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나헤라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온다. 11시, 12시 비가 올 확률이 높다고 하니 차라리 판초 우의를 입고 떠나는 것이 덜 귀찮을 것 같다. 28km를 걷는 날이니 배낭 배달 서비스를 맡겼다. 다음 알베르게를 정해야 배달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예약하지 않고 발 닿는 곳을 숙소로 정하는 낭만을 즐겼다. 배낭 없이 걸으면 확실히 가뿐하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오지 않는다. 어제 연박을 하고 충분히 쉬어서인지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나는 매일 걷는다. 당신은 매일 일한다. 우리는 하루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새벽에 떠나보면 벌써 스페인 사람들도 일하러 떠난다. 카페도 제법 열려있다. 나는 걸으면서 올리브 나무도 알게 되고, 아몬드 나무도 알게 되고, 포도나무의 민낯도 알게 되었다. 올리브 나무는 무척 아름답다. 왜 그리스 신화가 생겼는지 이해가 된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해 보고 상상해 본다. 아몬드도 돌로 깨서 먹어본다. 처음에는 원숭이가 먹었나 싶을 정도로 야무지게 까서 먹은 껍질을 보고 놀랐다. 눅눅한 아몬드 맛인데 맛있다. 포도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 죽어 말라비틀어진 줄 일았다. 가을이 되면 이 나무에서 포도가 열린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마트에 예쁘고 깨끗하게 포장된 식자료를 먹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나무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궁금했다.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런데 몰라도 되는 것인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닌가. 내가 늘 먹는 것인데. 봄에는 이런 모습으로 씨앗을 품고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고 지중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묵묵히 자란 포도를 본다면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느낄 것 같다. 환경 공부는 이렇게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과정이 생략된 삶을 빠르게 살고 있는 느낌이다. 과정을 알아가는 낭만은 오래간다. 오늘은 순례자 가방에 우쿨렐레를 달고 다니는 사람을 봤다. 아, 비만 오지 않았다면 그가 길에서 포도나무를 위해 연주를 하지 않았을까. 다음에 또 순례길을 온다면 나는 어반스케치를 하고 싶다. 넣다 뺏다를 반복하다가 두고 온 팔레트와 붓이다. 글을 쓰면 사람들은 글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림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잘 그리지 못하는 실력이라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남의 시선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즐기는 것이 나의 삶을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일하고 나는 걷는다. 각자의 삶에 이유와 목표가 있다. 나도 걷기를 마치면 쉰다. 지친 몸을 이끌고 식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