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탈린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탈린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올드타운(Old Town) 숙소로 향하는 길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시애틀이나 포틀랜드 같은 미국 서부도시의 다운타운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쇼핑몰과 극장들 그리고 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가족들을 만나러 미국 시애틀을 방문한 건지 유럽으로 여행을 온 건지 분간할 방법이 없었다.
이 곳이 북유럽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식은 한산한 거리 풍경뿐이었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과 코로나 팬더믹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이나라는 인구 140만의 작은 나라답게 거리에 정말 사람이 없다. 그런데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고 있던 어느 순간부터 익숙한 풍경이 사라지고 낯선 거리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중세풍 성벽과 돌길을 따라 솟은 오래된 건물들은 은은한 가로등 빛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느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현대 미국에서 중세 유럽으로 타임슬립을 하듯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어버렸다. 드디어 도착한 우리의 첫 숙소는 중세 유럽의 감성과 북유럽의 한산함을 간직한 어느 작은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에 붙어있는 앤틱(Antik)이라는 간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숙소였다. 탈린의 첫인상은 이처럼 익숙함과 신선함이 교차하는 그 중간의 어디쯤이었다. 가장 중세스러우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도시. 우리는 앞으로 세 달간 우리가 지내게 될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덴마크, 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으로는 핀란드, 남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발트해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와 수도 탈린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화상 회의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스카이프(skype)를 만들어낸 나라이자 디지털 노매드들을 위한 비자와 e-영주권(e-residency)으로 유명한 나라. 그만큼 혁신적인 정책들을 많이 펼치는 나라이자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 초반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건과 도시의 의외의 모습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낡은 지식과 고정관념을 깨고 여행지의 실제 모습과 마주하게 될 여정에 대한 기대와 설렘 속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나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