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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Apr 14. 2022

나는 부럽지가 않어

욕구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의 경우는 대체로 욕심이 없는 편이다. 그리고 설령 욕심이 생기더라도 욕구를 절제하고 참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성숙한 것이고 사회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항상 나의 욕구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에 민감하고, 되도록이면 손해를 보고 욕구를 참고 조절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여기서 그치면 좋을 것을, 되려 욕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들은 미성숙한 사람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틀린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 있다.


이런 성향은 어린 시절에 자라난 환경과도 관계가 깊다. 어릴 적 나는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컸는데, 그래서 제대로 된 과자 하나를 사 먹지 못했다. 눈치가 빨랐던 나는 무언가를 사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았다. 그리고 참을수록 부모님이 이런 나를 기특해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에는 늘 어린이 답지 않게 과자를 참아내고, 즐거운 장난감을 참아내고, 그럼으로써 지갑 사정이 힘든 부모님이 나를 대견해하는 기억들이 잔뜩 하다.


크면서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이때 생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물질적인 욕심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매우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살았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먼저 나서서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먹도록 기다렸고, 친구들이나 후배와 밥 값을 나눠 내야 할 때도 먼저 계산을 하거나 혹은 나눠서 내더라도 내가 항상 더 많은 몫을 내곤 했다. 정확하게 계산해서 내 몫을 챙기는 것처럼 나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고 성숙하지 않은 자세라고 생각했던 것이 컸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나와 반대로 계산 빠르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내 시각에서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저렇게까지 살면서 부자가 되고 싶나?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들은 설령 법을 어기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이를 먹고 부동산 광풍을 겪으면서 이런 시각은 점점 발전했다. 사람들의 주거의 안정성을 해치면서스스로의 부를 위해 여러 채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투자하는 행동이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세입자들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전세금을 올린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돈에도 일종의 도덕이 있다고 여긴 셈이다. 직장생활이든 뭐든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은 정직한 돈이고, 이는 정당한 것이었다. 반면 열심히 일하지 않고, 그저 특정한 기회를 선점해서 버는 돈에 대해서는 부정한 돈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리고 타인의 불편을 빌미로 하여 내 배를 채우는 것은 더더욱이 불편한 일이었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돈을 바라보는 이 자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투자를 접하는 기회도 굉장히 늦었다. 그리고 지금도 썩 이런 것들이 사실 달갑지는 않다.


이렇게 돌아보면 나는 스스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서 자랐다. 그러면서 그런 나의 욕구 없음이 도덕적으로 보다 우월한 자세라는 스스로의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옳은 자세를 견지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욕심일 뿐이었다, 돈을 취하는 사람들의 욕심이나, 도덕적인 우월을 취하는 나의 욕심이나, 결국 그 본질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 사실 나는 욕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얼마나 욕심이 많았냐면, 세상에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돈을 버는 것으로는 성이 안차, 돈을 초월한, 돈보다 더 의미 있는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돈 따위는 부럽지가 않다고 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보다 더 남들의 부러움을 사고 싶은 욕심이 지배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한 생각인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니, 정말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지가 않은 셈이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욕심이 많다는 것을 마음 깊숙하게 받아들이면서 산다. 이기적인 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리고 그 이기심을 바탕으로 인간은 또 이런 문명을 이루었다. 그러니 인간의 욕심 자체를 마냥 나쁘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욕심을 인정하고 나니, 내가 가지고 있는 물욕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지하게 된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오늘도 로또가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잠이 든다. 로또가 되면 사고 싶은 물건들이 두루마리 휴지 한 롤을 다 채울 만큼 많다. 부럽지가 않다고 했던 나의 과거를 모두 지우고 싶을 만큼 부럽다.


그럼 그 욕심을 위해서 살 것인가?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미 이렇게 커버린 에게 물욕 름진 양대창이라고 하자. 매일 기름진 양대창을 먹거나, 늘 양대창 생각을 하면서 세끼를 먹으면 건강을 해친다. 세상에는 건강하고 심지어 알고 보면 맛도 좋은 들밥 같은 음식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양대창을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속일 필요는 없다. 들밥만으로는 인생이 조금 심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다 혹시나 양대창을 먹게 되었을 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나의 식습관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들밥을 주식으로 하되, 가끔 양대창을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게 뭔 소리야)


훈훈한 마무리를 하기 위해 뭐라도 써보자.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을 한 꺼풀 벗어내는 기분이다. 나에겐 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또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의 편을 나누고 내 나름의 좋고 싫음을 투영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도 끝내 벗기지 못하는 편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 모든 일들은 좋고 싫음이 없다. 이 말은 이해가 되지만, 매 순간 그때의 상황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당장 꼴도 보기 싫은 몇몇 정치인들에게도 좋고 싫음이 없다는 말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기분이다. 훈훈하게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됐다. 무의식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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