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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바트로스 Feb 12. 2021

역사,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

역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슨 느낌이 들까? 세계사 덕후였던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시간이라는 직선 위에 순서대로 나열된 복잡하면서도 장대한 사건들의 흐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러한 역사에 대한 나의 인식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바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피엔스라는 책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수만 년 전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가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인지 혁명을 겪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공의 실체를 집단으로 믿는 능력(집단 상상력이라고 해두자)을 획득하게 된 것이 단연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한다. 


회사생활에 찌들어있던 2018년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재미있는 게임에 빠져든 것처럼 주말 내내 집에 처박혀서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돈, 종교, 법률, 사회, 정치, 경제, 주식회사...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이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인류는 연금술사였고 마법사였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고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1년 나는 또 한 번 내 역사에 대한 관점을 흔들어줄 책을 만나게 된다. 바로 채사장 작가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었다. 유발 하라리의 말이 연금술이나 마법 같았다면 그의 말은 지나치게 가벼워 보였다. 처음에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예시들과 너무 간단명료한 전개 방식에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역사는 누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느냐로 설명된다.'는 그의 명료한 주장은(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것은 칼 마르크스의 주장이기도 했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모순적인 상황들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책의 간단한 예시를 살펴보자. 여기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 원시 공산사회에 살던 그 둘은 열심히 협력해서 매머드를 사냥했다. A가 매머드를 절벽으로 유인하면 B가 매머드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 그 둘은 매머드를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다. 그 둘은 평등했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B가 우연한 계기로 씨앗을 심으면 곡물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B는 A 몰래 곡식을 동굴에 쌓아둔다. 생산수단과 잉여생산물이 생긴 것이다. 순진한 A는 다시 B와 함께 사냥을 나가려 하지만 더 이상 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B가 토지와 씨앗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B는 A에게 아무렇지 않게 일을 시킨다. B는 A에게 토지를 제공해준 대가로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의 일부만 A에게 떼어주고 생산물의 대부분을 가져간다. A는 일을 하고 B는 A가 생산한 곡물을 먹으며 편하게 지낸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B는 왕이 되었고 A는 노예가 되었다. 이 것이 고대 노예제 사회와 중세 봉건사회의 핵심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A가 무슨 재주넘는 곰도 아니고 바보도 아닐 텐데 어느 세부턴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A는 B를 위해 일을 하면서도 B보다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종교가 등장한다. 즉 A는 일을 하고 B는 놀고먹는 게 신의 뜻이라는(혹은 B 자신이 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B의 주장이 A에게 먹혀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A와 B의 관계의 본질은 근대와 현대가 되도록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산업혁명을 지나고 공급이 수요보다 항상 많은 '과잉공급'의 시대가 되어서도 그 둘의 계급은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잉생산'된 물건을 팔아치울 목적으로 식민지 개척과 전쟁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결국은 '생산수단'소유권에 대한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누가 봐도 지나친 일반화와 단순화의 오류겠지만 결국 까놓고 말해서 인간은 수천 년 전부터 그냥 누가 더 많이 가지고 배부르게 먹느냐를 가지고 싸워왔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생산수단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들과 종교와 정치라는 거짓말들이 이보다 더 가볍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인간의 심오한 본성에 대해 고민하던 위대한 철학자들과 자연의 법칙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과학자들 그리고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 본질적으로 바뀐 게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처럼 유치하고 얕은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찰리 채플린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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