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05] 석탑
종교란 대체로 ‘위대한 선지자를 통해 알려진 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그래서 대체로 고등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에서는 그들이 믿는 신(혹은 궁극의 진리)이 있고, 그를 매개하는 존재(mediator)가 있게 마련이다. 이들 종교는 그 신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 이를 예배하거나 기억하는 저마다의 방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인간이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그래서 사실상 신(진리) 그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위대한 선생들은 자신을 엉뚱한 방식으로 숭배하지 않도록 당부를 남기고 갔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이를 이제 자신이 찢기게 될 살과 흘리게 될 피를 기억하는 상징적 예식으로 삼았는데,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라(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 이후 성찬식(Holy Communion)으로 남았다.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성찬이라 명명된 예식을 사제의 집전에 따라 참여하는 것을 뜻하는지, 아니면 매일 밥을 먹을 때마다 함께 밥상을 둘러싼 이들과 공동체의 친교를 하며,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다짐을 하라는 것인지. 기독교 신학에서는 좀 파격적일지 모르나, “교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배당이 불타고 난 뒤에 남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한다. 교회(ecclesia)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성찬의 의미를 수행하는 이들이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높은 건물을 짓고, 화려한 장식을 하며 위용을 떨치는 것은 언제나 이 간단한 식사 예식만 남긴 예수의 뜻에 반할 수 있다는 근본적 핸디캡을 안고 있다. 종교는 늘 이 위기에 사로잡힌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하고,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을 부르게 되는 형용모순과 이율배반의 상태에 상시적으로 놓이게 된다.
절에 가보면서도 비슷한 질문이 들었다. 오래된 절은 유독 화재로 피해를 많이 입었다. 과연 이 위대한 종교유산이 불타오르고 나면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불태운 것은 불교인가, 아닌가? 절이란 공간에는 종교적 상징물이 여럿이다. 그러면 과연 이 중에 핵심은 어디일까? 무엇은 없앨 수 있는지, 하나씩 없애가다 보면 최후까지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늘 의문이 많았다. 건축적으로는 불상이 있는 대웅전이 사찰의 중심부가 맞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불교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 보면, 불상보다 탑이 앞서는 상황을 만난다. 그 이유는 그곳이 부처님을 모신 곳으로서 상징성을 먼저 획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불교 초기 역사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사후에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초기 불교의 신도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을 것이다. 부처님 사후에 화장을 하고 나서 나온 사리가 8 섬 4말이라고 한다. 이것을 8개 나라 대표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들이 돌아가서 각각 봉안탑을 세운 것을 '근본 8 탑'이라고 한다. 수백 년 뒤에 아쇼카 왕이 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허물어 거기서 나온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인도 전역에 보내 84,000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의 탑은 사리를 봉안하는 무덤 혹은 봉안소의 기능을 했다. 이후로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관심들이 점점 더 커져갔고, 한국에는 신라 진흥왕 때에 최초로 진신사리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고, 본격적으로는 선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얻어와 다섯 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곳은 불상이 따로 필요 없다고 해서 이런 곳에는 대웅전 대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이름을 쓴다. 국내의 5대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에 있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이자, 몸이다. 탑마다 진신사리를 넣고 싶었겠지만, 그러지 못하자 불경을 대신 넣으면서 이를 법신사리(法身舍利)라고 불렀다. 초기에는 탑을 부처님의 몸을 모셨다고 높이고 직접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탑의 역할이 사찰을 장엄하는 하나의 요소로 그 역할의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고 볼 수 있겠다. 비로소 탑은 그 자체로 필요충분했던 존재에서 사찰의 한 구성요소로 비중이 줄어들었고, 그 위치도 보통 금당 앞마당에 세워져서 대웅전 내의 불상과 그 종교적 역할을 나누게 된다. 물론 탑돌이 같은 형태로 탑이 직접적 예배행위에 연루되기는 하나, 사찰 내부의 종교적 상징성은 확연히 분화하였다.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래된 탑은 나무탑(목탑, 木塔)과 벽돌탑(전탑, 塼塔)으로 양분되는데, 초기에는 무덤이나 봉안소의 형태를 따르다가, 중국에서는 부처님을 모신 집의 모양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우리 역사에서는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의 모전석탑이 대표적으로 이런 각각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한반도에서는 곧 탑의 재료가 화강암으로 바뀌는데, 익산에 있는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전형적인 목탑의 양식을 석탑으로 구현한 것이다. 대단히 큰 규모의 탑인데, 화강암처럼 다루기 힘든 재료를 써서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할 지경이다.
경주에서 탑이라 하면 곧 삼층석탑이다. 물론 석탑이 아니거나, 삼층이 아닌 탑도 존재하지만 경주는 워낙에 삼층석탑의 존재감이 심대한 곳이다. 그 숫자에 있어서 압도적이고, 연대기적 변화 양상을 추적할 수 있고, 사람들이 어떤 맥락에서 탑을 세웠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장소도 많다. 상황이 이러하니 삼층석탑의 원형을 찾아서 여행을 해 본다면 그 최적지는 경주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접근성이 좋은 것은 경주 박물관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7C 후반)이다. 9m에 이르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박물관의 구석에 있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데, 조만간 박물관 중앙 광장의 다보탑과 석가탑 복제품을 치우고, 그 자리에 세우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고선사는 원효가 주지로 있었던 곳인데 댐 건설로 수몰이 되면서 탑이 박물관으로 오게 되었다. 신라 삼층석탑의 초기 형태를 잘 보여준다. 그 규모와 만듦새를 찬찬히 뜯어보면 매우 풍성하다. 크기와 조성 시기가 비슷한 것이 감포의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7C)이다. 여기는 쌍탑이다. 직접 가서 보면 그 규모가 압도적이다. 특히 저녁 무렵이면 대단한 풍광과 운치를 드리운다. 오층석탑으로 비슷한 규모인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8C)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특히 화강암의 백색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백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초기 석탑들은 그냥 그 앞에 서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대상 앞에 서게 될 때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것이 미학적으로 뛰어나고, 기하학적으로 잘 균형이 잡힌 거대한 구조물일 때에, 그리고 그것이 종교적 상징성이 깊이 배어나는 것일 때, 우리의 내면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정신작용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석탑들은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단독으로 이런 영향력을 발휘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술적 교감의 형태로, 어떤 이들에게는 심오한 종교적 감동의 방식으로 다가갈 것이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조금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서남산의 창림사지 삼층석탑(보물, 9세기 중엽)도 비슷한 크기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데, 여기에는 기단부에 팔부신장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곳도 경주에서 석양이 가장 멋진 곳으로 꼽히는 곳 중 하나다. 경주가 좋은 것은 이런 석탑들이 야외에 그대로 공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풍광 그대로의 자리에 있기에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선조들이 느꼈을 어떤 감성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초기의 석탑은 규모가 장대하다. 아마 절보다 탑이 더 두드러진 위용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황룡사 9층목탑도 이를 둘러싼 사찰을 압도하는 규모였을 것이고, 인근의 분황사 모전석탑도 원래 규모가 남아있다면 상당히 큰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초기의 탑들은 사찰에서 좀 더 두드러지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석탑의 기단부나 탑신의 각 면은 비어있는 경우도 있지만, 문이나 창문을 새겨놓은 경우도 있었다. 탑 자체를 하나의 완결된 집이나 사찰로 생각한 때문으로 보이는데, 몇몇 탑에서는 탑의 면에 조성된 빈 공간의 개수에 맞추어 십이지신상(eg. 원원사지 삼층석탑), 팔부신장상(eg. 창림사지 삼층석탑), 사천왕상(eg. 원원사지 삼층석탑), 인왕상(eg. 장항리 오층석탑) 등을 새겨놓기도 했다. 부처님의 몸을 탑 내부의 사리함에 담고 있으니 이를 사방으로 지켜내는 모습을 연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석탑은 더욱 간결해지고, 규모도 작아지고, 추상미술처럼 비례와 균형의 미가 돋보이는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곳이 불국사의 석가탑일 것이다. 같은 공간에 서 있는 다보탑이 목탑에서 가능했을 화려한 구조와 양식을 석재를 활용하여 자유자재로 재현한 구상예술의 정점이라면, 석가탑은 반대로 선과 면의 가장 근원적 형태를 그대로 반영하여 단순화하고, 단순화한 추상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은 이런 상반된 원리가 쟁투하며 조화하는 화쟁의 공간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곧 불국토의 핵심이란 의미에서 이런 석탑의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최종적인 조화의 자신이 없었다면 아예 시도하기조차 어려웠을 기획이라 생각한다.
경주 남산에는 상당히 많은 석탑이 흩어져 있다. 대체로 절터 부근에서 발견되는데 가끔은 꽤 깊은 산중에 탑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것은 산의 높은 곳에 세워져서 산세와 풍광을 고스란히 그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용장사지 삼층석탑일 것이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 용장골 깊이 들어가 산의 7-8부 높이쯤에 자리 잡고 있다. 용장사터가 인근에 있고, 여기에는 석불이 여럿 보존되어 있는데, 삼층석탑은 빼어난 산세를 그대로 조망하는 위치에 당당하게 서있다. 용장사지는 여러 경로로 접근 가능한데, 순환로를 따라 걷다가 하산길로 용장골을 택하면 보기가 좋다. 포석정에서 금오정을 향해 산을 오르는 길에는 늠비봉이 있는데, 여기에는 시대적으로는 한참 후대에 속하지만, 새롭게 복원된 늠비봉 오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경주 시내 방향으로 탁 트인 조망과 더불어 우뚝 솟은 탑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석탑 기행으로 가볼 수 있는 곳으로 폐사지를 꼽고 싶다. 그곳에는 지금 탑이 없다. 남아있는 것은 절이나 탑이 존재했었다는 흔적뿐이다. 그런데 그런 곳을 찾아다니는 특별한 여행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한 방식이다. 부처의 사라짐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탑도 사라지고, 절도 사라졌다면, 이제 그 부처는 어디로 간 것인가? 폐사지의 그 처연한 부재감은 그 공백으로 인해 훌륭한 존재감을 형성한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깊은 산속의 폐사지를 찾기 전에 경주의 황룡사지에 가보시라. 그곳은 거대한 목탑과 장육존상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공간인데, 폐허다. 사람들은 그 폐허를 견딜 수 없어서 자꾸 무언가를 채워 넣거나, '복원'이란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데, 지금 이 폐허가 줄 수 있는 충만함 이상의 것을 약속할 수 없다면 그대로 두는 것이 최선이다. 황룡사지는 아무것도 없고 기초석밖에 없는데, 어디에도 빈 곳이 없다. 사라진 이를 기억하고, 특히 부처를 기억하는 특별한 방식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