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2007년 여름이었다.
본격적인 사회인으로서의 인생이 막 시작하기 시작한 해였다.
장교로 군 생활을 마쳤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기업에는 ‘장교 공채’가 따로 있을 만큼 전역 장교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그래서 취업문이 넓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내게 허락된 자리는 없었다. 군대에서 해안선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냈지, 취업 준비에 있어서는 눈뜬장님이었다. 임무 수행에 매달리느라 ‘준비다운 준비’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장교 공채라고 해도, 나처럼 게으른 장교에게까지 문이 열려 있지는 않았다.
변변한 직장 없이, 군생활하며 모은 여윳돈과 퇴직금을 조금씩 까먹으며 버티던 지 1년쯤 됐을까. 대기업 임원이던 삼촌의 소개로 협력사에 입사하게 됐다. 생애 처음으로 ‘빽’의 힘을 느낀 순간이었다. 나조차 이런데, 더 큰 권력을 빽으로 둔 사람들은 세상을 얼마나 쉽게 살아갈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사회 초년생은 원래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법이다.
드디어 ‘회사다운 회사’에서의 평범한 생활이 시작됐다. 조카가 장교 출신이니까, 또 남자니까 ‘기술영업’을 해보라며 삼촌이 보낸 자리였다. 당시만 해도 ‘허우대 멀쩡한 남자 + 장교 출신 = 영업’이라는 공식이 있었다. 영업이라는 두글자에서 느껴지는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며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막 사회라는 정글에 뛰어든 나로선 그 법칙을 거스를 용기도 없었다. '아, 이게 바로 실전 인생이구나.'하며 자포자기식으로 사회인의 보편적인 인생길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최종 면접관이었던 전무님의 뜻밖의 제안에 의해 막판에 직무가 바뀌었다."교육팀을 신설해 보려고 하는데, 강사로 한번 일해보지 않겠어요?" 영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었던 차에 그 제안을 덥석 물고 바로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강의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기적인 개인주의자 성향'이 이때 생기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강의라고 해봐야 회사에서 개발한 영업용 애플리케이션을 개인사업자 여사님들께 1시간 정도 교육해 주는 일이었다. 진심을 다해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일도 재미있었지만 신입 직원이 입사하자마자 단독으로 출장을 자주 나갈 수 있었다는 게 지금 와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단 한 시간 강의를 한다는 이유로 하루종일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게 이 일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을 다니며 지역 맛집을 섭렵했고 각 지방의 특색을 나름대로 분석하며 교육 내용에도 적용해 보는 등 흥미진진한 직장 생활을 보내던 나날이었다.
1년 좀 넘게 그 생활을 했을까? 부장님으로부터 부서 이동 제의가 들어왔다. 제의라기보단 통보에 가까웠다. 그렇게 다시 당초 이 회사에 낙하산으로 떨어진 진짜 이유였던 영업 부서에 배치받았다. 이후 그야말로 '남들 다 하는 것처럼' 험난한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 자체가 힘들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나의 역량이 그 일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엑셀이 서투르다 보니 업무의 다양한 상황에 쓰이는 엑셀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직원들이나 상사들을 붙잡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동료들은 나의 새로운 진가(?)에 대해 알아차리게 됐고 이전의 내가 갖고 있던 좋은 이미지의 허상을 거둬들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지만 업무량이 가장 적은 직원이었다. 일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일은 쌓여만 가고 실수는 반복되었다. 어느 회사에나 전설로 전해져 오는 ‘견적서 금액에 0 하나 잘못 찍어서 회사의 운명을 뒤흔든 그놈’이 되어 끌려간 것도 기억나는 것만 세 번이었다. 야구였으면 진작에 쓰리 아웃 당해 쓸쓸히 쫓겨났을 일이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선 난 쉽게 내칠 수 없는 낙하산이었다. 이런 상황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고질병이었던 허리디스크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추가로 과민대장증후군이란 복잡한 이름의 뱃병도 장착하게 됐고 귀에선 헛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고 각종 병원을 전전하게 됐다. 두 달도 안 되는 기간동안에 주변 내과, 항문외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회사 주변 병원들의 단골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을 생활로 증명해 내고 있었다. ‘아니 내가 꼭 이걸 증명해 낼 필요가 있을까?’ 하며 강력하게 거부했지만 이미 달리기 시작한 말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상적인 몸과 마음으로 살 자신이 없었다. 살기 위한 나의 첫 번째 선택지는 ‘원복 요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