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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06. 2016

기둥


sunny juice camera, 점촌마을





외할아버지는 올해로 아흔일곱이 되었다. 외할머니의 연세는 여든아홉으로 두 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늘어가는 주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보낸 세월만 해도 70년 남짓 되었을 테니까.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한 목소리와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을 마주할 때면 몇백 년을 살아온 거목을 보기라도 하는 듯 압도됐다.  

외할머니가 마당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진 사건 때문에 두 분이 부모님 댁에서 일주일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평소 애지중지하던 큰외삼촌 댁으로 가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여섯 남매 중 그 위치도 어중간한 넷째인 엄마가 곤란을 겪는 두 분을 보다 못해 나선 결과였다.  엄마와  둘째 이모는 지금도 종종 장난스레 이야기한다. 그렇게 잘나고 자랑스러운 장남은 뭐하고 있냐고, 그래도 장남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라고. 


나는 외할아버지가 고열로 응급실에 실려갔던 날 저녁 대구에 도착했다. 외할머니는 홀로 거실에 계셨다. 철이 들어버린 이후로 줄곧 데면데면했지만 곁으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용기를 내고 싶었다. 외할머니는 따뜻한 말 몇 마디를 건넨 뒤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어색함을 느끼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담할 정도였다.

저녁 드라마를 보던 외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며느리를  저렇게 괴롭히면 안 된다고. 그들도 예쁨 받고 자란 귀한 딸이라 요즘 저렇게 굴면 다들 도망간다고. 구십 줄을 바라보는 노인의 입에서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자꾸만 거실을 걸어 다니셨다. 내게는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소화가 잘 안된다고 말씀하셨지만,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둘째 이모가 말했다. 노친네, 할아버지가 잘못될까 걱정돼서 안절부절못하는 거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는 서로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 같은 것이 된다. 그걸 잃게 되면 어떤 기분이겠어.


외할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시고 난 며칠 뒤에 두 분은 큰외삼촌 댁으로 떠나게 됐다. 외할머니는 머물렀던 방에 몰래 20만 원을 놓고 가셨다. 자기 배로 낳은 딸의 집인데도, 맘 편히 머무르시라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스스로를 짐이라 여기셨던 걸까. 엄마는 돈을 발견하고 곧장 외할머니에게 전화해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글썽였다.  


외할머니는 점심이면 살찐아, 하며 동네 고양이들을 불러 모으셨다. 고양이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자식을 여덟이나 낳고, 그중 둘을 가슴에 묻고, 손주가 열 명에 중손주가 네 명이나 되는데도 고양이들까지 거둬 먹이셨던 것이다. 그런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나보다 오래 사셨으면 하는 것은 역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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