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시끄러운 일이 있었다. 누군가 예산 편성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벌백계. 듣기만 해도 무섭다. 잘 아는 후배에게 물어보니 팀장이나 실무자에게 큰 징계가 있을 것이라 했다. 조직문화 관점에서 실수에 대해 징계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며, 되려 실수의 원인을 제도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후배는 나에게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형, 여긴 회사예요, 그건 너무 이상적이고요." 순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럴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그래서 한 숟가락 크게 밥을 떠서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쌀알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반드시 이 주제로 글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1. 고의성이 없는 실수는 처벌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착오도 하고, 누락도 하고, 분명히 손으로는 '가'라고 쓰고 머리로는 '나'라고 읽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인 이상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실수의 확률을 낮출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실무 인력을 고도로 훈련시킨다던가, 특정한 작업을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반복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던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휴먼 에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낮추고, 휴먼 에러가 발생했을 때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실수 자체를 원천 봉쇄할 수는 없다.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는 한 반드시 실수는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품고 가야 할 일종의 세금 같은 것이고, 이 피해를 예방하고 혹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것은 당연히 사업을 운영하는 사용자의 몫이다. 사람을 고용하는 그 순간, 휴먼 에러의 발생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의성이 있는 행동에 대한 징계는 당연히 필요하다. 고의성을 가지고 계약에 약정된 행위를 하지 않는 태만이나, 혹은 계약에 약정된 행위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위반을 수행한 경우에는 사전에 약정한 바에 따라 징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의성이 없는,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실'에 대해서 징계를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우리의 근로기준법은 민법상의 의무를 들어서 근로자의 과실에 대해서도 징계가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이는 최근 여러 판례를 통해서 부정되고 있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여전히 나는 대한민국이 노동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소위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을 느낀다.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손실마저도 노동자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을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명시된 규정이 삭제될 날이 어서 왔으면 한다.
2. 과실을 처벌하는 것은 기업에게도 불리하다.
법적인 논리나, 혹은 도의적인 이유를 떠나서, 고의성이 없는 과실에 대해서 징계하는 것은 기업의 이익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피해는 이미 발생한 것이고, 그 피해에 대해서 징계한다고 해서 피해가 경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일벌백계를 통해서 추후 일어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징계는 조직문화를 급속하게 경직시키고, 당연히 경직은 긴장을 불러와 또 다른 실수를 낳는다. 왜냐면 실수는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긴장도가 증가하면 실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 추가적인 피해가 또 발생한다. 바로 실수를 숨기는 행위다. 당연히 발생하는 실수들을 이제 사람들은 징계가 무서워 숨기기 시작할 것이다. 숨겨진 실수들은 점점 누적되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드러난다. 이미 손 쓰기엔 늦다.
물론 적당한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소위 말하는 군기가 그것이다. 나태해진 조직에서는 모든 것이 방만하게 운영되니, 적절한 긴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늘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는 방법이 꼭 징계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동기부여, 그리고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방법들은 무수히 많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실수가 잦은 아이를 때려가며 공부시키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당장엔 실수가 줄고 점수가 오르겠지만, 당사자는 그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아야 하고, 이 방법은 장기적으로 수학을 회피하게 만들 것이다. 회사는 학교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곳이다. 단기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선택이다.
3. 고의성을 가진 행동도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예산을 누락한 행동이 실수가 아니라, 개인의 영리를 취하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었다고 하자. 그래서 이제 마음 편하게 징계를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 오산이다. 징계를 하기 전에 조직원이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해야 했던 이유에 따라서 징계의 여부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의 자금을 횡령하고 개인의 계좌로 착복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돈이라는 이득을 위해서 징계의 가능성을 감수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조직에서 이런 노골적인 횡령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업무량이 많아서 미처 챙기지 않았다던가, 혹은 실수임을 알았으나 부서장의 성화가 두려워 차후에 별도 조치를 하기로 하고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하는 식이다. 물론 이것도 개인의 영리를 위한 것이기는 하나, 돈을 횡령하는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인으로써 개인의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를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자연인으로 개인의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조직의 책임이 없다. 그저 그 사람의 온전한 잘못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당연히 징계를 해야 하고, 필요하면 손실을 보상받기 위한 민사소송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다르다. 이는 개인이 그렇게 행동했다기보다, 개인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조직이 유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조직의 문화, 보고 체계, 사소한 실수를 다루는 방식, 징계에 대한 조직원들의 인식 등을 통해서 개인이 고의로 실수를 선택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되도록 한 것은 사용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결국 조직원은 사용자의 지시에 의해서 일을 하는 존재로, 그 사용자의 지시는 단순히 명시된 서류, 구두로 전달된 지침을 넘어서 그 조직의 문화와 일하는 방식에 모두 녹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행위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4. 징계는 체벌이 아니라 무게의 추다.
징계는 개인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어 어떤 선택을 강제하도록 하는 체벌의 몽둥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폭력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몽둥이를 들고, 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널 때리겠어라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과거 만연하던 교육 방식이었으나, 이제와 돌아보면 그것이야 말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징계란 저울의 한쪽 추에 올릴 수 있는 무게 추다. 개인이 의무를 지켰을 때의 이득을 한쪽에 올리고, 그렇지 않았을 때의 손해를 한쪽에 올려 이득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배제한 채, 경제적인 주체인 개인이 자신의 선택과정에서 참고할만한 기회비용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징계다. 두려움이나 분노라는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징계를 체벌처럼 여긴다면, 적어도 규칙은 지켜보자. 전문가들이 말하는 자녀교육에서의 체벌 규칙이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가 난 상태로 매를 드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절대 해서는 안될 행동이다. 체벌을 위해서는 반드시 아이들과 함께 지켜야 할 약속을 합의할 것,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경우 가할 체벌에 대해서도 사전에 합의할 것, 실제 체벌 중에는 절대 화를 내지 말 것, 그리고 되도록이면 체벌 자체를 금할 것이 그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에게도 그러한데, 독립된 인격체들이 모인 회사에서는 당연히 감정적인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징계는 단순한 불이익일 뿐, 군기의 수단은 더더욱 아닌 셈이다.
5. 징계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문화의 정비다.
앞서 이야기한 실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나름 인맥을 통해 예산 편성 담당자의 실수 원인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최근 들어 인원 감축을 강도 높게 실시한 덕분에 꼼꼼하게 챙길 여유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항목 하나를 통째로 빼먹은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최근 들어 경영진들이 회의 석상에서 공개적으로 화를 내는 일이 잦았고, 그로 인해 팀장들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처음 실수를 발견했을 때 실무자는 팀장에게 보고를 했으나, 팀장이 이를 즉시 상부에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유는 분명 추가 예산 편성이 있을 것이었고, 그때 누락된 항목을 포함시켜서 예산을 수정하게 되면 실수를 드러내지 않고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경직된 조직문화의 전형적인 사례였고, 이를 일벌백계로 대응한다는 것에 나는 매우 안타까웠다. 이 경우 개인에게 잘못을 묻기보다는 회사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소해야 했다. 지나친 업무 부담, 경직된 조직문화, 실수를 감추도록 하는 경영진들의 화 등등이 그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경영진들이 구성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된다. 경영진이 구성원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잘못은 전적으로 구성원 개인의 책임이 된다. "저 놈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르며 틈만 나면 다른 생각을 하는 놈들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나 하고 말이야!"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반대로 조직원을 믿는 경우 전혀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나름 애써서 했을 텐데 왜 저런 실수가 있었을까. 실수라면 검증을 못한 시스템이 문제고, 고의라면 조직문화가 문제 이진 않을까?"
6.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기업도 결국은 사람이 모인 곳이다. 폭력과 강압, 화, 분노, 두려움으로 지배된 조직은 결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다. 이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서 수많은 문장을 썼지만 요점은 이것이다.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 그리고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문화, 다시 말해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징계도 필요하다. 다만 분노와 화에 점철되어 폭력의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는 징계보다는, 개인들에게 위법 행위가 스스로 이득이 되지 않음을 알려주는 기회비용으로서의 징계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개인들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징계면 더 좋겠다.
기업경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통이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소통이 있다. 하나는 나의 잘못에 대한 소통이다. 내 잘못을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두 번째는 상사의 의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소통은 내가 생각하기에 기업의 경쟁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리고 이 소통을 위해서는 매우 고도로 발달된 조직문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앞서 말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공개적인 회의 석상에서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일벌백계를 외치는 사람들이 매번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게 다 회사를 위한 거야! 회사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그러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회사는 별도의 생명체가 아닙니다. 구성원들의 모임이지요. 회사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회사의 구성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사를 사랑하신다면 구성원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십시오. 그것이 회사를 위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