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니키
그동안 작은 편견이 생겼다. 외국인 남자들은 나에게 먼저 말을 거는데 외국인 젊은 여자들은 말을 걸지 않는다는 시시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없는 통계이다. 매번 호주인 커플 남자가 먼저 인사를 하면 여자가 마지못해 따라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인가. 요가하던 그룹 중에 남자만 나에게 같이 하자고 해서인가. 내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걸기 전에 먼저 질문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비가 오고 있어 테라스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샤워하고 빨래도 마치고 방의 침대에 앉아 e북을 읽고 있었다. 단층 침대 네 개만 있는 방이라 서로의 얼굴을 훤히 볼 수 있다. 마주 보는 곳에 네덜란드인이 있다. 그녀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건다. 나의 좁디좁은 편견이 깨치는 순간이다. 그녀는 무척 적극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길게 이어간다. 나는 영어 듣기가 힘들어서 잠시 눈을 피했다. 다시 눈을 마주치면 그녀는 웃으며 대화를 또 시작한다. 그래도 영미권이 아닌 나라의 영어라 천천히 말하면 좀 알아듣긴 했다. 그녀는 내 이름의 의미를 묻는다. 한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런 질문은 한국인도 잘하지 않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 이름을 설명했다.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다. 그녀의 이름은 니키이고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나온 의미이다. 니케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서로 하는 일을 소개하고 순례길에 온 동기, 지금의 기분, 각자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이 없는 네덜란드라 니키는 순례길이 무척 힘든 모양이다. 물집이 생겨 10km만 걷는다고 한다. 한강 작가를 모르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니키는 한국에 무척 관심을 보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니 책을 꼭 읽어보겠다고 한다. 나의 책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나의 어머니에 대한 책이라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나중에야 니키에게 여섯 살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린 자유를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다. 내가 하지 못한 것을 하는 그녀가 멋있다고 느껴졌다. 이런 일도 참았다며 자신의 고생을 훈장처럼 말하는 어른이 있다. 그러니 너희도 기꺼이 고생하라는 말은 열등감이다. 부당함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자신의 열등감으로 만든 말은 결국 변화를 두려움으로 생각하게 하고 주변을 분노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고생을 피하라는 조언을 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딸이 무척 보고 싶다는 그녀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보인다. 그녀는 아이도 중요하지만 자신도 중요하고 그 부분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우리는 엄마라는 공통분모가 생겼다. 엄마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엄마라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나는 다 큰 남편, 아들, 딸을 두고 여기에 왔다. 우리 식구들은 나 없이 지낼 일상에 대해 조금의 불편을 느낄 뿐 하늘이 무너질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를 바라보는 지인들은 식사를 걱정한다. 다 큰 성인들은 자기 식사를 기꺼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 나는 걱정을 하지 않았고 휴가는 당연한 나의 권리로 받아들였다. 니키도 당연한 휴가를 즐기고 있다. 나는 남편은 어떻게 지내느냐는 이상하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네덜란드는 아빠가 한 달 넘게 아이를 볼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 부러웠다. 여섯 살 딸을 두고 순례길을 걷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자유가 부러웠다. 그녀는 승리의 여신처럼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엄마라는 위치를 잠시 잊을 수 있다.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채운다.
정원사인 그녀와 이름에 꽃 의미가 들어가 있는 나는 숲을 좋아하는 공통점도 있다. 뿌리의 오롯한 무게, 꽃의 향기가 스며드는 피부의 상쾌함, 새소리가 혀에 닿는 달콤한 미각을 느끼며 우리는 걷는다. 숲은 우리에게 사랑, 증오, 눈물, 기쁨, 삶에 근간이 되는 감정을 알려주며 각자의 얼굴을 만들게 도와준다. 순례자들의 얼굴은 처음과 달라져 있다. 나는 외국인과 이렇게 오래 저녁 식사까지 하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가족과 함께 간 해외여행에서 타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드물었다. 여기도 한국인 친구끼리 온 그룹은 거의 타인과 대화하지 않는다. 혼자 온 여행의 큰 장점은 친구를 사귈 기회를 얻는 것이다. 반 고흐 미술관 근처에 살고 있는 니키를 다시 볼 날이 내 인생에 꼭 왔으면 바라본다.
평지 길이 이어진다. 식사할 곳이 없으니 먹거리와 물을 미리 챙겨야 한다.
템플라리오스는 템플 기사단, 성당 기사단 뜻이다. 이 마을은 과거 템플 기사단의 근거지가 있던 곳이지만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시골 마을의 한적함만 느낄 수 있다. 개천의 이름에 아로요 데 템플리오스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