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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07. 2016

2009

1월에서 4월까지.


낯선과 날선의 경계에서 나는 보잘것없는 낱선으로 자리했다. 말장난에 지칠 무렵 소리와 장면들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 다니며 살고 있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의미를 찾아온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이곳에서 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죽은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나는 자신에게 발을 걸듯 말을 건다. 자신이 역겨워 쫓기듯 숨으며 살아온 삶의 끝에 돌아올 건 또 뭐란 말인가. 애꿎은 전봇대를 발로 차고 하루하루 깎여가는 달을 바라본다. 일주일 내내 술을 마셨지만 무엇도 떨칠 수 없었다.


당신의 두 눈 속 취기에 빠져 나는 종일 기다렸다. 꼼짝하지 않고 누워 기다리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숨죽여 우는 소리만 빗물 떨어져 생긴 파문처럼 방안에 번지니 술에 잠이 드는지 잠에 술을 붓는지. 나는 곧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이빨을 박는다. 당신 마음 한 조각 안주 삼아 밤을 새우기엔 내 마음이 너무 독하다.  

이 이상 바닥으로 내려가기 전에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생각들이 날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룰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루지 못한 것들은 결국 순수하지 못하고 이미 한 번씩은 버려진 것들인데, 뒤늦게 주워 담는다 한들 얼마나 깨끗해질 수 있을지?
평생을 울부짖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일 뿐이다.


나는 입 안에서 모래더미처럼 맴돌던 말들을 한 번에 삼켜 버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집 밖으로 나서길 포기한 것과 같은 기묘한 감각이다. 시선은 창가로 향한다. 지하에서는 달이 보이지 않는다. 실로 창문의 존재가 무색하다. 가로등 불빛만이 축축하게 스며들어 곰팡이처럼 방 안에 퍼진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입을 연 것은 빈 술병들 뿐이다. 그리고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입을 닫은 것은 술로 꽉 찬 내 몸이다. 이젠 내 존재가 무색하다. 참담한 기분에 울어 보기라도 하려 하지만 입을 열면 쏟아지는 것은 팍팍한 모래 알갱이뿐이다. 조각난 달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조각나고 보름은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다.


두려울 만치 조용한 방 속에 물이 번져가는 소리가 들린다. 악몽을 꾸는 건지, 악몽 속에 사는 것인지 끝끝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숨이 턱턱 막히는 나날들 속에서 무력감에 빠진 채로 헤엄을 친다. 어쩌면 이대로 한없이 바닥까지 가라앉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손끝조차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평생을 원해 왔던 장면이 눈앞에 있는데 되려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뭘까. 예전엔 해가 넘어가는 장면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만큼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 시선은 무겁게 느껴질 만큼 바닥을 향한다. 나는 시곗바늘처럼 시간을 거쳐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마음은 닳을 대로 닳아 헐거워져 본래의 속도로 살아갈 수 없다. 시계의 초침이 허덕이고 부조리함에 찢긴 마음도 초침의 숨에 맞춰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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