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스쳐간 자리에, 숨이 피었다
그날은 이상할 만큼 모든 게 좋았다.
1년 만에 마신 디카페인 커피의 향,
커다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남김없이 삼킨 달콤함.
건물 안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던 내가
그날은 친구와 몇 시간이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탁 트인 전경 속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집에 돌아와 아이와 장을 보고,
좋아하던 반찬을 잔뜩 만들어 먹으며 저녁을 보냈다.
정말 오랜만에 —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녁이 끝나갈 무렵,
예고 없이 공황의 파도가 밀려왔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왔다.
눈을 감아도 더 짙어지는 어둠이,
그 안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끝이 떨리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그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괜찮다.”를 수십 번 되뇌었다.
그러나 —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파자마 차림, 겉옷 하나 없이.
밤공기가 살을 베듯 차가웠고,
사람들의 시선이 등을 찔렀다.
뒤이어 남편이 겉옷을 들고 따라 나왔다.
“왜 그래, 답답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께를 움켜쥔 채 짧은 숨만 내쉬었다.
그는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두드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를 보더니,
손을 잡고 천천히 산책로로 이끌었다.
손의 온기, 다정한 말 한마디.
그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자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씩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주머니 속엔 긴급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화면을 닫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몇 달 만에 찾아온 온전한 행복이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걸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고 했는데,
이 녀석은 또 내 발목을 잡는다.
내 안의 그림자.
그놈은 내가 숨을 틔우는 날만 골라 찾아온다.
죽음은 24시간 곁에 있다.
기다리는 죽음일 수도 있고,
찰나의 죽음일 수도 있다.
나는 오늘의 죽음을 벗어났다.
그리고 내일의 죽음을 기다린다.
오늘을 살아냈고,
내일을 버텨낸다.
나의 등 뒤에, 발끝 아래에,
혹은 주머니 속에도 그것은 있다.
언젠가는 분명히 마주하게 될—
영원이란 없는 또 다른 나와.
그렇다고 그 기다림만으로 하루를 견디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지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며,
키보드 앞에 다시 앉았다.
오늘을 살아낸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천천히, 조용히, 감정을 글자로 옮겼다.
하루를 버텨낸 나를 위해,
또 내일을 버텨야 할 나에게 말을 건네듯—
조용히 글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요.
1분 1초를, 소중하게요.”
그 말에,
산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원을 품은 눈빛 속에
아주 미세한 흔들림이 스쳤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 말대로예요.
인간은 약해요.
오늘 함께 웃던 사람이
내일이면 사라질 수도 있죠.”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의 떨림은 오랜 세월 고여 있던
신령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며 살진 않아요.”
그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짧은 생을 가진 존재만이 내쉴 수 있는,
나약히 흔들리지만 동시에 뜨거운 숨.
“우리는 남은 생을 태우며 살아요.
사랑하고, 웃고, 기억하고…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가죠.”
바람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신령의 눈동자 속으로
낯선 온기가 깊숙이 번져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저를…
그대로 받아주세요.”
그는 조심스레 시선을 들었다.
“영원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제 생이 끝날 때까지
당신 곁에 머물 수 있게만 해주세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담담함 안에 모든 간절함이 고여 있었다.
“그러니까…
저를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말끝이 낮게 떨렸다.
그 떨림이 공기를 타고
신령의 가슴께로 닿았다.
영원을 가진 존재는
처음으로—
유한한 생이 품은, 그 무한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