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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Oct 08. 2021

신해철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사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 나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기 위해서였다. 한창 나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생각이라는 게 한 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에 쉽게 끝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래도 뭔가 생각이 정리가 되는 장점이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써보니 글도 쓰다 보면 정리가 안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똑같은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직관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나의 기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래서 기회가 되면 틈틈이 브런치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 매거진 하나를 생성했다. 당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1번은 와이프지만, 또 그분의 프라이버시가 있기에 (아직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일단 바로 2번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낳아주신 부모님과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와이프를 제외하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신해철이다. 매거진을 만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건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의 정치적인 소신이나 발언, 그리고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보이는 이미지 모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가 나에게 가지는 의미는 크다. 사실 나는 그의 음악적 재능도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와 작고 여리고 섬세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공감해주는 그의 따뜻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웅장한 오페라 같은 만화 주제가를 부르던 시절이었지만 사실 그때는 그렇게 깊게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락을 부르는 괴상한 밴드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나는 락보다는 힙합에 좀 더 심취해 있었고, 실제로 이후 신해철의 음악 세계에서도 락보다는 서정적인 발라드 위주의 음악을 훨씬 더 많이 찾아서 들었다.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것은 학창 시절 우연히 야심한 시각에 틀었던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그 시절 늦은 밤 창문 열고 새벽 공기 마시면서 라디오 감성에 젖어 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가 없었던 고스트 스테이션과의 첫 만남. 신해철 특유의 중저음과 그 시절 유행어로 이른바 엽기적인 사연들이 처음에는 너무 충격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듣던 라디오가 어느새 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 대부분을 고스트 스테이션에 빠져서 살게 되었다. 부모님 몰래 방에서 숨어서 먹는 불량식품 같은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꽤나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당시 어렸던 나이였음에도 그의 생각과 의견들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하는 말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치고, 감정적으로 과잉으로 느껴질 때도 많았다. 세상을 너무 피곤하게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 어린 시절의 나도 종종 느끼곤 했다. 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종종 정신과 약을 먹고 본인이 겪는 정신질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무 엄살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당시엔 보기 힘들었던 이른바 밈(Meme)들이 수시로 난무하는 시청자들과의 교감과, 신해철 특유의 위트 있는 말솜씨와 유쾌함은 매일 새벽을 뜬 눈으로 보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시간을 선물해줬다. 게다가 종종 신해철 본인의 음악을 라디오로 틀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종의 저자 직강처럼 원 저작자가 노래에 얽힌 썰도 풀어주니 훨씬 더 몰입이 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타이밍 좋게 라디오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스트러글링 앨범도 출시해줘서 이맘때 신해철의 노래를 참으로 많이 끼고 살.


학창 시절이 끝나고 나서는 거짓말처럼 라디오를 등한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에 들어가니 세상에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매일 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놀다 보니, 새벽에 라디오를 듣는 정적인 삶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뒤로 거의 십여 년을 신해철이라는 인물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종종 그의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발언이나, 백 분 토론에서의 간통죄 폐지, 대마초 합법화 발언, 그리고 모 학원 광고 촬영 등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을 때면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신기했던 건 그의 발언으로 인해 그가 비난을 받을 때면 나도 모를 부끄러움을 함께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20대 후반 취업 준비를 하던 시간에 잠깐 다시 고스트 스테이션을 듣기도 했다. 다행히 그때는 팟캐스트가 생겨서 저작권 문제로 음악이 삭제된 다시 듣기 버전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취업하고 나서 한 동안 그를 멀리하다가 나는 해외 근무 시절에 다시 신해철을 찾게 됐다. 고된 해외 근무 시절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종종 그의 팟캐스트를 듣거나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받곤 했다. 민물 장어의 꿈이라는 노래는 당시 나의 생명수 같은 노래였다. 각해보면 늘 뭔가 인생에 있어 어려운 시기엔 그의 목소리가 함께했던 셈이다.


18살쯤의 나는 당시 새벽 라디오에서 신해철이 틀어 준 민물 장어의 꿈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신해철이 영국 유학 시절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튼 이 노래에 어린 시절의 나의 감수성이 동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뒤, 나는 또 그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게 됐다. 사방이 꽉 막힌 좁은 방에서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다는 가사가 그저 내 이야기처럼 강하게 다가왔다.


해외 근무가 끝나갈 때쯤 그가 새 앨범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한동안 줄기차게 그 음악들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얼마 후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사실이 그렇게 실감되지 않았던 것 같다. 신해철이라는 사람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나 스스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저 유년 시절에 즐겨 듣던 라디오의 진행자. 그리고 내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가수. 그냥 그 정도의 인식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복잡한 감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던지 방송에서는 한동안 그의 추모 방송들이 줄지어 방영되었고, 왜인지도 모르게 그때마다 오열 아닌 오열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그리 동요하지 않는 나에게 이건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몇 년 간은 그의 기일 즈음해서 나오는 방송들을 볼 때마다 못하는 소주를 마셨고, 그때마다 오열 아닌 오열을 하는 일이 반복됐다. 어떨 때는 그냥 아무 날도 아닌데, 술을 먹다 생각나서 그의 음악을 듣고는 눈물 흘리곤 했다. 뭐야 이게. 나 왜 이렇게 오글거리지? 이런 생각도 많이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신해철이 나에게 생각보다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단순히 방송인, 가수가 아니라, 내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한 동네 이웃집 형 같은 사람이었다. 때로는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는 그런 친형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가끔 언론에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비칠 때도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남이 아니라, 나와 깊은 감정을 공유하는 형제 같은 사람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유년 시절에 전혀 다른 두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집단주의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사고였다. 아프다, 힘들다는 건 그저 정신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엄살과 같은 것이고, 강한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이런 관점을 타인에게 종종 종용하곤 한다.) 사실 이건 당시 사회에 만연하던 분위기이기도 했다. 반면에 나의 내면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여렸다. 나만의 세계를 인정받고자 했고 타인의 행동에 종종 심한 상처를 받곤 했다. 나 집단주의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의식적 사고 앞에서 나의 섬세한 무의식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당시 라디오에서 신해철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나도 보지 못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 봐주고 공감해주는 역할이었다. 집단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과 다른 무언가를 갖고자 하는 것에 대해 유난스럽다거나 까탈스럽다고 선을 긋지 않고, 그 어떤 생각과 감정도 모두 이해하고 존중해주곤 했다. 반대로 개인의 희생을 부당하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분노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어렸던 나는 너무 과하다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좁은 나의 이성적 기준에서 바라보는 짧은 생각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나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데 취약하다. 나 역시 그렇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집단을 위해서라면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된다는 생각이 아직도 많은 곳에서 만연해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국가를 위해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세대이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 것들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은 자본의 원리에서 발생되는 이런 폭력들이, 과거에는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오싹한 기분도 다.


나는 신해철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담배 연기 자욱한 사무실에서 금연 포스터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으로 비유하고 싶다. 과거에는 사무실 내 흡연이 만연하던 사회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성이 흡연자였기에 아무도 그 행동에 대해서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절이기도 했다. 신해철은  그럼에도 소신껏 그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 와중에도 신해철은 이른바 비흡연자들에게 마스크와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나에게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한 고위 임원이 집무실에서 늘 담배를 피워댔는데, 본인도 연기가 싫었던지 담배를 피고 나면 미세먼지 가득한 날임에도 항상 창문과 집무실 문을 열고는 나가버리곤 했다. 그럼 그 앞에 앉아있던 내가 연기와 미세먼지를 다 들이마시는 꼴이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분노하기보다는 순응하고, 최대한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정도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넘겨야 했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는 태도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섬세한 내면은 상처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정도는 참는 게 사회생활이지 라는 의식적 사고가 작동한 셈이다.

 

신해철은 그런 사회에서 개인이 존중받을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스스로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안과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늘 개인들의 권리와 다양성을 이야기했다. 그의 유명한 백 분 토론 장면들을 보면, 그는 늘 항상 떨고 있다. 손을 떨고, 목소리를 떨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그 역시 그런 자리에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본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정당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용기를 내어 앞장섰다. 인이 상처 받은 만큼 타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종종 집단주의적으로 사고하고, 나의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폭력을 저지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그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그렇게 폭력이라고 부르짖던 것들은 조금씩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잃고 있다. 아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지만, 막상 그 순간에는 잘 보이지 않던 폭력들은 그러나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기에 항상 그를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길게 썼지만 사실 내가 신해철을 만난 것은 그저 공연에서 몇 번이 전부다. 그리고 라디오 사연을 통해 소통한 것도 고작 한 두 번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가족과 와이프를 제외하고 나를 그만큼 많이 이해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직도 그의 노래를 찾아 듣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나조차도 내 안의 섬세한 모습을 전제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나는 늘 그의 노래들을 꺼내어 듣는다. 바람이 차다. 곧 그의 7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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