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03] 석굴암과 불국사
불국사와 석굴암은 관광도시 경주를 대표하는 부동의 지위를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다. 한 해에 관광객이 얼마나 경주를 찾는지 카운트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지표가 석굴암과 불국사의 입장객 수였다. 지금은 두 곳 모두 무료입장으로 바뀌었고, 방문자의 숫자도 입장객이 아니라 내비게이션 검색 규모나 이동전화 기지국에 잡힌 숫자로 추산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되었는데, 2024년 기준 불국사가 2,230,856 명(내국인 1,924,022명, 외국인 306,834명)으로 1위였고, 대릉원이 2,215,627명, 동궁과 월지 1,584,834명, 경주월드 1,045,905명이고, 석굴암이 1,025,449명으로 5위였다.
단순히 숫자상으로만 대표가 아니고, 불국사와 석굴암은 일제강점기에 경주를 본격적인 관광도시로 개발하는데 핵심적 원인제공자이기도 하다. 1907년에 토함산 정상 부근에서 석굴사원이 무너진 채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일제는 자세히 조사에 나섰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1909년 당시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다녀가기도 했다. 1912년에는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경주를 방문해서 발굴과 보존 작업을 독려했는데, 석굴암 벽에 불이법문(不二法門)이란 글씨를 새기고 갔다. 석굴암은 1913년-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 3차에 걸쳐 보수공사를 했고, 불국사도 1918년-1925년 사이에 보수했다. 192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경주 수학여행은 일차적으로는 석굴암의 명성과 불국사에 힘입은 바 크고, 바로 이어진 신라 금관의 등장(1921년 금관총,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이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된 경주 관광개발 계획에 따라 1969년-1973년에 불국사의 중수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상태로 정비가 되었다. 그리고 1973년부터 대릉원 내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이 이루어져 또다시 신라 금관 2개가 세상에 나왔다. 경주는 한국의 대표 관광도시로 자리매김되었는데, 수학여행과 일본인 관광객들을 대거 유치하는 등 1970년-1980년대 고도성장 시기의 전형적인 관광 모델이 주도적이었다. 이것이 다시 한번 재정비되는 계기는 1995년 유네스코가 경주의 석굴암과 불국사를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으로 지정한 일이었다. 그 이후 경주는 총 4개소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경주를 ‘관광산업적 이익’ 차원이 아니라 ‘역사문화적 가치’로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여러 영역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제대로 물어야 할 질문은 “왜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적 차원에서 중요성을 갖는가?”이다. 우리가 불국사를 방문하고, 석굴암을 관람할 때, 우리는 그런 차원의 미감과 감동을 느끼는가? 내가 안내했던 한국을 오랫동안 알아왔던 한 미국인 부부는 “한국에서 역사적 유적을 찾아가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것이 왜 대단한 성취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불국사의 구석구석을 함께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동안 듣지 못했던 내용을 많이 들었고, 비로소 이것이 어떤 맥락인지를 알게 되었다며 감탄을 하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과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런 논의가 놓여있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을 끌어내어 대화의 내용으로 삼는 작업이 여전히 부족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불국사는 엄청난 야심이 들어있는 기획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 10년(751년)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헌이지만 불국사의 내력을 자세히 기술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법흥왕 15년(528년) 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에 의해 설립되었고,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비로자나불,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 문무왕 10년(670년)에 무설전을 지었다고 한다. 김대성의 시절에 비로소 청운교와 백운교,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그 당시의 규모가 현재보다 8배는 더 큰 2천 칸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왕실의 후원 아래 긴 세월에 걸쳐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왕실과 깊은 연관을 갖고, 유력한 이들이 대를 이어가며 건축에 참여하였던 불국사는 그 이름 자체가 불국정토(佛國淨土) 즉, 괴로움 가득한 중생들의 세상인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대응하여 ‘번뇌가 사라진 청정한 부처의 세계’를 의미한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부처의 나라’로 인식했고, 부단히 이를 추구했던 듯하다. 불교를 수용한 이래 왕들은 ‘왕즉불(王卽佛)’ 사상, 즉 왕이 곧 부처란 생각으로 내달렸는데, 진흥왕은 이상적 군주인 아쇼카 왕이나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의미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을 자처했고(중국의 양 무제, 백제 성왕 등 여러 왕들의 사례가 있다),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족’이라 하며 스스로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을 자처하고 아내를 마야부인이라 불렀다.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곧 석가모니가 되었을 것인데, 그는 딸만 낳았고 그중 하나가 선덕여왕 덕만이었다. 이 시기 신라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이 존재했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오기 전에도 부처들이 있었는데, 신라에 그들의 자취를 따라 7개의 유명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신라가 공식적 전래 이전부터 원래 불국토였다는 사상이 꽤 많이 유포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국사는 이런 맥락에서 형성된 염원을 구현하기 위해 신라의 최고의 권력과 예술적 역량이 총동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우리의 눈에 이런 성취가 어떻게 파악되고 평가될 것인지는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의 낡은 취향과 과잉된 종교적 상상의 흔적만 남은 것은 아닌가. 여전히 오늘날의 미감으로도 찬탄을 자아낼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는가를 되새겨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불국사를 어떤 식으로 새겨보아야 할 것인가?
첫째로 불국사 주차장에 내리면 걸어서 일주문을 통과하고, 왼편으로 연못을 보면서 해탈교를 건널 수 있다. 그러고 만나는 것이 사대천왕들이 야차들을 짓밟고 서서 사찰을 보호하는 천왕문을 통과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신라시대의 유물이 없다. 조선시대 혹은 현대의 기획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포인트는 중국이나 일본의 왕궁이나 사찰 구조와는 달리 한국에는 건물이나 전체 구조를 일직선상에 위치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단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이 입구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좌우 비례를 정확히 맞추는 인공적 구조라면, 우리나라의 궁과 사찰은 끊임없이 축을 흔들고, 어긋나게 하면서 하나의 시선 안으로 모든 구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건축물이 놓인 산과 언덕의 배치를 자연스레 살리며 곡선으로 배치하는 것이 상례에 해당한다.
둘째 포인트는 유명한 청운교와 백운교 앞이다. 불국사에는 국보가 총 7개 있다. 그중 처음 만나는 것이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그 옆의 계단인 연화교와 칠보교이다. 석조 계단이다. 이 계단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계단 앞에 소나무가 서있는 공터 공간이 원래 구품연지(九品蓮池)라 불린 연못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해두어야 한다. 계단 옆 배수구에서 흘러내린 물이 자갈에 부딪쳐 물보라를 이루고, 때로는 무지개를 만들고선 약 가로 40m, 세로 25m 크기의 연못으로 흘러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람들은 이 연못에 비친 불국사 건물을 보기도 했겠고, 아마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 ‘부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을 건너고, 구름 위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푸른 구름(靑雲橋)과 흰 구름(白雲橋) 위로 올라 자색의 문(紫霞門)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서 대웅전 앞마당에 펼쳐진 ‘부처의 나라’를 만날 수 있다.
계단은 석재로 만들어진 덕에 모진 전란을 견디고 1,300년의 세월을 살아남았다. 건축이나 조형적 측면에서 독특한 아치형 구조를 활용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만, 특히 주목을 하게 되는 것은 불국사가 지면에서 상당한 높이로 들려 올려진 구조이다 보니 그 아랫단을 구성하는 석조 기단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아랫단은 제각각 서로 다른 모양의 자연석을 쌓았고, 윗단은 정교하고 깔끔하게 다듬은 석재를 써서 구성했다. 흥미로운 점은 위아래단이 만나는 지점은 서로 맞물릴 수 있도록 돌을 깎아놓았는데, 이를 ‘그랭이 기법’이라고 한단다. 윗단으로 갈수록 석재는 마치 목재처럼 깎아서 쓰고 있다. 계단 양측의 누각 아랫단을 받치는 석재는 재료만 돌이지 활용한 방식은 마치 나무 같다. 신라인들이 화강암을 이렇게 날렵하게 다루는 방식은 놀랄 정도이다.
셋째 포인트는 대웅전 마당이다. 그 유명한 두 개의 탑, 다보탑과 석가탑이 여기에 마주 보고 서있다. 이 둘 역시 국보이다. 원래 석가모니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본딴 상을 만들지 말도록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은 것이 그의 진신사리와 이를 모신 탑이었다. 불교의 탑은 석가모니의 무덤이자 몸 자체였기에 초기 불교에는 탑이 신앙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는 대표적 상징물이었다. 이것이 기원 전후 무렵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불상을 모신 법당이 점차 사찰 구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보탑은 ‘다보’라는 부처(전불)가 ‘누가 <법화경>을 설법하면 내가 보석으로 치장된 탑을 나타나게 해 그를 찬양하겠다’고 석가모니의 등장을 예언했다는 내용에 의한 것이란 설명이 있다. 독특한 것은 탑의 모양인데, 이런 형태는 인도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한국 불교에서는 매우 드문 형태이다. 사각, 팔각, 원 등을 복합적으로 화려하게 쌓아 올린 양식인데, 이는 목조건축을 석재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석가탑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도입된 양식에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탑을 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중국은 집을 짓듯 벽돌을 쌓은 전탑 양식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화강암을 통째로 사용하여 삼층으로 만든 삼층석탑 양식이 두드러지게 발달한다. 석탑의 각 면에는 문을 새겨 넣기도 했는데, 점차 구체적 형상보다는 추상적 양상으로 발전했다. 초기 삼층석탑들(감은사지, 고선사지 등)이 매우 거대했던데 반해 점차 탑의 크기는 줄어들면서 비례와 균형감이 빼어난 형태가 나오게 되는데, 석가탑은 그런 발전과정에서 가장 단순화된 조형미와 탁월한 비례감각을 보여준다.
압권은 이 양극단의 조형감각을 대표하는 탑을 한 공간에 대칭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쌍탑을 금당 앞에 배치하면서 이렇게 상반되는 형식을 갖다 놓는 경우는 없다. 부조화 속에서 영구히 갈등하고 대립하며 상대를 깎아먹는 파열음이 나면 도대체 감당이 되겠는가? 한국의 미는 완벽한 대칭(symmetry)이 아니라 비대칭 속의 어울림(harmony in asymmetry)이다.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떻게 서로 투쟁하는 것이 화해를 이루는가? 두 탑의 대비는 ‘남성성 대 여성성’, ‘규범 대 개성’, ‘단순 대 복잡’, ‘구상 대 추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런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한 사찰의 핵심 공간에 이런 파격적 방식으로 불교적 이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 신라의 창의성이 도달한 궁극의 수준이 아닐까? 무난함이 미덕이 아니다. 상극과 상반이 어우러지는 세상이 곧 ‘부처의 나라’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벼락처럼 엄습한 통찰은 천 년을 너끈히 버틴 화강암 석탑에 아로새겨져 이를 간파한 사람들에게 전율을 선사한다.
이 마당에서는 국보가 하나 더 나왔다. 석가탑 보수 과정에서 나온 무구정광다라니경. ‘다라니’라는 주문을 적은 두루마리로, 폭은 6.6cm에 길이는 6m에 이른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석가탑이 만들어질 때 사리장엄으로 들어간 것이면 751년 이전의 것이겠지만, 이 문서는 11세기 고려시대에 석가탑을 수리할 때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논쟁은 다시 이어지고 있다.
넷째 포인트는 불국사의 법당과 회랑 등인데, 이들은 신라시대의 것이 아니다. 대웅전, 자하문, 무설전, 비로전 등이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복원한 것이다. 회랑 등 그 외는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에서 진짜 신라시대의 흔적을 보려면 목조건축물이 아니라 석조물들을 봐야 한다. 특히 석조 기단부의 세련된 조형미는 목조건축물들의 수준을 한참 능가한다.
스님들이 강론하고 공부하는 공간인 무설전(無說殿)은 그 명칭 자체가 울림이 크다. 어느 종교나 깊은 경지에 이르면 말에 의존하지 않는 깨우침의 세계를 일깨워준다. 많이 떠드는 것은 가르침의 진리값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무설전 뒤의 비로전에 있는 비로자나불과 대웅전 옆의 극락전에 있는 아미타여래상은 둘 다 1,300년 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불국사 내 법당 중에 가장 높은 위치는 비로전 옆의 관음전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대웅전 앞마당의 다보탑이 지붕들 위로 삐죽 솟아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내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불국사가 구현하고자 했던 ‘부처의 나라’를 나는 이런 방식으로 해석했다.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다. 이들의 ‘부처의 나라’는 왕을 부처의 수준으로 드높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던 통치이념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중생이 불성이 깃든 부처라는 ‘만인부처설’을 암시하는 것일까? 불국사는 매우 심오하고 복합적인, 그렇지만 과감하고 파격적인 불교사상의 총체를 담은 대단한 공간이라 생각한다. 허나 이는 왕족들에 의한, 왕족들을 위한 사찰로 운영되었던 내력에 비추어 볼 때, 경주 남산이 담아내는 민중적 열망과는 다른 방향을 향한 열망이었다고 본다. 나는 토함산에 투사된 신라의 불교적 이상은 반드시 경주 남산에 투사된 이상과 함께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이 이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1907년 한 우체부가 근처를 지나다가 무너진 상태의 석굴과 대불을 보았다는 내용이 경주지역 일본인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발견’되었다. (석굴암은 간간이 역사서에도 등장했고, 경주지역민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종종 공양을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몰랐을 수는 없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발견’이었던 것이다.) 이 발견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일본은 1909년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다녀가면서 수년간 한국의 고적을 샅샅이 조사했던 동경대의 세키노 타다시 교수를 투입해 평가를 의뢰했고, ‘동양에서 비교 대상이 없는 최고의 걸작’이란 평을 받았다. 일제는 1910년에 석굴암 일체를 해체해서 서울로 가져가려고 시도했다가 무산되는 일이 있었고, 이후 몇 년에 걸쳐 보수 공사가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는 노출된 석굴암 벽면에 함부로 이름을 새기는 등 무분별한 행태가 다수 저질러졌다. 1916년에는 일본의 저명한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석굴암을 다녀가며 자세한 평가를 담은 글을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 등지에 기원을 두고 있고, 중국의 둔황 석굴이나 용문 석굴 등은 훨씬 규모가 크다. 그러나, 그 지역은 석회암을 파고 들어가 굴을 만들고 불상을 조각하는 방식이었다면, 석굴암은 매우 단단한 화강암을 석재로 삼아 쌓아 올려서 건축을 했고, 정교한 조각상을 내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사용한 석재의 크기로 보아 이런 거대한 재료를 산꼭대기까지 끌어와 작업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여 년 전 일본인들의 눈에도 이런 규모와 정교한 예술성이 놀라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석굴암은 이런 경이감을 느끼기는 힘들다.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쳤지만, 습도조절에 실패해서 유리벽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사진촬영도 안되고, 엄청난 관람객이 찾아오니 늘 줄줄이 서서 차례대로 잠깐 ‘이런 모양이구나’ 살펴보고 지나가게 되어 있다. 해서 우리의 석굴암 경험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석굴암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무리 많이 읽었더라도, 현장에 가서 확인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회를 연다는데, 현장에 가봤자 출입이 안 되고 평론가들의 찬사만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 연주를 들은 것인가? 공연장에는 왜 가야 하는 것인가? 경주 지역 관광지 중 입장객 수로는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석굴암 관광이 이래서는 안 된다. 접근성을 높이고, 경험치를 확보해 줄 방안이 없다면 이렇게 계속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상유지가 대안일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보문단지에서 불국사 가는 길에 있는 민속공예촌 내 신라역사과학관에서 1:5 비율로 축소된 석굴암 모형을 볼 수 있고, 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관 입구에서는 실물크기 부조 탁본을 볼 수 있다. 석굴암의 실제 내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은 그간 공개된 사진과 영상자료들이다. 부족하지만 이를 통해서라도 석굴암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석굴암의 구조는 사각형으로 된 입구 쪽의 전실(前室), 복도, 그리고 돔형의 주실(主室)로 이루어져 있다. 본존불 높이의 약 3배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전실에 서면 본존불의 뒷면 광배까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가능하다. 전실에는 좌우로 총 8개의 팔부신중(八部神衆) 상이 자리 잡고 있다. 아수라 등 힌두교의 신들이지만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정면 통로 양쪽으로는 금강역사상이 각각 자리 잡고 있는데, 산스크리트어의 첫 글자인 ‘아’와 끝글자인 ‘흠’ 소리를 내며 거대한 근육질 몸매에 역동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표정이 매우 독특하다. 복도 양쪽으로는 동서남북을 맡아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상이 있다. 악귀를 밟고 있는데, 표정이 무섭긴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한국의 사천왕은 공포스러운 정도는 아니고 순화된 느낌이 있다.
주실로 들어가면 약 2.5m 높이의 부조상들이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복도 쪽 가까이에 양쪽 편으로 나누어 서 있는 존재가 보현보살, 문수보살, 제석천, 범천이다. 그다음에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들이 있고, 본존불 바로 뒤편에는 십일면관음보살이 있다. 정작 석굴암에 가서는 주실의 이 불상들을 볼 수가 없는데, 경주박물관에서 이 부조상의 일부를 재현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조각으로 정평이 있고, 몸의 비례가 매우 유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실의 신장 상들과 조각의 미감이 차이가 느껴질 정도라서 서로 조성된 시대가 다른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본존불은 제자들로 둘러싸인 것으로 보아 석가여래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의 불상 중 최고의 작품일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석가여래의 원형이자 이상형은 압도적으로 이 본존불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불교 전래 후기로 갈수록 중국이나 인도 풍을 추종하는 스타일이 많이 나오고, 완성도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석굴암 본존불은 경주 일대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초기의 투박한 얼굴형, 3등신에 가까운 몸통의 비례 등에서 발전해 나온 자생적 불상의 전통이 비례나 스타일 면에서 흠잡을 곳 없는 수준에 도달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할 만하다. (이 흥미로운 발전과정은 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관과 경주 남산에 산재한 여러 석불들 속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주실에서 본존불의 눈높이쯤에 10개의 작은 석실이 만들어져 있고, 보살상이 하나씩 들어가 있다. 현재는 8개만 남아있어 일제강점기에 2개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독특한 것은 이런 석상 중에 가장 거칠게 조성된 하나가 보살상이 아닌 유마거사(維摩居士, Vimalakirti) 상으로 알려져 있다.(최준식 <신라가 빚은 예술 경주>) 그는 대승불교에서 중시한 일반 신도, 즉 재가불자였다. 석재를 둥글게 쌓아 올린 독특한 돔의 형태는 우주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석굴암의 주실은 본존불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은 완벽하게 구현된 석가모니 부처의 이상 세계다. 부처와 보살로 가득한 그 세계 내부에 대표적인 재가불자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최근 <원효의 마음공부>를 쓴 강기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조성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가사유상에 대해 매우 독특한 가설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그 불상의 전무후무한 스타일이 원효 이후 재가불자를 재가보살로 파악하는 불교신앙운동의 한 소수파들에게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그 불상을 ‘금강삼매상’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재가불자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도 금강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과감한 문제제기이다. 전문가들의 논의가 더 필요하겠으나, 나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석굴암의 이상세계, 불국토의 이상세계 속에 유마거사가 들어가 있다면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불국사 정문 주차장 맞은편에 동리목월문학관이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위치에 있는데, 경주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문학가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일대기와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불국사를 들르면 꼭 한 번씩 다녀오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