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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ul 05. 2024

<백 년의 고독>을 읽고

박경리작가 독서 챌린지 토지 5기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는 사촌이다.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여 마꼰도 마을을 일군다. 둘은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를 낳을까 걱정을 하지만 정상적인 아이들을 낳는다. 첫째는 호세 아르까디오, 둘째는 아우렐리아노, 셋째는 아마란따이다. 집시 멜키아데스에게 배운 연금술, 천문학에만 집중하여 나중에는 정신착란을 일으킨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나무에 묶인 채 지내다가 죽는다. 아내 우르술라는 집안을 이끄는 가장이며 현재  백 살 넘게 산다.


첫째 호세 아르까디오는 점성술사 빌라르 떼르네라에게서 아르까디오를 낳는다. 나중에는 친척 레베까와 결혼을 한다. 아르까디오는 산따 소피아델 라비에댓과 결혼을 하여 딸 레메디오스와 쌍둥이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낳는다. 첫째 호세 아르까디오는 집시를 따라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또 방탕한 생활만 한다. 오로지 친척 레베까만 그를 좋아해서 결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땅을 가진다. 아르까디오는 아우렐리아노가 전쟁을 나갈 때 마을을 잘 다스려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무서운 독재 정책으로 사람들에게 총살을 당한다. 레베디오스는 마을에서 미녀로 유명하지만 머리는 우둔하다. 호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페르난다 델 까르삐오와 결혼한다.


둘째 아우렐리아노는 형과 달리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 연구실에서 연금술을 익힌다. 독재 정치에 맞서 자유군에 입대하여 대령까지 된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사람은 변하고 결국 독재자가 원하는 휴전 계약에 사인을 한다. 형처럼 점성술사 빌라르 떼르네라에게서 아들 아우렐리아노 호세를 낳는다. 아우렐리아노 호세를 고모 아마란따가 돌본다. 아우렐리아노 호세는 고모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거부한다. 그는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우렐리아노는 조정관의 어린 딸 14살 레메디오스와 결혼을 하지만 그녀는 일찍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는다. 대령에서 물러난 아우렐리아노는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모두 거부하고 다시 연금술에 집중한다.


셋째 아마란따는 친척 레베까가 집으로 오자 친하게 지내지만 라이벌 의식이 있다. 삐레뜨리 끄레스비 이탈리아인을 둘이 같이 좋아한다. 레베까와의 결혼을 방해한다. 결국 둘은 결혼을 하지 못한다. 빠레뜨리 끄레스비가 아마란따에게 청혼을 하자 거절한다. 그는 상실감에 자살하고 그녀는 죄책감으로 손에 스스로 화상을 입힌다. 그리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조카 아우레리아노 호세와 레베디오스를 돌본다. 자신의 수의를 짜고 죽는다.


4세대 미녀 레메디오스는 많은 사람들의 애절한 구애를 받지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녀로 인해 죽거나 자살한 남자들이 많다. 그래도 그녀는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녀는 어느 날 나비처럼 승천한다.

쌍둥이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는 할아버지 아르까디오와 반대의 성격이다. 오히려 할아버지 아우렐리아노처럼 연금술을 연구하고 집시 멜키아데스가 적은 양피지 책을 정독하려고 애쓰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쌍둥이 호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할아버지 아르까디오를 닮았다. 파티를 즐기며 페르나다 델 끼르삐오와 결혼을 하지만 정부가 있다. 그들은 첫째 아들 호세 아르까디오를 낳고 둘째 딸 레나따 레메디오스를 낳고 셋째 아마란따 우르술라를 낳는다. 페르나다 델 끼리삐오는 우르술라와 다른 성격으로 정시에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등 엄격한 생활 습관을 요구한다.


5세대 첫째 아들 호세 아르까디오를 교황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우르술라와 페르난다는 로마로 유학을 보낸다. 둘째 딸 레나따 레메디오스는 악기를 공부하러 유학을 떠난다. 돌아와서 바나나 공장에서 일하는 인부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와 결혼을 한다. 페르난다는 결혼을 반대했고 딸이 임신한 사실을 알자 수녀원으로 보낸다. 아들 아우렐리아노가 태어나는데 바구니에 넣어 보낸다. 셋째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브뤼셀에 유학을 떠나서 남편 가스똔과 함께 고향 마꼰도로 돌아온다. 바나나 공장이 세워지고 노동자들은 시위를 하고 3천 명이 학살당한다. 이어 5년간 대홍수가 이어진다. 마꼰도는 폐허가 되었다. 가스똔은 폐허가 된 마꼰도를 떠나고 싶어 한다. 비행기 선적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


6세대 아우렐리아노는 여전히 양피지의 암호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남편 가스똔과 헤어진 이모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조카 아우렐리아노는 연인 사이가 된다. 둘이 낳은 아이는 돼지꼬리를 가진 사내아이이다. 아마란따는 출산 후 하혈을 하다 죽는다. 그 사이 죽은 아이를 개미떼들이 끌고 간다. 집시 멜키아데스가 적은 글대로 되었다.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 밥이 되고 있다"





마꼰도라는 마을은 무덤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다. 부엔디아 가문이 만든 장소이다. 이곳은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서 근친혼이 많다. 이름도 비슷비슷하다. 멜키아데스 집시는 외부의 세계를 유일하게 알려주는 사람이다. 마을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기억을 모두 상실하기도 하고 전염병이 돌기도 하고 외부에서 온 신부에 의해 성당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조정관 돈 아뽈리나르 모스꼬떼와 타협을 하며 우호적으로 지낸다. 결혼이야기를 쭉 적은 이유는 소설의 서사가 모두 그렇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독재에 맞선 자유군은 콜롬비아의 시대적 배경인 천일내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열네 번의 암살 기도, 일흔세 번의 매복 공격, 한 번의 총살형에서도 살아남은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결국 이념을 위한 전쟁의 무의미, 같은 자유당에서도 권력을 위해 다투는 모습에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비참한 경우를 겪으면서까지 추구할 만큼 고귀한 이데올로기는 없다고 느낀다. 그는 오로지 침잠한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식탁 위의 세계사> 책 속의 바나나 리퍼블릭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이다. 바나나 공화국은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도미니카 공화국, 과테말라 등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대부분 국민들은 다국적 기업의 플랜테이션에서 일한다.  바나나 생산국일 뿐, 그것 말고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나라라고 비하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책 속의 콜롬비아 바나나 대학살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보수와 작업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였다. 회사는 콜롬비아 정부에 압박을 넣었고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여 자기네들의 국민들에게 기관총을 쏜 사건이다.


<백 년의 고독>은 단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없는 소설이다.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외조부의 손에서 자랐고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썼을 뿐이라는 겸손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렇듯 남미의 구전되는 전설적인 이야기, 신화적인 요소(오이디푸스), 성경의 모티브(창세기, 탈출기, 요한묵시록), 독재주의(천일내전)와 제국주의(바나나 대학살) 등 다양한 요소가 섞여있다. <토지>와 비슷한 부분도 있다. <토지>도 최참판댁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집중을 한다. <백 년의 고독>도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 6세대의 걸친 다양한 사람들의 서사가 중심이다.


왜 백 년의 고독일까. 콜로비아 나라의 이름은 남미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서구에 의해 원주민이 학살되고 나라가 세워진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주민과 서양인의 후손들이다. 서양인들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한 남미는 처음에는 유토피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그곳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었다. 원주민과 침략자 모두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마꼰도 사람들도 유토피아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근친혼을 일삼고 집 안의 문을 닫고 쾌락에만 빠지거나 연금술에만 심취해 있거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다. 우르술라는 아우렐리아노 대령에게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혁명을 일으키려 했지만 끝까지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는 다른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가 없거나 공허한 관계라면 고독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언가에 빠진 것, 내가 몰두하는 무언가가 오히려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려는 마음과 태도가 기억을 상실하게 만들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토지>에서 박경리 작가도 그런 메시지를 보낸다고 느꼈다. 외세에 의해 나라를 잃었지만 우리에게는 잘못은 없었나. 조선은 너무나 폐쇄적이 나라였다. 양반들은 백성들을 무시하고 성리학에만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일본에 붙는 양반과 백성이 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양반이 사라지고 우리의 문화가 사라진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얻고 잃었을까. 과거를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 다시 관계에서 멀어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왜 과거에 집착하느냐의 질문은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속임수이다. 가브리엘 작가도 남미의 아픈 역사에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 것 같다. 분명 잘못은 외세의 침략이지만 고독한 자세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닮은 역사이기에 더욱 마음 아프게 읽었던 것 같다. 고독이라는 주제보다 더 인상적인 근친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미 사람들의 세속적인 전통, 잘못된 믿음, 무관심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어려운 책인데 다 읽고 나니 소설의 위대함을 다시 느낀다. 작가는 18개월 동안 하루 8시간 동안 소설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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