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03] 향교와 서원
‘유교(儒敎)’를 논하거나 그 유산을 찾아보려면 누구나 경주보다는 안동을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에서 만날 수 있는 유학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고, 그 시공간의 차원을 달리하는 내용이 된다. 경주를 그냥 돌아다니는 방식을 고수해서는 이런 테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경주에서 유학을 테마로 하는 딮 다이브 여행은 어떤 방식으로 하면 될까? 먼저 약간의 역사적 시각 교정과 지식을 탑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유학은 조선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시대는 송나라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흐름, 즉 성리학이 학문과 정치를 제패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 등의 가르침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일 것이라 추측하며, 공식적으로는 고구려에서 태학(372)을 설립했는데 주 교육 내용이 유교 경전들이었고, 백제는 오경박사를 두었다고 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신문왕 2년(682년)에 국학(國學)을 설립해서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이후 독서삼품과 등의 인재등용 절차는 유교 경전에 능통한 정도가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신라에서 활동한 이들이 이두를 만들어 유교 경전의 이해를 도운 설총, 외교문서 작성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문장가 강수, 중국에서도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관료이자 사상가 최치원 등이다. 경주 박물관에 소장된 ‘임신서기석’은 두 명의 청년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열심히 읽고, 공부를 하겠다는 결의를 새긴 비석인데, 임신년이면 진흥왕 13년(552년) 혹은 진평왕 34년(612년)에 해당한다. 태종무열왕 김춘추(603-661)의 경우는 그 이름도 유교적이고, 중국에서 오랜 머물며 외교활동을 펼치는 와중에 유교적 교육을 잘 받은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화랑과 낭도들은 당시의 지식 엘리트였던 승려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들은 불교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유교를 함께 가르쳤다. 유교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고급 관료를 양성하고, 교양을 키우는 데 있어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교 승려들도 유교 문헌에 밝았다. 고려 무신정권 이후로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정쟁을 피하기 위해 출가해서 몸을 숨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고려말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조선은 아예 성리학의 나라가 되었으나, 한국에서 유학의 전래와 발전 역사는 삼국시대 이래 이토록 다양한 경로를 취했다.
경주의 인물들이 이런 한국의 유학 역사에 얼마나 관련되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는 방법으로는,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는 것이 가장 직관적이다. 중국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배향하여 제사를 모시고 있는 문묘(성균관과 향교)에는 ‘동국 18현’이라 불리는 한국의 유학자들이 있다. 신라의 2현으로 설총과 최치원이 올라있고, 고려 2현에는 안향과 정몽주, 조선시대에는 1차로 배향된 동국 5현으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있고, 그 이후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가 추가되어 총 14인이 된다. 이 중에 종묘(왕의 묘소. 당대의 공신들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에도 배향된 이는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의 6명이다. 이언적의 경우는 명종의 신주를 별묘로 옮기게 되면서 규정에 따라 종가로 되돌려져서 현재는 총 5명이다. 흥미롭게도, 신라 2현은 다 경주 사람이고, 고려 2현 중 정몽주는 ‘경주부 영일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외가인 영천에서 태어났고 그를 기리는 임고서원이 영천에 있다. 경주 인근이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가장 먼저 배향된 동방 5현 중 한 사람이자 문묘와 종묘에 다 배향되었던 회재 이언적이 경주 사람이다. 이 정도면 한국 유학의 역사에 끼친 경주 인물들의 비중이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다.
요즘은 다 치킨 브랜드 이름으로 알고 있는 ‘교촌(校村)’은 원래 향교(鄕校)가 있는 동네를 뜻했다. 교동(校洞), 교리(校里) 등이 다 비슷한 명칭이다. 경주 왕경지구의 월성 서쪽이 교촌이다. 여기에는 경주 향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자리는 원래 신라의 국학 자리였다고도 전해진다. 경주 향교는 경상도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전국적으로 위상이 높은 곳이었다. 향교 인근에는 사마소(司馬所)라고 해서 1차 과거시험을 통과한 생원, 진사 이상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지역의 교육 및 여론형성 기능을 했다. 흔히 유향소(留鄕所)라고 해서 지역마다 훈구파 선비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 논의도 하고 지역의 여론을 모으는 곳이 존재했는데, 사마소는 이들에 반발하여 설립한 협의기구이다. 지방에서 유학을 공부한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교류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향교는 서당에서 기본적인 한문 교육을 받은 학생을 받아서 가르치는 공립 교육기관이었다. 읍면 단위로 지방에 설립되어 있고, 중등교육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각 지역의 위상에 따라 받을 수 있는 학생 수가 달랐는데, 경주 같은 '부(府)'는 90명까지 학생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과 연결된 중앙의 기관이 성균관인데, 국립 교육기관이고, 과거시험 1차를 통과했거나 향교에서 추천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등교육을 제공했다. 향교는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유학자들의 제사를 모시는 대성전을 두고 있는 의례기관이기도 했다. 문묘에 배향된 중국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기리는 역할은 성균관과 향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경주향교는 연간 제례를 지내고 있고, 주말에는 전통혼례식을 재현하는 등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원은 주로 경치가 좋은 곳에 설립된 사립교육기관이다. 여기는 한국의 유명한 유학자를 모시는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내고, 좋은 선생이 있는 곳은 학생들을 받아 가르치는 교육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영주에는 안향을 기리는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안동에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이 설립되었고, 경주에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안강의 옥산서원과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모시는 서악마을의 서악서원이 유명하다. 이곳은 흥미롭게도 원래 김유신을 모신 곳이었으나, 무신을 서원에서 모시는 것이 적절한가 논란이 생기면서 설총과 최치원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원 중 중요한 곳은 왕이 전답과 노비를 내려주는 사액서원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되자 전국적으로 서원 난립 현상이 일어났다. 유명한 유학자와 집안의 어른을 동시에 배향해서 사액까지 받게 되면 가문의 영광이란 생각이었다. 이렇게 과열되다 보니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 양반들이 집단을 이루어 지방 정치에 관여하는 경우도 많아지게 되어 서원은 개혁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여러 번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으나, 구한말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다 철폐하도록 했다. 그때 보존된 곳은 여러모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라 볼 수 있는데 경주에서는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이 그곳이었다. 유네스코에서는 2019년에 ‘한국의 서원’이란 주제로 전국에 9곳의 서원을 지정했는데, 경주 옥산서원이 그중 한 곳이다.
경주에서 먼저 가볼 만한 곳은 남산의 북쪽 끝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상서장(上書莊)이다. 신라말 최고 유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거주했던 공간이다. 그가 당나라에 유학해서 과거를 통과해 당의 관료 생활을 하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는 신라로 돌아와서 길지 않은 관료 생활을 하면서 여러 편의 글과 비문을 통해 신라의 사상과 삶을 후대에 전해준 중요한 인물이다.
경주 남산에는 조선시대의 풍운아이자 절개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도 있다. 그는 남산 용장골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여기서 그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집필되었고, 여기서 매화를 키웠던 인연으로 매월당이란 호를 얻었고, 이 시기의 행적을 담은 유금오록도 남겼다. 그를 기리는 매월당 영당은 남산의 용장사에 있다가, 지금은 감포의 기림사에 세워져 있다. 그는 후대에 선비의 표상으로 높임을 받았지만, 세조의 단종폐위에 항의하여 방랑길에 나설 때에는 출가한 스님 신분이었다. 그의 행적을 두고 율곡은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고 해서 행적은 불자이나, 마음은 유학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경주에는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이 유명하지만 이외에도 다수의 서원이 존재한다. 남산의 서남쪽 내남면에는 최부자집의 시조인 최진립 장군을 모신 용산서원이 있다. 강동 쪽에는 가을철 단풍이 드는 은행나무로 유명한 운곡서원이 있는데, 고려의 공신인 권행을 비롯한 권산해, 권덕린 등 권 씨 집안의 인물을 모시고 있다. 감포 쪽 양남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 백촌 김문기 선생을 배향하는 나산서원이 있다. 현곡에는 귀산서원이라고 1786년(정조 10)에 서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된 곳이 있다. 가장 서원이 많은 지역은 안강과 그 인근인데, 강동면에 1695년(숙종 21)에 회재의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暾)을 추모하기 위해 동강서원을 세웠고, 옥산에는 회재의 아들 잠계 이전인을 모신 장산서원을 세웠다. 양동마을 내에는 무첨당 이의윤(無忝堂 李宜潤 1564~1597)을 기리는 경산서원이 있다. 그 외에도 직천서원, 단구서원을 비롯하여 다수의 서원이 인근에 세워져 있다. 이들 서원은 대부분 대원군 시절에 훼철이 되었다가 그 이후 다시 복원된 곳들이다.
남인(南人)이란 서인(西人) 대 동인(東人)으로 나뉜 구도에서 동인에서 분파한 이들로,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의 학통을 잇고, 지역적으로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지역과 서울경기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이들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영남 지역 기반의 남인들을 '영남 남인'이라 불렀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퇴계파라고 볼 수 있는데,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계 진출이 거의 막히면서 200년가량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지역의 서원 등을 기반으로 삼고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성리학 자체의 이론적 탐구에 몰두하는 양상을 보였다. 사화라고 불리는 권력쟁탈전이 여러 번 벌어졌고, 그때마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양상이 번갈아 일어났다. 당파 싸움이란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자신과 가문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영남 남인들이 주류인 경주지역에서는 당파싸움이 직접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두드러진 사건이 하나 있었다. 노론의 영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포항 장기 지방에 5년간 유배를 마치고, 다시 거제로 옮겨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1679년 이 행로가 경주를 거쳐가야 했는데, 그때 곡산 한 씨 집안의 한여유 등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후 우암이 사망하자 한시유, 한흥유 등 곡산 한 씨 집안의 주도로 당시 경주부윤 이정익의 지원을 얻어 1719년 현재의 상서장 인근에 봉암영당(鳳巖影堂)을 건립해 우암을 기리게 된다. 노론파의 이런 행동에 분노한 지역 내 남인 유생들은 1722년 경주부윤 권세항 등의 비호 아래 100여 명이 들이닥쳐 영당을 때려 부수는 각목 난동 사건을 벌였다. 이 와중에 한시유가 이들에게 맞아 죽는 대형 사건이 벌어진다. 그 당시에는 남인들이 득세하면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관련자 28명이 대거 처벌을 받는 계림사화(鷄林士禍, 1725)로 번져 남인들이 화를 당했다. 영당은 다시 복원되었고, 1764년 인산서원(仁山書院)으로 사액되어 대원군의 훼철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 다시 복원되지는 못했다.
경주 지역은 영남 남인이 다수파였지만, 송시열을 따른 노론 계열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 간에 갈등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남권에서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퇴계파가 남인을 이루었다면, 퇴계와 동시대의 남명 조식(1501-1572)은 경남을 지역적 배경으로 하였고, 북인 계열을 형성했다. 남명은 일찍이 관직을 떠나 산림처사를 자처하였는데,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투에 참여하는 등 매우 실천적 성향을 보였다. 경주지역에 남명파는 존재감이 없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