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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Dec 08. 2022

임원들의 퇴임을 바라보며...

전쟁에 승자는 없다

연말이다. 수많은 임원들이 집으로 간다. 그들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파워를 잃은 슈퍼 히어로를 보는 느낌이다. 있을 때는 죽을 만큼 미웠는데, 떠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함마저 든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임원들의 퇴임 앞에서는 눈치를 보고, 내일도 출근할 수 있는 내가 죄라도 지은 기분이다. 몇 주 전부터 돌던 살생부는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인사팀에서 직원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미리 퍼뜨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임원실의 짐 정리를 도우면서도 영 기분이 편치 않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임원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일반 직원들이 상상하기 힘든 급여를 받고, 그 외에도 여러 경제적 혜택을 누린다. 게다가 근무 환경도 월등히 뛰어나며, 여러 직원들을 부릴 수 있는 막강한 힘도 가지고 있다. 특히 유교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 조직문화에서 임원은 독립된 성인들이 모인 조직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상대적 우위에 놓여 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작은 헛기침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며, 그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며칠 간의 초과 근무가 되기도 한다. 이런 특권이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들은 조직에서 굉장히 성공한 자들이다. 100명 중에 1명 정도나 될까 하는 임원이 되었고, 그 말은 본인이 속한 조직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소위 말해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요즘 화제인 월드컵으로 치면 못해도 8강이나 4강 정도는 된다. 조별 예선 통과도 불확실한 내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었던 직장 생활이고, 그 과정에서 잠시라도 임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되려 영광일 뿐이다. 큰 실패나 좌절로 여겨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퇴임을 축하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임원을 통해 조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시대는 끝이 나고 있다. 여러 대기업들은 임원의 규모를 줄이는 추세다. 게다가 최근에는 젊은 인력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 3,40대 임원을 배출하고 있는데, 이것도 곧 어느 정도의 한계에 봉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애초에 확률이 희박한 데다가 되려 젊은 인력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경쟁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서 얻어지는 보상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젊은 인력들에게 효과적으로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부터도 임원이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인력 채용에 있어서 상대적 우위에 있었고, 그들이 정한 룰을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상대적 경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직원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승자가 대부분의 보상을 독식하는 구조. 그리고 그것을 동기부여 수단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우수 인력들은 그 규칙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승자와 패자가 반드시 결정되는 게임, 혹은 전쟁에 굳이 참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되려 절대적인 경쟁을 원한다. 각자에게 부여된 의무와, 그 의무의 달성을 통한 보상. 그리고 이를 통한 내재적 동기부여. 이런 프로그램으로의 전환이 점점 가속화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화려하던 임원의 퇴임을 지켜보는 것은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는 다큐멘터리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참혹한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지만 결국은 그들 역시도 누군가에게 밀려 패자가 된다. 영광스러운 임원의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그들의 알 수 없는 패배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이상 결국은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마는 잔인한 현실. 그리고 그 게임에 뛰어들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회사생활을 마무리하게 될까. 아마도 임원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생활에 재능도 없고, 제각각인 조직원들을 품을 만큼의 배포도 없다. 기획에 얕은 재능이 있어서 간신히 밥은 벌어먹고 살지만, 큰 조직을 이끌 정도의 능력은 안 되는 것 같다. 게다가 무엇보다 임원을 위해서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헌신할 정도의 마음가짐도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적당히 여러 부서를 전전하다가 착한 후배의 배려로 그리 힘들지 않은 곳에서 적당히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정년까지만 다닐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직장생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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