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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Dec 20. 2023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동물농장과 우생학이 떠오르다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에 이어 지금은 플라스틱 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만을 나눈다면 동굴 시대, 움집 시대, 초가집 시대, 기와 시대, 아파트 시대가 아닐까 싶다. 외국의 경우 빈민층을 상대로 정부가 계획한 아파트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며 공공연한 경제적 투기 매체이다. 이명박 정부 시대 노골적인 "부자 되세요" 인사말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아파트 값이 오르기를 바란다는 경제적인 인사말을 한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한 MZ 세대들조차 영끌을 모아 아파트를 산다. 시인들도 아파트값을 이야기하는 그야말로 아파트 시대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렇게 대단한 대한민국의 아파트가 모두 무너지고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가 마치 조지오웰의  "동물 농장"처럼 리더를 뽑고 질서를 세우고 밖을 경계하며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갑자기 자신의 주거지를 잃은 사람들은 황궁아파트로 몰려든다. 과거 자신의 아파트를 무시했던 주상복합 주민들도 있다. 자신들만의 영역 길을 만들고 아이들을 무시하던 그 주민들을 받아줄 것인가, 우리들의 식량도 전기도 물도 부족한데. 황궁 주민들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주인이 아닌 사람이나 외부인을 추방한다. 나는 이 장면이 정말 소름 끼쳤다. 이 상황에서도 집주인이어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 구호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 말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주민이란 누구인가. 소유권만으로 주민의 정의가 내려지는 것인가. 아파트에서 살고 그 안에서 이웃을 만나고 학창 시절을 보내고 삶의 전부이던 사람들은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주민이 아니란 말인가. 가족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 민족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권리가 남을 배척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거나 편협한 기준이라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항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하게 된다. 단순히 과거의 상처 때문만이 아니다. 살기 위한 것이다. 가족을 위해 남자들은 폐허가 된 황궁 아파트 주변을 돌며 남의 가게를 털고 훔치고 살인도 한다. 쫓겨나 얼어 죽은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빼앗기면 저렇게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두 번째로 소름 끼친 장면이었다. 우리를 공격한 적은 죽어 마땅하다.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를 공격한 일본, 몽골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우리를 지켜주었으니. 그러나 자신이 남의 것을 훔치기 위해 몰래 들어간 곳에서 방어를 하기 위한 행동임에도 그저 우리의 한 명이 다치는 걸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간다. 모두 집단적 광기가 샘솟는다. '동물농장'의 동물들도 그랬다. 인간이 그동안 부려먹기만 했고 식량도 적게 주었다는 명분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폭력적인 혁명은 다시 폭력을 부른다. 악순환은 필연이다. 또한 폭력을 가장 잘 쓰는 이가 리더가 된다는 진리도 발견한다. 대중들은 이미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늘 공포와 두려움이 큰 적이다.


히틀러도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아파트도 등급이 있듯이 사람도 등급이 있다며. 인간 중 더 우수한 종을 번성시키고 열등한 종을 소멸해야 하는 우생학은 의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힘을 얻었다. 지금도 장애인이 아기를 낳는다고 하면 우리 모두 반대한다. 우생학의 사고이다. 우생학적 논리는 더 나아가 이민자 차별의 도구로 사용된다. 특히 이주 노동자를 그 기준으로 배척한다.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인간을 쓸모로 평가하는 도구적 존재로 격하시켰다. 이제는 신자유주의답게 경제적인 능력이 기준점으로 변했다. 튼튼한 군필자들이 황궁아파트를 지키는 일과 식량을 가져오는 일을 하고 여자들은 배분하는 일을 한다. 그에 맞는 식량 배급이 이루어진다. 약자와 어린이 보호라는 개념은 없다. 오직 능력제이다. 적의 공격은 필연적이다. 살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서로 빼앗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인가.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이 위태로운 아파트, 이기적인 배타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의 모습은 낯선 듯 익숙하다. 단연코 튼튼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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