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 마니아들의 성지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오컬트(Occult)는 “물질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숨겨진 지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주로 미스터리나 심령 체험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많이 쓰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에스토니아는 오컬트의 나라다. 탈린의 형이상학 학회부터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모습을 드러낸다는 합살루의 화이트 레이디(White Lady)까지 오컬트 마니아들이 가볼 만한 곳이 많다.
이는 에스토니아에 암흑의 시대로 불리는 중세시대 유적이 유난히 많고 잘 보존되어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스토니아는 오싹한 특유의 분위기로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전 유럽의 오컬트 마니아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탈린 올드타운 외곽에는 덴마크 왕의 정원(Danish King’s Garden)이 있다. 덴마크 왕이 이끄는 함대와 탈린 토착민들이 전투를 벌이던 중 하늘에서 덴마크 국기(Dannesbrog)가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6월 15일이면 에스토니아의 수도 한복판에 있는 이곳에서 덴마크 국기가 게양된다고 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
이 정원에는 해리포터에 등장했던 ‘죽음을 먹는 자’를 꼭 빼닮은 거대한 동상들이 서있다. 가까이서 보면 얼굴 한가운데가 뻥 뚫려있어 공포감을 주는 이 동상은 덴마크 왕의 정원에 오싹함을 더해준다.
덴마크 왕의 정원을 따라 나있는 중세풍 성벽 위를 걷다 보면 기이한 방이 하나 나온다. 이 방은 온통 공포스러운 사진들과 함께 ‘탈린 형이상학 학회’의 활동에 대한 소개로 가득하다. 이 협회에서는 유럽 전역의 초자연적 현상과 심령현상을 연구해왔다고 한다.
덴마크 왕의 정원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계단을 따라 나있는 길에는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럽게 생긴 집이 한 채 있다. 외관과는 다르게 이 집에는 섬뜩한 소문이 돌고 있다. 이곳의 2층 맨 오른쪽 창문에서는 요즘도 귀신이 목격된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귀신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의 스산한 분위기는 한겨울 에스토니아의 날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수도 탈린에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합살루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로마시대부터 명망 있었던 주교가 통치했다는 이 역사 깊은 도시에는 웅장한 합살루 성(Haapsalu Castle)이 있다. 합살루 성에는 커다란 성당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얽힌 오싹하면서도 슬픈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이야기는 14세기 중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합살루를 통치하던 영주는 가톨릭의 전통에 따라 합살루 성을 원칙적으로 남자 사제들만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여자를 들이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성안에 살던 어느 사제는 성 밖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치게 된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그 둘은 그 이후로도 몰래 만남을 이어갔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었던 그 둘은 합살루 성으로 함께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규칙상 여자는 성안에 들어올 수 없었기에 여자는 남장을 하고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신의 권력이 막강했던 중세시대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관습도 그 둘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성안에서 함께 살며 몰래 만남을 이어가던 두 남녀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영주가 그 둘의 사이와 여자의 성별을 의심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결국 정체가 탄로 난 여자는 형벌로 당시 짓고 있던 합살루 성의 성벽 사이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매일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빵과 물을 공급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여자를 성안에 끌어들인 사제 또한 잔혹한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합살루 성 안의 지하감옥에 갇혀 굶어 죽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매일 서로를 그리워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모두가 잠든 밤 그들의 비명소리가 성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합살루 성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나는 마지막으로 여자의 원혼(White lady)이 나온다는 성안에 있는 교회 스테인글라스 앞으로 향했다. 전혀 오싹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시대를 잘못 만난 안타까운 두 사람의 사랑이 죽어서라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그날 밤 나는 교회 스테인글라스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어느 여자의 원혼을 본 것 같다. 하지만 그 모습은 결코 분노에 찬 원혼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어느 순수한 여자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