주어지는 것은 부당하다. 게다가 난이도도 엄청난 일이었다. 이런 비공식적 업무 분장은 공정하지 못하다.
물론 그 동료분이 부서 회계 및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이 주어진 배경도 있다. 결국 부서 카드로 결제하는 것도 그의 몫이니 메뉴 선택의 자유 쯤은 준 것이라고 애써 변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부과되는 책임과 부담감은 그분에게 알량하게 주어진 자유의 분량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아 불필요한 업무 스트레스로 잔존한다.
회식은 응당 즐거워야 하는데, 적어도 한 명만큼은 마냥 즐겁지 않다. 이 역시 부당한 일이다.
‘그 일’을 맡기기 위해선 몇 가지의 선행 과제가 해결돼야 한다.
단순히 "식당 좀 찾아봐, 메뉴 좀 정해봐. 당김이 잘하잖아."라고 슬쩍 던져 놓는 것은 세련된 리더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내게 그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을 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동료가 회식 때마다 경직되는 걸 방관하는 것도 모자라 약속한 듯이 ‘오늘도 좋은 식당 잘 부탁해’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도 동료로서의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난 이전과 다른 분위기로 내 동료에게 접근해 본 것이다.
"00 님, 다음부터는 같이 찾아볼까요? 아니면 돌아가면서 식당 정하기로 할까요?"
전체 부서원이 함께 2박 3일간의 지방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출장 땐 첫 날 4시부터 내가 먼저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4시부터 시동을 건 이유는 고된 업무를 빨리 끝내고 앞으로 찾아올 우리의 즐거운 시간을 기대하자는 의미였다.
“우리 이따 뭐 먹어요?”
“근처에 양꼬치 맛집 있다던데요?”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요?”
아직 업무도 안끝난 동료들에게 가서 툭툭 한 마디씩을 던지며 이 과제는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울 일이 아니라는 것, 당신도 생각이라는 걸 잠시라도 같이 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식당 담당’ 그 동료께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나의 진심이 얼마나 가 닿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하고 솔직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의 마음을 물어보고 싶다.
첫날의 메뉴는 출장 첫날의 피로를 달래줄 수 있는 해장국이었다. 오늘 하루 다 같이 고생한 동료들과 함께 따뜻한 뚝배기 한 그릇씩 두고 앉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참 좋았다. 물론 메뉴는 함께 선정한 건 아니었고 이날 가장 수고한 동료가 원하는 메뉴로 상당히 쉽게 정해졌다. 그 과정 또한 내 동료들의 관심과 애정이 집중되는 방향으로 정한 방법이었기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물론 그 순간 우리가 모두 동일한 크기의 행복을 누렸냐고 한다면 그건 아닐 수도 있다는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순간 우리는 다른 때보다 충분히 균등하고 큰 행복을 누렸다. 가장 고생한 직원을 위로하고 치하함과 동시에 그런 동료를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며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행복하기를 꿈꿨다는 데 있다. 회식은 즐거워지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의견과 결정으로 구성원들에게 부담감과 거부감을 주는 회식을 많이 하는 조직이 많을 것이다.
이런 경우 리더가 잘해야 한다. 자기 말대로 구성원들이 따라와 주는 모습을 보고 다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한다거나, 구성원들의 취향을 본인이 정말 잘 파악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져선 안 된다. "우리 직원들이 다 좋다는 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라고 한다면 "그럼 부서장 앞에서 전 그 메뉴, 그 식당 싫다고 할까요? 당신은 막내급 직원일 때 그렇게 할 수 있었나요?"라고 자신 있게 물어볼 것이다.
이날 우리 앞에 놓인 뚝배기는 다른 날의 뚝배기와는 아주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