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왜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어떡합니까.
사람의 사고방식은 무의식적인 습관에 의한 조건 반사적인 부분이라, 나의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넌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라는 말은, 넌 왜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성장배경을 거쳤고, 그런 사건들을 겪었는데, 왜 그때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서,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를 만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니?라는 질문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다. 나의 의지와 별개로 어릴 때부터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고, 당연히 이런 나를 낳은 부모님도 예민한 성격을 가지셨다. 그리고 좀 엄한 가풍에서 자랐고, 과도한 감수성을 발휘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을 저버리는, 획일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랐다. 나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집단에 의해서 늘 침범당했고, 나의 감수성은 나를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늘 외로웠고, 분노했다. 더 힘든 것은 이것이 마치 나의 잘못인 것처럼 여겨졌던 과거의 시간들이었다.
나는 뛰어난 재능에 비해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늘 듣고 살았다. 직장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 근면성실의 사회에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이고, 거기에 재능이 있음은 가중 처벌의 대상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게으르고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다. 그런 꼬리표를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받고 산다. 쟤는 대하기 힘든 사람이야. 말 한마디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 조금만 수가 틀리면 화를 엄청 내. 똑똑한 것 같은데 노력은 안 해. 성실하지 않아서 좋은 평가를 줄 수가 없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태어나고 이렇게 자란 것을.
나는 임원이나 팀장이 나의 모니터를 훤히 들여다보는 가운데서 일하는 것이 불편하다. 하지만 안다. 직장이라는 현실에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돈을 받으니까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그 순간이 괴로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도 간절하다. 나의 기준에서 사회는 수시로 개인의 자유를 침범한다. 나는 이를 폭력으로 느끼고, 당연히 이는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야 직장인이 월급 받고 일하는데 모니터 까고 해야지. 그래 맞다. 그런데 그런 법이 있나? 다 사회적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닌가?
나는 앉아서 가만히 공부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머릿속은 끓임 없는 생각들로 넘쳐나고, 생각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표류하면서 나만의 세상에서 생각을 이어나가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은 그런 나의 생각에 큰 영감을 준다. 잘 정제된 시인의 한 줄은 이런 생각들의 쉼터이고 이정표가 된다. 이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교과서의 지식을 암기하고, 기성세대가 정해둔 정답을 그저 학습하기만 하는 것이 나에겐 그렇게 괴로운 일일수가 없다. 그러나 학창 시절 이런 나의 태도는 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평생 실패한 재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나의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나 자신을 바꾸려고 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다. 그러니 남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나는 나를 가장 사랑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끔 '너는 왜 꼭 그래? 너는 왜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걸 어떡해? 나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세상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같은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가 순댓국 한 그릇처럼 간절하게 떠오른다.
타고난 이야기를 하니 키와 발 사이즈를 빼놓을 수가 없다. 180 후반의 키와 290의 발 사이즈를 타고 태어났다. 나와 비슷한 신체 사이즈를 가진 사람들이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바지는 늘 짧고, 신발은 마땅한 게 없다. 만약 내 키나 발 사이즈가 농구나 배구 선수들처럼 아예 더 컸다면, 차라리 맞춤으로 구입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5cm의 차이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뭔가 딱 맞지 않은 불편한 삶을 산다. 의자는 늘 낮아서 허리가 흘러내리고, 설거지할 때마다 아픈 허리를 견뎌야 한다. 불편하되, 그걸 해결할 만큼의 큰 차이가 아닌 5cm 정도. 그러니 늘 불평을 달고 산다.
나의 마음도 그런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해있는 범주보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그리고 딱 그만큼 불편하다. 언뜻 보기에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발 사이즈가 5cm 정도 큰 것처럼 불편한 부분들이 있다. 기성 제품이야 경제의 논리, 그러니까 규모의 경제에 의한 대량 생산체제와 수요와 공급의 원리의 결과라서 그러려니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까지 그런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닌가 싶다. 왜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가끔은 너무 외롭고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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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는 별 것 아닌 한 마디 한 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브런치에 이런저런 생각을 잔뜩 쏟아내고 말았다. 정제되지 않은 내용이라, 불과 몇 분이 지나면 이런 나의 모습을 후회, 또는 동정이라는 이중적인 잣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습도 분명 나의 일부이기에 오늘은 그냥 이런 나의 속마음을 모두 글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든다. 마치 싸이월드에 한 여가수가 나는 오늘도 눈물을 흘린다는 프로필 메시지를 걸어둔 것처럼 말이다. 뭐가 되었든 이 글은 누군가를 향해 쓰는 글이 아니라 나를 향해 쓰는 글이다.
우리 모두는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이런저런 잣대로 편의에 따라 평균 혹은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는 그룹으로 나눌 수는 있겠으나, 그 이전에 우리 모두는 다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가 생존, 혹은 공동체적인 이유로 모여 살면서, 서로의 다름이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름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 다르다고 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름이 틀림이 아닌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묵언을 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이 말은 단순히 말을 삼가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그것이 좋고, 나쁘고, 맞고, 틀리고, 이해를 하고, 하지 않고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 분별하는 마음을 내었다고 한다. 말을 많이 하더라도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세상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그 말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조리함의 피해자가 또 다른 부조리함의 가해자가 되듯, 나 역시도 그런 분별심의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곤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래. 맞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나부터 상대방에게 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나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상대방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것은, 그 자체가 타인에게 넌 왜 꼭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인연 과보의 흐름에서 산다. 내가 그러하듯, 그들은 또 어떤 부분에서 5cm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니 나의 외로움과 상처 입는 마음은 내가 타인의 외로움과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럴 수 있어. 그랬구나.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힘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