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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07. 2016

무형무색


minolta x-300, 테디베어 박물관



자각몽처럼 현실을 인지하는 일은 여지없이 괴롭다. 꿈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엔 쾌감이라도 동반되지만, 현실과 꿈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반드시 고지서가 날아온다. 물론 값을 치를 능력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결국 꿈을 꾼다는 건 현실에 빚을 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껏 보내온 날들은 치열함과는 항상 거리가 멀었고 열등감을 느끼기 이전에 비교하고 비난할 대상은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다만 나는 그저 무형무색으로 살아가되, 나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들만큼은 이 땅 위에서는 보기 어려운 절절함을 가졌으면 했었다. 내 딴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글은 밖으로 나오면 구차한 변명 같을 뿐이고 그림을 그릴 땐 도살장의 돼지 같던 자신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막연히 꾸던 아름다운 꿈이 확실한 형태와 색채를 띠고서  햇빛 쨍쨍한 대낮에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도리어 악몽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아무리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난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 아니라 진작 끝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무형무색으로 사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허망한 꿈을 꾸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아마 나는 앞으로도 죄인처럼 살아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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