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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Sep 06. 2020

쫄지마 그거 다 돈이야

김프로의 자진납세

불안한 것도 억울한데 돈까지 낸다.


요즘은 유연근무제 시행 중이라 출근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보통 아침 10시까지만 출근하면 되는데 보통은 9시 정도까지는 간다. 원래 출근 시간이 8시까지 였으니 1시간 정도 여유 있게 가는 것이기도 하고, 유연근무제라고는 하지만 뇌가 유연하지 않으신 분들이 10시는 좀 불편해하시니 적당히 타협하는 셈이다.

유연근무제로 바뀌고 가장 좋은 점은 아침에 크게 쪼들리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아홉시쯤에는 회사에 들어가니, 몇 분 싸움인 버스나 지하철 타이밍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다. 버스가 늦게 와서 조급한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른다든지, 늦어서 택시 탔는데 회사 앞에서 신호에 걸려 가슴을 졸이는 일이 없다. 이게 생각보다 심적 안정에 큰 도움을 준다.

처음에는 나도 사람인지라 과거의 습관이 남아서 9시가 일종의 커트라인 같은 작용을 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일어나서 9시가 넘겠다 싶은 날은 택시를 탄다던가, 혹은 차를 가져 나오곤 했다. 둘 다 택시비와 주차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는데, 그래도 9시가 넘어서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꽤나 마음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그냥 택시비와 주차비를 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면서 가끔 차를 가지고 가도 9시 30분에 갈 때가 있고 하다 보니 그런 것들도 차츰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어지간히 늦어도 그냥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닌다. 좀 늦어서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그 정도가 점점 약해지면서 굳이 비싼 주차비나 택시비를 낼 정도는 아니게 된 셈이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마음 졸여서 냈던 택시비나 주차비는 사실 내가 쫄려서 내는 돈이었던 셈이다.

내 불안의 값은 얼마나 될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처럼 굳이 필요도 없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생각보다 큰돈을 쓴다. 잘 깨지지도 않는 액정이 혹여나 깨져서 목돈이 나갈까 봐 매달 불필요하게 내는 휴대폰 보험료도 이런 종류의 비용이다. 혹시나 Data 비용이 높게 나올까 봐 한 달 무료 data를 높게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그 반도 못쓰는 달이 태반인 경우에도 이런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비용을 간편하게 자진납세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쫄려서 먼저 나서서 돈을 낸다는 의미에서다. 그럼 이런 자진납세의 크기는 어느 정도나 될까? 자진납세의 규모를 알아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선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부담하는 자진납세의 규모를 살펴보자. 자진납세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만, 이를 하나로 퉁 쳐서 계산하는 방식이 있다. 바로 로또에 당첨됐다는 전제를 해보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20억의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하자. 그럼 과연 계속 회사를 다닐 것인가? 물론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자산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를 어느 정도 배제하고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답변은 한결같다. 그 20억을 가지고 어딘가에 투자를 하고, 회사는 그냥 맘 편히 다니겠다는 것이다.

팀장이 부당한 지시를 하는 경우 당당하게 할 말하면서 거절하기도 하고, 정시 출근에 정시 퇴근하면서 회식 가자는 제안엔 가볍게 씨익 웃으면서 거절하는 삶.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직장 생활일 것이다. 20억이 있으면 이렇게 회사를 다니고 싶다는 말은, 조금 과장하면, 남 눈치 안 보고 회사를 다니기 위해서 20억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다. 즉, 우리는 20억 정도를 눈치 보느라 자진납세하고 있는 셈이다.

나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간이고 싶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 뭔가 좀 이상하다. 경제학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내 자산 규모와 관계없이 일을 하기로 했으면 가장 효율적인 직장 생활의 방법을 찾아서 수행하는 것이 합리적인 인간인 것 아닌가. 왜 자산이 20억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월급을 대한 나의 노동의 수준이 이렇게 차이가 나야 하는 것인가. 내 자산에 따라 회사가 나를 차별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바로 전망이론이다. 전망이론은 기존 주류 경제학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된 행동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들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존 경제학은 인간이 확률과 기댓값을 곱한 결과를 예측하고 선택한다고 가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95%의 확률로 1억 원을 받는 것과 그냥 9천만 원을 받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기대수익이 높은 95%의 확률로 1억 원을 받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9천 만원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망이론의 주장은 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확률에 기댓값을 곱한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맞지만, 확률과 기댓값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수학적이지 않은 결과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확률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사람마다 주관적인 가중치가 적용되고, 기댓값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그것이 손실인가 이득인가, 그리고 나의 자산규모에 비례해서 큰가 작은가 등에 따라서 기댓값을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확률과 기대값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확률과 기댓값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예상되는 결과도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돈이 20억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한 푼도 없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직장 생활을 눈치 보면서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확률은 수학 보다는 내 마음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확률이다. 사람들은 수학적인 확률에 가중치를 부여한다. 0%와 0.0000123%를 비교해보자. 수학적으로는 이 두 개의 확률은 굉장히 유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꽤나 다르게 판단한다. 0%는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확정된 값이다. 반면 0.0000123%는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불확실한 값이다. 따라서 가능성의 효과로 인해 실제 수학적인 확률보다 더 높게 이 확률을 평가한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라면 짐작했겠지만 0.0000123%는 바로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다.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을 실제 수학적으로 발생할 확률보다 더 높게 인식한다. 따라서 수학적으로 계산된 기대이익으로만 보면 절대 살 이유가 없는 로또를 매주 구입하는 것이다. 이렇듯 아주 작은 확률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실제 확률보다 더 높게 그 확률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손실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거의 발생하기 힘든 일이지만, 약간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수학적 확률보다 더 많은 가중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불필요한 보험에 가입한다던가, 해고가 사실상 어려운 직장 생활임에도 눈치를 보면서 회사를 다닌다거나 하는 일들이 대부분 이런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된다.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에 비해 과도하게 비용을 지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대로 높은 확률에 대해서는 100%가 아니라는 이유로 확률을 과소평가 한다. 95%의 확률은 수학적으로 100%와 크게 차이가 없는 확률이지만 확정된 값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제 수학적 확률보다 더 낮게 인지하는 것이다. 아까 물었던 95%의 확률로 1억 원을 받는 것보다 그냥 9천만 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5%의 불안함이 95%의 확률을 낮게 인식하게 만드는 셈이다.

가난 할 수록 더 가난해지는 비밀


두 번째는 기대값이다. 사람들은 같은 크기의 이득과 손실에 대해서 전혀 다른 선호를 가진다. 100원의 이익으로 100만큼의 즐거움을 받는다면, 100의 손실로는 약 250의 괴로움을 느낀다. 이를 손실회피성이라고 한다. 즉, 이득보다 약 2.5배 손실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이는 통계적으로 증명된 값으로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물론 개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값이다.

기댓값에 영향을 주는 인자는 또 있다. 바로 준거점이다. 이는 손실과 이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1억 자산가에게 100만 원의 이득과, 1억을 빚진 사람에게 100만 원의 이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마지막 인자는 바로 민감도 체감이다. 이는 한계효용 체감과 같은 것으로, 손실이나 이득이 무한정 커진다고 해서 효용도 같이 커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런 확률과 기댓값에 대한 인간의 인지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종종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100%의 확률로 1억을 잃는 경우와 90%의 확률로 1억 2천을 잃거나 한 푼도 잃지 않는 두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자.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기대손실이 가장 작은 100%의 확률로 1억을 잃는 경우를 선택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10%의 확률에 지나치게 의지하여 되려 기대손실이 더 큰 90%의 확률로 1억 2천을 잃는 경우를 선택한다.

이미 두 가지 경우 다 손실이 확정된 상황에서는 준거점이 이동하여 위험을 되려 선호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한참 떨어진 주식을 차마 손절하지 못하고 종잇조각이 될 때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고수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마음이 불필요한 비용을 치르지 않게 하려면.


이러한 인지과정에서의 비합리성에 의해서 우리는 기존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합리적 인간에 비해 더 많은 손실과 더 적은 이득을 누리고 있으며, 이는 곧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경제적 선택에서 작용하는 이 인지적 비합리성은 실제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경제적 이득과 손실로 이어지는지를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돌아가 보자. 만약 우리가 보다 냉정히 내가 주어진 환경을 분석할 수 있다고 하자. 0.0000123%가 거의 0에 가까운 값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매주 의미 없이 몇 만원치의 로또를 구입하는 대신 이를 적금, 혹은 안정적인 주식과 같은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작은 확률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여 직장에서 지나치게 눈치를 본다면, 조금 내려놓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돈이 적을수록 작은 손실에 민감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서 작은 확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전망이론에 따르더라도 준거점이 이미 손실 영역에 있거나, 자산 규모가 작아 작은 손실에도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더 많다. 즉, 가난할수록 몸과 마음이 모두 가난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냉정해져야 한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자산 규모는 내 의지로 바꿀 수 없지만, 마음은 내가 어떻게 먹냐에 따라서 바꿀 수 있다. 비합리적인 인간이 좀 더 수학적으로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가는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냐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다시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자. 95%의 확률로 1억 원을 받는 것과 그냥 9천만 원을 받는 선택지가 있다. 무엇을 고를 것인가? 우리의 생각보다 95%는 훨씬 더 높은 확률이다.

그러니까 쫄지 말자. 쪼는 거 그거 다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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