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04] 동학
경주 여행 코스 중 가장 덜 개발된 주제가 ‘동학’ 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런 상황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경주시는 ‘동학’을 차세대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켜 보겠다는 계획도 내어놓고 있으나, 내 생각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학은 이런 방식으로 다루기 가장 부적절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을 ‘관광’할 수 있는가? 이 운동을 창도한 제1대 교주와 제2대 교주가 다 관에 의해서 ‘사도난정(邪道亂正)’을 이유로 처형당했고, 세상이 알고 있는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반체제 민중봉기인 이 운동을 '우와, 우와'하면서 구경하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순치하려고 해도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시대와 세상에 대한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어찌 감출 수 있으랴?
나는 경주에서 동학 여행을 하려면, 먼저 일정량 이상의 불온함을 장착하는 것이 필요하지 싶다. 여행자 자신이 어느 정도 삐딱하지 않고서야 애초에 동학에 끌릴 리도 없는 것일 테다. 그러기에 나는 동학 이야기를 굳이 보암직하고, 들음직하게 포장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생짜로 그들의 시대와 문제의식에 가까이 가보는 것이 이 운동을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에 예술작품을 보러 가는 것과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을 보러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동학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가, 먼 과거의 이야기로 만들어서 아무런 궁금증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교과서적 설명에 그치게 하는 것 이 운동을 가장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한다. 동학은 차라리 세상 불온한 사람들이 작당하고 몰려와서 한밤중에 횃불 들고 용담정 올라가서 심야집회를 하는 것이어야 맞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대신해보곤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문사회 분야의 출판에서 동학 관련 저술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비중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2021)이 두 권으로 발간되면서 도올 특유의 장광설로 대중들의 관심을 동학으로 몰고 오는 역할을 해주었다. 도올이 동학의 종교적, 사상적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해 주었고, 창비를 비롯한 여러 인문사회 출판사에서 동학 관련 저술들이 집중적으로 출간되면서 논의가 활짝 피어올랐다. 이런 분위기의 특징은 동학이 호남권의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시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앞선 시대, 즉 경주에서 일어난 수운 최제우의 동학 창도와 수십 년간 전국을 보따리 하나 들고 잠행했던 해월 최시형의 족적을 되살리는 종교적-사상적 측면에 무게를 싣고 있는 움직임이란 점이다. 동학을 한국사상의 맥락에서 제대로 위상을 설정하려는 노력, 종교사상으로 혹은 사회개혁 사상으로 동학의 가치를 재평가하며 현재적 의미를 새겨보려는 노력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경주의 동학을 살펴본다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학 연구자와 관심자들이 지속적으로 경주를 찾아오고 있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꽤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경주는 수운과 해월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초기 동학의 등장 전후 역사와 그 이후의 부침을 새겨보려면 경주를 와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경주시 현곡면에는 수운의 생가와 그가 득도한 용담정, 그리고 그 일가의 묘소가 있다. 용담정 인근에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전시관과 수련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시내에서 20분 정도면 가볼 수 있는 거리이다. 해월의 생가 터는 경주 구도심에 있는데, 조만간 복원사업이 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동상은 황성공원 공설운동장 옆에 서 있다. 경주시민이라면 산책하며 늘 접하는 위치에 있다.
경주에 동학 연구의 기반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주요한 학자들은 외부에서 다녀가는 실정이고, 경주 지역 자체에 충분한 연구와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진 상태는 아니어서 앞으로 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한다. 지역에 동학 관련 모임들은 이미 존재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연구소가 생겨서 경주에서만 접근 가능한 초기 역사 자료와 구전들이 체계적으로 수집되었으면 좋겠고, 새로 건축되는 시립도서관에는 특별 서가라도 하나 설치되어서 그간 출간된 연구서와 대중서들이 쉽게 대중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런 논의 과정을 통해서 종교이자 운동으로서 동학이 주는 교훈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는 한학자로 지역 내에 명망이 있었던 부친 근암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개가한 과부였기에 그는 서자 취급을 받아 벼슬길에 나아가는데 제약을 받았다. 그는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에 아버지를 잃었다. 부모 상을 치르면서 십 대 시절이 다 가버렸다. 십 대 초반에 결혼을 했으나, 20세에서 31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주유천하를 했다. 그는 일찍부터 수련도 하고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와중에 장사도하고, 사업도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았다. 32세에 울산의 처갓집에 와 있던 중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불리는 신비체험을 한다. 하늘의 책을 받아 펼쳐보는 경험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제 사건인지, 꿈에서 본 것인지 불분명하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것이 서양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서적을 접한 것이 아니었을까 보기도 한다. 그는 울산의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수련을 했으나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이후에 경주의 본가로 돌아와 수행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부친의 정자였던 용담정에서 37세이던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상제’에게서 주문과 부적을 받는 신적 계시 체험을 하며 득도한다. 그것이 '동학'의 시작이었다. 그는 홀로 일 년 정도 더 정진한 후 1861년 6월부터 공개적 활동과 가르침을 시작했다. 병을 고치러 온 사람들과 서당 훈장 등의 가난한 평민 지식인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의 이런 행태가 지역 유림들의 눈에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주변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주를 떠나 전라도 남원의 은적암에 몇 달간 머물며 자신의 가르침을 가다듬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다시 돌아온 수운은 접(接) 체제로 조직을 재편하고, 최시형을 그의 도통을 이어갈 후계자로 정한다. 그 무렵 유림의 신고로 최제우는 관아에 잡혀 들어갔다가 제자들의 항의로 풀려나는 일도 있었다. 동학의 교세는 인근 경상도 지역에서 급속도로 번져 경주 인근에 신자가 천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유림은 상소를 올렸고, 수운은 1863년 12월 조정에서 내려보낸 선전관에 의해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대구감영에서 조사를 받고 1864년 3월 대구 관덕정에서 처형을 당했다.
수운의 시기는 중국이 두 번의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으로 서양세력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시기이고, 특히나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1850-1864, 2,0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다)으로 거대한 내전을 겪고 있던 와중이었다. 홍수전은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농민운동을 일으켰는데, 청나라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왕성하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비록 이 운동이 사이비 종교 운동처럼 교주를 신격화하고, 여러 기행으로 자멸하는 행로를 보이긴 했으나, 서구세계와 중국에 끼친 충격파는 대단했다. 중국이 외세의 침략과 종교운동이자 농민운동으로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은 서학에 대한 박해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면서, 서양이 종교를 내세워 나라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루어가던 일본은 자신만만한 대륙진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수운은 20대의 십 년간 세상을 다니면서 주변 국가의 현실과 국제정세를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하나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위기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이 더해진 상황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면서 이를 타개할 방도를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불길처럼 번져간 동학의 열기에 심상치 않은 위협을 느낀 경상도의 유림들이 상소를 올려서 조정에서는 동학교주를 체포하러 사람을 내려보냈다. 그의 보고서가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선전관은 그들이 조령을 넘자마자 마을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며 동학의 주문을 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도처에 동학의 가르침과 그들의 행실을 칭송하는 소문이 퍼져있었다고 했다. 1863년 말에서 이듬해 봄까지의 기간 동안 실록에는 동학 관련 내용이 두 번 길게 등장한다. 최제우를 취조한 내용과 그의 처리에 대한 방침을 요청한 내용이다. 그들은 수운과 그의 행적이 황탄하다고 비판하고는 있으나, 긍정적 증언들도 제시되면서 뚜렷한 처벌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다가, 이들이 결국 역모의 혐의와 세상을 소란스럽게 할 의도를 갖고 있다는 혐의를 명시했다. 그 근거로 한때 무관이 되기를 꿈꾸었던 수운이 검무(劍舞)를 추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랫말이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때로구나, 때로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검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만 대에 한 번 태어난 장부요, 5만 년에 한 번 만난 때로구나…(이하 생략)”
경주시 현곡면에는 수운의 생가가 담백하게 복원되어 있다. 생가 바로 맞은편이 구미산이다. 산 초입에서 오른편 산 자락에는 가족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데, 수운과 그 아내, 그리고 그 자녀 및 동학의 주요 인물들의 묘가 차례로 있다. 왼쪽 길로 쭉 들어가면 최근에 조성된 천도교 역사전시관과 수련시설이 있고, 용담정 입구를 만난다. 걸어서 10-15분이면 용담정까지 올라갈 수 있다. 용담정은 사당처럼 꾸며져 있는데, 수운의 초상화를 모셔놓았다. 용담정 입구의 동상과 용담정의 초상화에서 수운은 몸집은 작지만, 눈매가 날카로운 꼬장꼬장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동학의 전후 역사를 새겨가며 돌아본다면 걸어서 한두 시간 정도의 투어가 될 것이다.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은 경주 사람인데, 생가는 구도심 중심가에 있었다. 그의 생가 옆에 천도교 교당이 세워져서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데, 정작 그의 생가는 파괴되어 도로와 주택지에 편입되어서 원형을 찾을 수 없다. 생가 위치를 확인해서 복원사업을 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몇 년 후면 해월 생가와 작은 전시 공간 정도는 생기지 않을까 기대를 한다.
그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는데, 어릴 때 약간의 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다. 일찍부터 포항 인근으로 가서 종이공장, 인쇄소 등에서 일을 했었고, 나중에는 화전을 일구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수운의 가르침이 힘을 얻자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를 청하고 찾아오던 와중에 그는 특별히 수운의 눈에 들었고, 후계자로 도통을 전수받게 된다. 스승의 체포와 처형이란 충격적 사건 이후로 그의 37년에 이르는 잠행과 도피 행적이 시작된다. 수운은 불과 3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짧지만 강렬하게 자신의 삶을 불사르고 사라졌지만, 해월은 그의 사후 남겨진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강원도의 산골을 비롯하여 전국을 누비며 신자들을 가르치고, 같이 수련하고, 모금을 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출간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1890년대가 되면 동학도는 전국적으로 수십 만 명에 이르는 규모로 성장했다.
그의 가르침은 어려운 말이 하나 없는 순전한 한글이었고, 그 내용도 너무나 일상에서 솟아 나온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가르친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가르친 사람이었는데, 특히나 그가 노비를 며느리 삼은 일이며, '베 짜는 하늘님'이라며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하늘의 일로 묘사한 내용 등은 그가 당대의 전근대적 사고를 훌쩍 뛰어넘는 윤리와 세계관의 소유자임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그의 가르침은 <해월신사 법설>로 엮어져 있다. 수운과 해월의 너무나 대조되는 스타일은 기독교에서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연상하게 하기도 하는데, 혹자는 교조로서의 수운보다 그의 가르침을 깊고 넓게 풀어낸 해월이 사실상 하나의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동학을 거대한 운동과 사상으로 다듬어낸 존재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경주 지역에서 수운과 해월의 행적으로 주목할 만한 정황들이 조금 있다. 아마도 같은 경주 최 씨란 연고로 최부자집과 연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최부자집이 동학과 천도교에서 하던 성미(誠米)에 참여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최시형의 아들이 최부자집의 지원을 받으며 공부도 하고, 임시정부 일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동리의 맏형이자 ‘하늘아래 최고로 밝던 머리’란 칭찬을 받던 김범부 선생은 화랑에 대한 연구와 글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동학을 신라의 화랑도가 근대에 재현된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으로 동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제안을 내어놓았다. 이 내용은 이후 김지하 선생도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안도 동학과 연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최제우 생가 복원도 70년대에 이루어질 수 있었고, 생가 앞 비문에도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학(東學)이란 서학(西學)에 반대해서 동학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중국 입장에서 바다 건너 동쪽 나라란 의미로 삼국시대부터 쓰였던 해동(海東), 최치원의 비문에도 나오는 동국(東國), 16세기 사림들이 주체성을 강조하며 선호했다는 대동(大東) 등의 용례에서 보듯 '동쪽 나라'란 한반도 자체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자 이를 이상화한 개념어나 다름없었다. 동학은 그런 면에서 굳이 서학에 대응하는 동학이란 의미 이상으로 ‘이 땅의 가르침’, 혹은 ‘그 가르침(The Teaching)’이라고 새겨볼 수 있는 명칭이다. 이 땅의 가르침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새겨보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지만, 경주에서 그 실마리를 한 번 풀어볼 엄두를 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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