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경자 Feb 08. 2022

글쓰기가 싫어 글을 씁니다.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

회사에서 십 년 정도 기획을 하고 있다. 말이 기획이지 사실 대부분의 일은 보고자료를 만드는 일이다. 보고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전사 차원의 과제일 수도 있고, 윗분들의 지시사항에 대한 이행 여부일 수도 있다. 하여간에 이런 일만 주구장창 하다 보니 이제 좀 이골이 난다. 피곤하기도 하고. 하얀 워드나 파워포인트 빈 화면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스트레스받는 순간. 아 이걸 또 수십 장을 만들어 채워야 하는구나. 는 일이 제일 무섭다.


기획을 그만둘 수 있는 기회는 꽤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있다. 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에 조금 소극적이기도 했고, 또 내가 이 일을 그만뒀을 때 내 주위에서 이 일을 맡아서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새로운 일에 대한 나의 소극적인 자세보다는, 이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없는지, 그리고 그런 일을 나는 어떻게 꾸역꾸역 하고 있는 지를 조금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론 보고자료를 만드는 일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보고자료를 하나 만드는 일은 보기에는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나름 종합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꽤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필요로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모두 숙련된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저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적당히 그럴듯해 보일 정도의 재능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까 특별히 못하는 과목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보고서를 만드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은 글쓰기 재능이다. 보고서는 결국 글쓰기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논술을 떠올리면 된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안건들에 대해서 매번 한 편의 논술을 쓰는 것이 바로 보고서를 쓰는 일이다. 배경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그리고 문제점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방안의 제시까지. 보고서는 한 편의 잘 쓰인 글과 같다.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그 뒤 고민하는 것이다. 잘 짜인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여기에 더해서 보고서 쓰기가 논술 쓰기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논술과는 달리 보고서는 대체로 특정 개인이나 소수의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뉘앙스, 글의 구조도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윗분들은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변덕이 심하고, 스스로 뱉은 말은 자주 어기시는 분들인 데다,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독자층의 심중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적당히 눈치껏 윗분들의 성향과 그때그때의 심리 상태를 유추하여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도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 중 하나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표현력이다. 사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적절한 비유를 들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보고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발생한 문제나 혹은 새로운 개념을 독자에게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비유를 드는 것은 보고서 초반에 문제를 정확히 공유하는데 중요하고, 뒤에 나올 주장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비유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본질, 혹은 핵심을 날카롭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이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는 대상으로 재빨리 치환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특정한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 즉 다시 말해 사전적 정의를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표현력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이쁘게 잘 나타내는 것이다. 많은 공대생들이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딱 봐도 이뻐 보이는 보고서를 따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잘 디자인된, 그러니까 외부 업체에 외주를 준 듯한 디자인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읽는 사람의 시선의 이동을 고려해 중요한 키워드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가,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이 적당히 강조가 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디자인 감각은 이런 시선의 이동, 키워드의 강조를 위해서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보고서를 분칠 한다는 식으로 폄훼하기도 하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은 도식화다. 플로우 차트나 표로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이는 엑셀에서 피벗 테이블을 떠올리면 쉽다. 어떤 값들로 이 상황을 분류하고 정리할 것인가. 그런 관점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면, 차트나 표는 생각보다 쉽게 그릴 수 있다. 그다음은 도식화. 추상적인 그림을 이용해서 어떤 개념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비유의 개념과 유사하다. 적절한 비유 대상을 찾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면 된다. 말로 쓰니 참 쉬워 보이지만 사실 제일 어려운 부분, 평소 웹 상에서 다양한 도식들을 보면서 감을 키우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다.


또 버릇처럼 길게 썼지만, 정리하면 좋은 보고서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쉽게 말해 문과적 감성과 이과적 감성, 그리고 미적 감각이 모두 필요하다. 이 세 가지를 뛰어나게 잘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두루 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중 하나라도 자신이 없다면 매일 앉아서 보고서나 쓰는 일은 고역이 된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기피하게 되는 것이고, 나처럼 어설프게 걸쳐 있는 사람들이 매일 스트레스받아가며 꾸역꾸역 보고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원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기획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글을 쓰는 것이 싫어지게 됐다.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도입부터 결론까지 짜임새 있게 짜인 글 말고, 그냥 순간순간 떠오르는 작은 생각들을 말하듯 편하게 글로 옮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런치를 하면서 점점 알게 모르게 매거진 형태의 기획성 글들에 대한 부담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글쓰기가 싫어서 글을 쓰는데, 결국 다시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이 들어서 또 주절주절 글을 써보았다. 그런데 또 글쓰기가 된 것 같다. 소설이라도 써야 하나.

매거진의 이전글 개복치 알러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