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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an 07. 2024

"데미안"을 읽고

카인의 표적

 카인은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이고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농부가 되었다. 아벨은 둘째 아들이고 최초의 목동이다. 카인과 아벨은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 카인은 농산물을 바치고  아벨은 자신이 기르는 양들 중 가장 품질이 좋은 첫 양을 바쳤다. 하느님은 첫째 아들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은 반면, 둘째 아들 아벨의 제사는 받았다. 이에 질투를 느낀 카인은 아벨을 몰래 꾀어내어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형의 공격을 받은 아벨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벌로 카인을 영원한 유랑 생활에 몰아넣고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이때 카인은 추방되면서 하느님에게서 ‘카인의 표식’이라는 표를 받았다. 아담 또는 아벨의 후손들이 카인에게 보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다르게 말한다. 카인은 원래 우월한 사람으로 표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성경 이야기처럼 꾸몄다고. 용기와 개성이 있는 사람은 대중들에게 위협적이라 후손들이 경계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민 것이라고. 오히려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이 비겁한 자라고 말한다. 왜냐면 하느님이 동생을 죽인 사람에게 마치 표창장처럼 표식을 주고 다른 사람들이 보복하지 못하게 만든 점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나에게 새롭게 생각하는 각성을 준다. 마치 주홍글씨와도 같은 표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낙인이라는 것이 사람들과 경계되어 외롭고 두렵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일종의 방패, 보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람들의 끝없는 보복과 전쟁을 막기 위한 하느님의 지혜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는 질투와 두려움을 느끼는 대중의 이기적인 눈속임일까. 처음부터 하느님은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왜 한 것일까. 성서 해설서에는 우리는 하느님이 제사를 받든 안 받든 질투와 화를 느끼면 안 되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라고 쓰여있다. 그렇긴 하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내가 질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질투와 시기를 느낀다. 작은 질투심은 살인이라는 엄청난 일을 부추기기도 한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걸 경계하라는 말씀인가. 동양 철학에는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고 어느 부분을 동의하는지 묻는 질문도 많다. 사람은 선과 악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순간에도 악은 선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면이다. 선의의 거짓말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런 융통성 없이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그럼 악을 나쁘게만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 속의 선과 악,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데미안>은 말하고 있다. 수업을 위해 다시 읽은 책이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청소년의 감정과 나를 비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가 변했나, 사회가 변했나. 나에게는 선이 많아졌나, 악이 많아졌나. 나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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