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

에세이

by 홍지현





수잔 손택은 <뉴욕타임즈 서평>에 4년간 <사진>을 시작으로 <무고한 사진>에 이르기까지 여섯 편의 에세이를 발표한다. 그리고 <사진에 관하여>라는 책은 기존의 원고들을 여러 차례 수정하여 다시 발표된다. 사진의 본성에 관하여 여러 질문을 던진 이 책은 독자들의 찬사로 이어졌고, 그녀는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한 인물로 평가된다.

<사진에 관하여> 책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미국 ,사진을 통해서 본, 우울한’, ‘우울한 오브제’, ‘시각의 영웅주의’, ‘사진의 복음’, ‘이미지 -세계’ 등의 제목 6편으로 엮어져 있다.


<플라톤의 동굴에서>에서는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있던 인류가 사진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미지란 무상하며 별로 유익하지 않으며 비물질적이라고 과소평가했다. 예술은 사본을 복사한 가상이고 가짜이며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라고 했다. 사진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가르쳐준다. 사진은 무엇이 볼 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에게 관찰할 권리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식을 바꿔버렸다. 사진을 수집한다는 것은 세계를 수집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이 세상의 크기를 마음대로 갖고 논다. 사진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과거를 상상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해줬고 잘 알지 못하는 공간까지 갈 수 있도록 해줬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절대적인 권리를 갖게 된다. 사진에 담길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니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 사건은 일종의 불멸성을 가진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빨리 변해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카메라는 세계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사진을 통해 현실을 확인하고 경험을 고양하려는 욕구,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이들이 중독되어 있는 심미적 소비주의의 일종이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시각이 권력이 되어 버린 세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들은 사진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의 생각들이다. 사진이 보여주는 세상은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 되기도 한다. 플라톤이 말한 현실의 세상은 가짜이지만 거짓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작으로 만든 사진속의 세상에는 거짓이 있다. 또한 사진작가의 생각이 들어간 사진은 진실을 왜곡할 수 있고 축소, 확대할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제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한다. 심미적 소비 일상의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소비의 행위에도 자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연민, 동정은 일시적이며 무심히 지나가고 감정은 무뎌진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도 않고 나는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무력감마저 느낀다. 또 누구는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소비를 하기도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관음증의 대표적인 사례로 뽑히는 ‘n번방 사건’이다. 타인의 고통을 돈을 주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잔인함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반면 예능 프로그램은 타인에게 허락을 받고 촬영을 하고 대중은 관음증을 예능으로 포장한 채 타인의 사생활을 바라본다. 타인이 허락한다고 해서 남의 사생활을 바라보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돈을 주고 소비하는 자체는 범죄와 다르지 않다. 프로그램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은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지만 대중은 진실이라고 믿는다. 속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이미지와 심미적 소비문화에 젖어 있는 것이다.


<미국, 사진을 통해선 본, 암울한>에서는 사진작가 아버스를 소개한다. 아버스의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피사체가 된 사람들이 사진 촬영에 동의한 뒤 과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도록 만드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비정상정인 괴짜를 찍은 그녀의 사진은 그 사람의 고통보다는 그 사람의 초연함과 자립성이 보인다. 사진작가는 그들의 신뢰를 얻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했다. 예술가에게는 타인의 고통에 목소리를 되돌려 줄 권리가 있다. 예술가는 자발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고상함에 대한 반작용, 예술이라고 승인되어 왔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 그녀의 사진이다. 기괴한 것을 선호하고 피사체를 순수하게 대한다고 공언하며 모든 피사체는 발견된 오브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나 생각을 하게 된다. ‘도촬’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듯이 사람들은 셔터의 소리를 없애고 도둑 촬영을 한다. 찍고 싶은 대상을 마치 나의 소유인 양 찍기도 하고 나도 여러 카메라에 찍히기도 한다. 대상에 애정을 두었다면 허가를 받는 행위 자체가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애정이 없기에 무례함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름답고 위대하다고 느끼게 하는 사진의 힘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중에서 나온다. 그때 사진은 예술 작품이고 오브제이다.


<우울한 오브제>는 초현실주의의 사진을 설명한다. 초현실적이라는 것은 사진이 제시하고 이어주는 거리감, 예컨대 사회적이거나 시간적인 거리감이다.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만난 인디언을 찍은 사진은 약탈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인디언이 신성시하는 물건과 장소, 종교 행사 때 추는 춤 등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우리는 인디언의 사생활을 침해했다. 그들의 생활을 바꾸어 버렸다. 관광객들이 휩쓸고 간 자리는 인디언의 의식을 변하게 하였다. 어떤 대상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진의 피사체를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사진작가는 약탈하면서도 보존하고 고발하면서도 신성시한다. 신대륙의 놀라운 광활함과 낯선 모습을 마주 대하자 사람들은 자신이 방문한 장소를 소유라도 하려는 듯이 카메라를 휘두르고 다닌다. 또 사라져 가는 것을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그 사라짐을 재촉하기도 한다. 남의 고통이 있는 자리인 팽목항을 반바지와 선글라스를 낀 관광객의 차림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관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찍은 사진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자 사생활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의 터전을 잃게 만들었다는 현실에 놀랐다.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소비였던 것인가. 누구에게나 그럴 권리는 없다. 이국적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사진을 통해 간직하려고 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뒤에 숨은 호기심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 그 호기심이 타인의 파괴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 최근에는 남들이 가지 않은 곳, 오지를 여행하는 것이 마치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자연을 파괴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사진을 통해 경험한다는 것은 파괴이다. 공유 속에서 우리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는 그녀의 통찰이 돋보인다.


<시각의 영웅주의>에서 사진의 미화를 고발한다. 위조된 사진은 현실을 왜곡한다. 사진의 역사는 순수예술에서 유래된 미화의 원칙과 진실을 말하는 원칙이 벌인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움보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대담하고 엄격한 날 것 그대로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여전히 미화하고 있다. 가난마저 유희의 대상으로 바꿔버린다. 사진의 미학적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켜 버린다. 카메라는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 사진의 리얼리즘은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도덕적 불감증을 가져올 수 있다. 사진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우리가 아는 것은 줄어든다. 정작 사진을 통해서 바라보는 행위는 이 세계를 취득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만들며 결국 미적 의식은 고양시킬지언정 정서를 메마르게 한다. 누구나 실제 자신보다 잘 나온 스냅사진을 좋아한다. 수 십 장에서 수 백 장을 찍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름답게 나온 사진은 나인 것일까? 무엇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과 사진을 통해 나를 평가하는 타인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조차도 아름답게 보이는 사진 또한 무엇이 본질인가를 놓치게 만든다. 그 사람의 고통이 보이지 않고 사진 이미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무지와 맹목성과 부도덕성을 주입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름답게 찍힌다고 해서 그 물건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오로지 아름다운 무언가를 쫓고 있다. 아름다운 여행지의 풍경, 아름답기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 아름다운 분위기가 있는 카페 등의 사진이 우리의 소비를 자극한다. 우리의 이데아는 지극히 아름다운 현실에 있다. 시각적 이미지가 중요시되면서 정서와 순수 예술은 축소되었다. 사진에 비친 이미지의 동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사진의 복음>에서 사진이 보여주는 리얼리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을 당황케 할 만큼 너무나도 쉽게 사진이 찍힐 수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카메라가 낳은 성과의 원작자가 될 수도 있다. 리얼리즘은 실제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지각한 것을 보여주는 그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다. 사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기록하고 편견 없이 관찰하고 목격하고 탐구한다. 사진은 개성 있는 예술가의 의식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로서 힘을 갖는다. 미디어 예술은 세계 전체를 재료로 삼는다. 진정한 리얼리즘은 공간적, 시각적 의미의 실존이 아니라 자각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은 그 자체가 진실이다. 간직하고 공유하고 싶은 욕망은 친밀감이다. 마치 우리의 가족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없는 가족을 기억하고 소유하고 그 기억 속에서 재정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실존하고 친밀하다. 내가 사랑하고 경험한 모든 것들은 실존이다.


<이미지-세계>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사진의 역할을 성찰하게 해준다.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에 개입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곳에서 소외되도록 만드는 식으로 아주 쉽게 우리의 습관을 형성해 놓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지에 기반한 문화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구매를 촉진하고 계급, 인종, 성의 갈등이 빚은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오락거리를 제공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대중을 위해서 구경거리를 제공해주고 통치자를 위해서 감시대상을 포착해 준다. 이미지 생산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급해준다. 다양한 이미지와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가 자유 자체와 동일시될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세상에서 우리는 소비를 기꺼이 사진으로 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여행과 전쟁, 상품, 심지어 자신의 사생활 속에 담긴 소비, 이미지는 끝도 없이 공유한다. ‘멋진 신세계’ 책에서 말하는 소마가 이제는 사진 이미지인 것이다. 스트린을 포함한 광고 이미지, SNS 속의 사진과 전쟁의 정보 모두 현대인의 소마이다. 풍요는 더 많은 풍요를 필요로 하고 많은 사람들은 공유라는 정당화로 이미지를 서로 맞바꾼다. 그럼 무엇을 잊기 위해 우리는 사진이 필요한 것일까? 나를 위한 것인가? 타인을 위한 것일까? 자본주의를 위한 것일까? 우리는 사소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되고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다양성보다는 획일적인 문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무언가를 의심없이 소비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끝없는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수록 사진 속에 복잡하게 엮여 있는 우리의 세상을 보게 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끝없이 묻고 답하는 세상에서 답을 찾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주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왜 우리는 더욱 행복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더 심각하게 성찰해야 하는 것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모든 것이 똑같은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현대에서 사진이 주는 이미지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이데올로기 전달자인 것이다. 소비하고 소비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동안에 나와 타인의 개성은 무시되고 나와 타인의 고통은 깊어질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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