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을까
유망한 젊은 여성 화가는 한 평론가에게 깊이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하나 꼼꼼히 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작품을 보면 말한다. 나쁘지는 않은데 아쉽게도 깊이가 없다고. 그 말은 그녀를 삼켜 버렸다. 그녀는 이제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아 빠르게 늙어 갔다. 가지고 있는 돈이 다 떨어지자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다 찢고 자살한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 화가의 죽음은 또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그 평론가는 이렇게 쓴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 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향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그녀가 죽고 나자 평론가는 깊이가 있다고 말한다. 한 평론가의 의해 그녀의 작품은 평가받는다. 사람들은 그 평론가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높이 평가하는 영화, 책, 예술 작품에 딴지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아쉽게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평론가가 말한 대로 생각하고 느끼려고 한 것 같다. 평론가는 객관적인 평가와 함께 주관적인 감상을 말한다. 그럼 평론가가 무조건 나쁜 것인가. 물론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평론, 감정에 사로잡힌 평론은 나쁘지만 평론가의 생각을 비판 없이 무조건 신뢰하는 대중에게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대중은 거대하기에, 물처럼 빨리 흐르기에, 걷잡을 수 없기에, 때로는 맹목적이기 때문에 무섭다. 무슨 상을 받은 작품만이 평가를 받는다면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고 더욱 서열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예술조차 서열화라니 오규원의 '프란츠 카프카' 시가 떠오른다.
자기 안에 갇힌 생각이 결국 자기를 잡아먹는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그리고 쉽게 잊어버리라고 충고할 수 없지만, 자신을 제대로 보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제대로 알기도 어려운데 남을 평가하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이다. 6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