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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Mar 11. 2024

"눈부신 안부"를 읽고

'나'의 언니는 가스폭발 사고로 갑자기 죽는다. 나와 식구들은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김애란의 "입동"에서처럼 남아있는 가족의 아픔에 초점을 맞춘다. 엄마, 아빠는 언니의 죽음으로 다툼이 잦아지고 엄마와 나, 동생은 이모가 있는 독일로 가고, 아빠는 남는다. 이모는 가족 부양을 위해 독일로 떠난 파독 간호사였다. 공부를 더해서 의사가 되었고 같이 독일로 갔던 마리아 이모, 선자 이모와 친하게 지낸다. 엄마는 신학을 공부하느라 바쁘다. 이모는 '나'에게 독일 친구 레나와 한수를 만들어준다.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가 뇌종양으로 아프다. 한수는 이혼한 엄마에게 첫사랑을 만나게 해 주면 힘을 내지 않을까 생각하고 레나와 '나'에게 부탁한다. 한국말로 쓰여있는 선자이모의 일기를 읽으며 셋은 추리한다. 그러다 갑자기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져 '나'와 가족은 한국으로 떠난다.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는 이대로 실패하는 것인가. 선자 이모의 증세는 더욱 악화된다.  '나'는 첫사랑을 찾았다며 거짓말을 하고 거짓 편지를 쓴다. 그리고 둘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한수와 레나의 연락을 끊는다.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쉬는 동안 그리고 서울로 볼일이 있어 온 이모와의 만남으로 잊었던 첫사랑 찾기를 더 적극적으로 한다. 그리고 다시 레나와 연락도 한다. 마침내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다. 그런데 그는 여자였다. 영화 "윤희에게"처럼 선자 이모와 첫사랑은 문학소녀 시절 서로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럼 남자 입장에서 쓴, 거짓으로 쓴 '나'의 편지를 읽은 선자 이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들 한수와 아이들이 자신을 위해 추리를 하고 수소문을 하는 모든 과정을 알고 얼마나 고마웠을까. 비록 거짓말이어도 그것은 충분히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답고 숭고한 순수이다.


 '나'는 언니를 갑자기 잃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충분히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나'를 외롭게 한다.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에서의 생활도 더욱 말을 없게 만든다. 그러나 k.h라는 약자만 가지고 선자 이모를 위해 애쓰는 "눈부신 안부"는 바로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나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남의 상처를 위해 애쓰는 마음은 얼마나 눈부신가. 이모들의 독일 생활과 그들의 각자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간은 또 다른 연대이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나도 엄마를 애도하는 시간, 성격상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혼자 아파했었다. 그러나 주위에 보이지 않게 나를 위로하는 사람들은 참 많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글, 노래, 자연이 그랬다. 나는 비로소 존재의 의미,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넘어진 사람을 직접 일으키는 행위뿐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는 눈빛, 작은 마음 하나하나는 늘 따스하다. 파독 간호사에 대해 나는 잘 몰랐다. 작가는 무척 조사를 많이 한 듯하다. 파독 간호사가 애국, 윤리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동정보다는 그들의 삶, 외국에서 한 여자로, 그리고 인간으로 살았던 삶에 주목하고 상처와 고뇌를 잊지 않고 기록하는 작가가 있고 글을 읽는 독자가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절망적이지 않은 것 같다. 최은영의 "씬짜오" 소설도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외국에서 서로 연대하며 삶을 개척하는 그들이 참 멋지다. '뿌리가 끊어진 병'이라는 말로 그들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삶을 독일로 옮긴 그들은 이미 독일인이다. 멋지게 터전을 잡고 독일인과도 연대하며 살고 있다. 마치 외국에서 들여온 제주의 야자수가 이미 제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잊히지 않게 후손들이 기록할 일은 참 많은 것 같다. 이미 강한 줄 알았던 한국여자들이 새삼 더 멋져 보인다. 잊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더 오래 우리의 기억에 아름답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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