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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Mar 04. 202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이름의 의미

책을 읽는 중간까지도 논픽션 소설임을 몰랐다. 너무나 실존 인물일 것 같은 과학자들의 이름 나열에 검색을 했다. 검색이 된다. 어, 그럼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실존인물이다.


"나"는 과학전문기자이다. 사소하지 않은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무너졌다. 혼돈의 시간,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닥친 혼돈의 시간마다 그가 어떻게 이겨냈는지 궁금해서 알아본다. 조던은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밤하늘의 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도를 스스로 만들고, 과수원에서 학교까지 땅의 지도도 형과 함께 만든다. 청교도인 부모는 이런 행동이 할 일을 하지 않는 하루의 쓸모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에 관심을 두며 자연의 모든 파편들을 꼼꼼하게 스케치하며 수집한다. 지질학자 루이 아가시와 함께 페니키스 섬 캠프에서 분류학 작업을 한다. 그리고 북미의 모든 담수어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 나중에는 스탠퍼드 대학의 학장까지 된다. 그러나 그가 모아둔 물고기의 표본은 지진으로, 화재로 파괴되는 시간이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죽음을 당하는 혼돈의 시간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를 파괴하지 않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긍정적 착각, 장밋빛 자기기만, 그릿, 자기 의지일까. 자신을 해고하려는 제인 스탠퍼드의 의심쩍은 죽음(물고기를 잡기 위해 쓴 독 스트리크닌을 사용)에까지 관여하는 그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 것인가. 다윈은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해 조심스러움,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의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프랜시스 골턴은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 우생학을 만든다. 사회의 부적합자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 이민자의 자식,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흑인 여성, 저소득자, 장애인, 범죄자, 마약 중독자들, 게으른 사람들이다. 국가는 그들을 강제로 임신하지 못하게 하는 폭력을 쓴다. 조던 , 그의 첫 번째 스승, 아가시는 적극적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우생학을 옹호한다.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는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다는 진실을 엿본 그는 바로 혼돈에 빠진 것이다. 별의 지도를 만든 어린 시절 조던은 자연의 사다리라는 지독한 믿음으로 모든 진실을 덮으려 했다. 자신의 이론이 잘못됨을 알면서도 인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연의 사다리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중요하다.


왜 제목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일까. 캐럴 계숙 윤 과학자에 의해 물고기라는 분류학이 잘못됨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조류, 포유류, 양서류는 존재하지만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던이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모으고 분류하고 명명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 물고기를 놓아주면 다른 어떤 실존적 변화를 가져온다. 즉 우주가 온다. 언어를 이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오류는 저지르지 않게 된다. 이름은 우리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긴긴밤" 책에서 노든은 아기 펭귄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노든, 윔버, 치쿠는 인간이 만들어준 이름이다. 노든은 말한다. 이름이 없어도 너를 알아볼 수 있다고, 너의 눈, 색깔, 냄새로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이름은 나를 만든다. 부모님이 지어주기도 하지만 자신이 만들기도 한다. 어떤 의미를 분명히 지운다. 그 안에 갇히게 될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름은 애정이지만 이름의 구속 또한 존재한다. 동물에게 붙여준 이름은 특징과 관련지어지고 사다리, 즉 등급이 생긴다. 분류학은 결국에는 우리 인간 존재의 이유, 생명의 이유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이해한 과학자도 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 그렇게 배운 것 같다. 사다리 맨꼭대기에 있는 인간, 만물의 영장의 자리이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으면서, 이상 기후를 겪으면서, 또한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깨달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고의 자리에서 신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과학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쉽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우생학은 지금도 존재한다. 장애인에게 아기를 낳지 말라는 말을 좋은 뜻으로 전한다. 누구의 기준일까. 비장애인이기에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악질 범죄자들에게 물리적, 화학적 거세라는 말에 대중은 반갑게 동의한다. 성경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말한다. 나는 "야훼"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는 "있는 나"이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분명한 이름이다. 그만큼 이름은 인간에게 확인하는 무엇인가 보다. 그리고 하느님은 처음으로 인간처럼 행동한 모습이다. 이름이 있어야 우리는 존재를 믿는다. 이름이 없으면 불안하다. 동물은 어떻게 이름 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존재를 인정하는 것일까. 우리의 무지는 끝이 없다. 우리가 믿어던 편리한 척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는 자유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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