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비움, 왕경을 걷다"

[랜드마크 02] 왕경

by Harry Yang

신라의 왕경

“신라 전성기에는 서울에 17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 … 제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닿아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진한조(辰韓條))


신라의 서울, 즉 서라벌, 지금의 경주의 중심부는 왕경지구이다. 왕경(王京)이란 왕과 왕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왕궁을 의미하는데,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그리고 월성의 동편에 조성된 동궁과 월지가 해당이 된다. 그러나, 보통은 월성 앞의 첨성대와 그 인근에 있었던 주택가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아마 경주의 구도심 전반과 그 너머까지를 포함하는 경주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일 수도 있겠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규모를 약 18만 호라고 말하는데, 계산하기 나름이지만 현재의 경주 인구가 25만 명 수준이니 고대 신라의 왕경이 훨씬 규모가 컸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게다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를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데 총 39개소에 이른다. 소위 ‘금칠한 대저택’을 말하는데 유력한 집안들이 저마다 부와 권력을 과시하며 겉으로도 금칠을 했다고 할 만한 대단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월성의 앞, 월성 뒤편과 남산 사이, 낭산 인근, 그리고 북천과 서천의 언덕 등 조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네스코는 경주에 4개의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을 지정해 놓았다. ‘불국사-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양동마을’, ‘옥산서원’인데, 경주역사유적지구는 대릉원 등의 시내 고분군, 경주 남산, 월성과 첨성대 일대,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 등을 포함한다. 대부분 평지이고, 구도심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도보로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전체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구역을 나누어서 두어 번에 걸쳐 여유 있게 다니는 편을 권한다. 앞으로 조금 더 편리한 교통수단(트램, 자율주행차 등)이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


월성

왕경의 중심부는 뭐니 뭐니 해도 월성(月城)이다. 우리는 어릴 때 반월성(半月城)이라고 했다. 반달 형태라서 그렇게 불렸다. 월성은 신라 초기부터 등장한다. 초창기 왕궁은 금성(金城)이라 부르면서 아마도 남산의 서쪽, 창림사지 인근이 아니었을까 추정하는데, 이 시기 월성에는 유력가의 집이 있었다. 석탈해가 꾀를 부려 그 집을 빼앗았다고 나오는데, 그가 신라 4대 왕이 되고, 그 이후로 점차 월성은 왕궁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월성의 내부는 공원처럼 되어 있어서 천천히 걸으며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동궁이 있는 동쪽 입구로 올라오면 대부분이 발굴 중인 공간인데, 거기서 왼편 능선을 따라 걸으면 꽤 운치 있는 산책길이 된다. 바깥으로는 동궁,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는데, 안쪽은 사람들이 자주 오지 않아 매우 고요한 숲이다. 나뭇잎이 많이 떨어진 겨울에 오히려 그곳은 바람도 없고, 조용하고, 낙엽소리만 나는 아늑한 공간이 된다. 월성의 정문은 첨성대에서 계림숲을 오른편으로 두고 쭉 걸어 들어오면 된다. 최근에 복원된 해자가 월성 전반의 느낌을 매우 산뜻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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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에서 내려다 본 경주 전경

월성의 성벽 위쪽에 오르면 경주 전역, 혹은 왕경 전반이 보이는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나와 함께 그곳에 올랐던 이들은 너나없이 경주에서 가장 멋진 뷰 포인트라고들 했다. 월성의 전면부에는 대저택인지, 관청인지 모를 대형 건축물의 주춧돌이 여럿 보인다. 고분도 몇 기가 흩어져 있다. 계림숲도 내려다 보이는데,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숲이다.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니, 신라 초기부터 역사를 다 지켜본 곳이다. 숲을 채우고 있는 노목들의 위용은 낮에도 좋지만, 나는 주로 저녁에 조명과 더불어 음미하곤 한다. 2000 년을 넘긴 숲은 절로 삶의 유한성을 일깨우는 장소다.

첨성대는 누가 뭐래도 경주의 랜드마크다. 일단 이곳은 한번 보고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다들 와서 보고는 “첨성대가 원래 이렇게 작았나?”라고 한 마디 한다. 아무렴 세월이 지나서 쪼그라들었을까? 어릴 적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다녀간 이들은 다시 찾은 경주의 유적들이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확인한다. 그렇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우리보다 다 컸다. 청소년 시절에는 관광버스에 실려 자다 깨다 경주를 둘러보았을 테니, 그 인상만 스쳤을 뿐 사실관계는 기억의 왜곡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 수학여행 온 교복 입은 까까머리들이 첨성대에 새까맣게 매달려 찍은 사진을 보며 많이 웃는다. 그런 시절을 다 지내며 첨성대는 여전히 건재하다.


첨성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천문관측대로 알려져 있다가, 실제 활용 방법이 묘연해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제기되었었다. 최근 들어 다시 중론은 천문관측시설로 모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첨성대 건축 이후 신라에서 천문 관련 기록이 증가하고 있고, 그 내용도 첨성대의 위치에서 관측했을 법한 내용이란 것이다. 첨성대는 선덕여왕 2년(633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어서 그 시기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다. 외국인들 눈에는 코카콜라 병을 닮은 첨성대의 유려한 곡선미가 눈에 바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고분을 비롯해서 경주를 전반적으로 규정하는 선의 미감에 대해 규명해 볼 필요가 있겠다.


교촌

월성 바로 인근이라 찾는 이들이 많은데, 이곳은 신라와 그 이후의 역사가 혼재된 장소다. 우선 교촌이란, ‘향교(鄕校)가 있는 동네’를 일컫는다. 교촌(校村), 교리(校里), 교동(校洞) 등이 다 유래가 같다. 현재 향교가 있는 자리는 신라 시대에 국학(國學)이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어서 원래부터 유학 교육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사마소(司馬所)라고 해서 진사시험을 통과한 이들만 출입이 허용되는 공간도 있었다. 이 일대가 경주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유학 교육과 관련된 곳임을 짐작하게 한다. 경주 향교는 경상도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향교는 서당교육을 마친 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립교육기관이었다. 사립교육기관으로는 서원(書院)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위로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국립 기관으로 성균관이 있다.


지방에서 향교와 서원은 교육 기능 외에 유교 역사의 주요 인물들을 배향하고 제례를 올리는 기능을 중요하게 수행했다. 서원이 보통 특정한 소수의 인물을 배향했다면, 향교는 주요한 인물 모두를 모시는 공간이어서 지역의 선비와 유림 사회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지금도 경주 지역 유림들이 향교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역할을 한다. 향교에 배향된 인물들은 공자, 맹자, 주자 등 중국의 인물들 외에 동국 18현(東國18賢)으로 불리는 한국의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 경주 출신으로는 설총, 최치원과 회재 이언적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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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집의 육훈과 손님 접대를 위해 만든 쌀통

향교 옆에는 유명한 최부자집이 있다. 12대 만석꾼으로 불리며 400년간 경주 일대에서 거대한 부를 이룬 집안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로 존경받고 있다. 특히 마지막 최부자로 불리는 최준 선생은 20세기 전반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열과 성을 다해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는데, 그 결과 일제의 탄압 와중에 형제도 잃고, 집안이 기우는 결과를 겪어야 했다. 최근 최부자집에서 소장하던 문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됨으로써 이 집안과 관련한 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 기대된다. 최부자집을 둘러보면 한국 근현대사 전반을 새롭게 돌아볼 기회가 된다.

KakaoTalk_20250107_154219069_25.jpg 월정교

교촌 앞을 흐르는 남천 위로 신라시대의 다리 월정교가 복원되어서 교촌에서 남산 쪽으로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월정교는 정확한 위치 외에는 건축적 고증이 쉽지 않았으나, 현재는 밤낮으로 관광객이 몰리는 핫 플레이스로 유명하다. 교촌 마을에서는 고즈넉한 한옥스테이를 할 수도 있고, 한옥이 아름다운 요석궁에서 파인다이닝 한정식을 맛볼 수도 있다.


동궁과 월지

이곳은 통일신라 이후 오랜동안 방치된 공간이 되면서 조선시대 이래로 ‘기러기와 오리가 노는 연못’이란 뜻의 안압지(雁鴨池)로 알려졌었다. 못을 발굴하면서 엄청난 유물이 나왔고, 인근 지역에 궁터가 넓게 분포되어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태자가 거했던 동쪽 궁전으로 알려졌고, 연못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달이 아름다운 연못’이라 불렸음이 확인되어 명칭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로 정리되었다. 야경으로 너무 유명한 곳이라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조명 연출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달과 연못이 어우러지는 곳인 만큼 그런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IMG_5494.JPG 동궁과 월지 야경

1974년 월지 발굴에서 나온 15,000여 점의 유물은 경주 박물관이 전시동 하나를 통째로 ‘월지관’으로 조성해 그 규모와 내용의 독특함을 잘 살려 놓고 있다. 연못에 빠뜨린 생활유물들이 상당히 많다. 연못 가운데 꾸며놓은 인공섬에서 진기한 동물들을 키우며, 종종 배를 띄워 놀았던 것으로 보이고, 주변 누각에서는 연못을 조망하며 연회를 열었던 것 같다. '주령구(酒令具)'라고 해서 술 마시며 벌칙을 주는 14면체 주사위 모양의 놀이 기구가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국보급인 진품은 보존작업 과정에 파손되어 현재는 재현품만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상아로 만든 더 오래된 육면체 주사위도 나왔다.

주령구 (재현품, 경주박물관 월지관)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유물이나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라사회는 상당 기간 풍요로운 시절을 향유한 것으로 보인다. 금입택이나 동궁과 월지는 그런 삶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온통 황금으로 치장한 장신구와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서역의 고급취향 물품들이 유통되던 시대였다. 과연 신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분황사와 황룡사지

신라시대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라면 황룡사(皇龍寺)를 꼽아야 할 것이다. 진흥왕 14년(553년) 원래 왕궁을 짓던 중에 그곳에 황룡이 나타나면서, 불교사찰을 짓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신라에 용(龍)이 등장했다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그 시절에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진흥왕 30년(569년) 17년 만에 황룡사가 완성되었는데, 그는 고승들을 모신 백고좌 법회를 열고, 팔관회를 개최하고, 5년 후(574년)에 금당 안에 장육존상이란 거대한 불상을 주조하는 등 황룡사를 왕실의 사찰이자 국가의 중심으로 모자람 없이 조성하였다. 금당 벽에는 유명한 화가 솔거가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법사는 선덕여왕 12년(643년)에 호국탑을 세우도록 요청했는데, 이것이 황룡사 9층 목탑이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건축하였고, 225척(약 70m 높이로 추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9개 층은 일본(日本),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鷹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濊貊)의 인근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탑의 영험함에 힘입어 이들 나라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잦은 군사적 충돌이 있었던 고구려나 백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당시에도 삼국 간에는 민족적 이질감보다는 정서적 동질감이 더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IMG_8300.JPG 황룡사 금당지 장육존상 초석

지금 황룡사는 초석만 남아 있는 거대한 폐사지(廢寺址)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유적이 없는데도 빈 공간이 주는 광대한 풍광이 압도감이 있다. 특히 해 질 녘의 일몰은 아마도 경주에서 첫손가락에 꼽힐만한 장관이며, 어두워진 이후 황룡사지는 푸르스름한 밤공기에 휩싸이는 신비스러운 공간이기도 하다. 명상이나, 수련을 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산책으로 다녀가는 이들도 특별한 활력을 얻어간다. 인근의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전시와 휴식을 위해 매우 잘 꾸며진 공간이다. 지식과 정보는 그곳에서 충분히 채울 수 있지만, 이 모순적인 ‘광활한 빈 공간감’은 오로지 장육존상과 9층 목탑의 초석이 있는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황룡사 인근의 시설 정비가 이 황룡사지 고유의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황사는 국보인 모전석탑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경주에서 원효(元曉)와의 연관을 찾아보려면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원효성지’로 알려진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세워졌는데, 황룡사 바로 인근이란 위치와 ‘향기로운(芬)(皇)의 절’이란 이름으로 보아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는 사찰로 상당한 규모였던 곳으로 추측된다. 원효는 분황사에 주로 거하면서 그의 주요 저작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가 세상을 뜬 후에는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골에 진흙은 넣은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분황사에 모셔두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고려 숙종 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칭호가 내리고,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세워졌는데, 어느 시점에 파손되어 후대에 추사 김정희가 ‘분황사에 비가 있었다’는 기록만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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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의 모전석탑(좌), 비석은 없고 좌대만 남은 화쟁국사비(우)

원효에 대해서는 의상(義湘)과 함께 중국 유학을 떠나려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신라에 남았다는 이야기, 요석공주에게서 설총을 낳고 파계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당대의 대중들에게 깊이 파고들어 불교를 전한 공이 크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 또한, 그의 저술과 불교 사상은 당대에 중국, 일본, 인도 등 동아시아 전역을 영향권에 두었고, 지금도 그의 사상은 끊임없이 논의될 정도로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분황사에 들르면, 꼭 신라사람 원효를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그 시절에 이미 경계를 넘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상상하며 경주 여행을 한 차원 더 의미 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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