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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Dec 19. 2023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여행 가고 싶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태어났다. 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과 어머니 최 씨의 둘째 딸이다. 서울 진명여고에서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뒤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다. 교토제국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김우영과 교제한 후 1920년에 결혼한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만삭의 몸으로 여성화가로써 첫 개인전은 연다. 신문에 투고하고 여러 편의 소설을 남기는 등 꾸준히 집필활동도 이어간다. 1927년 세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긴 후 남편과 함께 구미여행길에 오른다.


식민지 여성의 여행길은 예상과 달리 무척 화려하다. 일등석에서 즐기는 구미 여행은 만주 단둥현 부영사를 지낸 남편 김우영에게 주어진 포상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쓴 돈이 일반 봉급자가 30년 동안 모아야 하는 금액이라니 상상과 달리 무척 호화스럽다. 지금 그녀의 여행 일정대로 여행을 해도 부르주아 여행이라 불릴만하다. 그들의 여행은 출발 전부터 신문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고 가는 곳마다 환영하는 인파가 모였다. 일본 관료들과 선입견 없는 자연스러운 만남, 영친왕과의 뜻하지 않은 식사, 대사 부인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도저히 식민지 조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다닌 곳은 물론 미술관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명소가 많지만 지금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1930년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녀는 네 가지 문제를 고민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알고 싶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수원, 경성, 곽산역, 단둥, 선양, 창춘, 하얼빈을 통과하며 기차 여행을 한다. 풍경에 대한 묘사가 많다. 특히 스위스의 자연경관은 유럽 중에 최고라고 하는 표현은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든다. 여러 명화와 유적들이 잘 보존되고 있는 점,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부러워하며 강원도 일대를 스위스처럼 관광지로 만들며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1930년대 식민지 여성이 바라보고 경험한 것들은 무척 놀라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마음의 무게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시대를 앞선 생각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궁금했는데 1년 8개월의 구미 여행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 같다. 유럽에서 짧은 단발머리를 자른 그녀가 조선에서는 다시 긴 머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야를 통해, 프랑스 예술가를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을 통해 그녀는 예술과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녀가 본 영화 속 대사가 인상적이다

"연애는 신의 불꽃이다. 모든 것을 미화하고 정화한다. 산문적인 우리에게 시를 준다. 대지에 초아를 돋게 하는 밤이슬이다. 사람 혼에 맥박을 돋게 한다. 인생에 빛을 비추고 희망을 준다. 연애를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참된 인생의 혼을 들여다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 사람 자신이 인생을 존귀하게 살 수 없다. 아마 참된 사람은 영혼뿐 아니요, 육체뿐 만도 아니라 영혼과 육체 사이에, 신과 인간 사이에 도래하는 것이다"

혹시 최린을 생각하고 대사를 마음에 담아 둔 것이 아닐까 혼자 추측해 본다.






후미코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여학교 졸업 후 공장 직원, 카페 여급 등의 일을 한다. 1926년 화가 지망생 마사하루와 결혼한다. 1930년에 출간한 <방랑기>는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60만 부나 팔리며 그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그리고 나혜석이 세계일주를 한 지 4년이 지난 1931년 나혜석처럼 조선과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유럽을 여행하는 세계 일주를 한다. 인세로 하는 여행이라 그녀의 여행은 <삼등여행기>이다. 제국의 여성이라는 점이 다를 뿐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늘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위험이 따르는 점이 나혜석과 같다.


나가이 가후의 <프랑스 이야기>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으며 파리를 동경하던 그녀는 전쟁이라는 상황에도 여행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홀로 트렁크 네 개를 이고 지고 삼등 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린 시절부터 행상을 하는 부모를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녀는 삼등열차에서 본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민과 편안한 정을 느낀다. 폭격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는 후미코에게 괜찮다며 다독여 주는 러시아 할머니. 그녀가 줄 것은 종이풍선껌 밖에 없다. 자신이 가진 닭다리와 풀빛 보자기와 바꾸자는 젊은 러시아 아가씨, 자신의 화장품을 탐내는 안색이 안 좋은 러시아 젊은 엄마. 이가 부러질 듯한 차가운 사과를 먹는 그녀에게 비스킷에 버터를 발라 권하는 사람들, 레코드음악 소리에 모이는 사람들 모두 체호프 소설에 나오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 삼등열차에도 타지 못하고 복도에서 서서 가는 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러시아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것인지 비판의식을 가진다. 유럽의 삼등 열차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언제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녀는 파리에 머물면서 프랑스를 지탱하는 것은 백성과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자신보다 더 가난한 파리의 매춘부 여인은 그녀에게 돈을 달라고 하더니 사흘이나 자신의 숙소에 머문다. 그녀는 매일 길을 거닐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작가를 만나기도 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장면 같은 장소가 많이 나온다. 일본의 여자들은 부엌에서 인생을 보내고 프랑스의 여자들은 길 위에서 인생을 보냄을 느끼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런던에서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남은 여비가 없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팔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보낸 비용으로 간신히 일본으로 돌아가는 여객선을 타고 또다시 삼등석에서 만난 사람들과 30일 넘게 따뜻한 정을 나눈다. 그녀는 여행 경험이 풍부한 부자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지치고 세정에 질리면 여행을 떠난다. 여행만이 영혼의 휴식처라고 말한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동양인 여성의 용기 있는 여행기는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감동이었다.



아, 여행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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