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기억하는 특별한 방식(2)"

[딮 다이브 06] 불상

by Harry Yang

경주의 특혜

산을 오르거나, 길을 걷다가 불상을 하나 보았다고 하자. 매우 신기한 일이니 유심히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매일 오가는 산이나 길 옆에 그 불상이 있다면, 신기한 것은 하루이틀일 것이고, 그다음에는 그 불상의 여러 요소가 관심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요컨대 계속 봐도 질리지 않고, 꾸준히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런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고서 살아남은, 즉 사람들의 눈을 여전히 가로채고, 보고 있으면 늘 새로운 감성을 자극하는 힘이 있는 작품, 그것을 예술적 교감이라 해도 좋고, 종교적 차원의 감화라고 해도 좋다, 그런 작품은 영속적 가치를 획득한다.


경주에 와서 불상, 특히 석불에 관심을 두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딱히 불교신자이거나, 조형미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국내에서 아마 한 지역에서 다양한 석불을 이만큼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석불들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관련 서적을 살펴보아도, 고려나 조선의 불상에 비해 삼국시대의 불상이 압도적으로 예술적 성취도가 높다.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남아있는 곳이 신라이다. 심지어 상당수 석불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볼 수도 있고, 때로는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경이로운 체험이다. 경주에서 불상, 특별히 석불을 중심으로 하는 여행은 이런 특별함이 있기에 시도할 가치가 충분한 여행이 될 것이다. (불상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석불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불상의 기원

우선 불상은 종교적 상징물이고, 예배의 대상이다. 주요한 종교들에서는 신 혹은 진리의 형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구체적 형태로 만들어 놓고 이를 숭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 그 종교의 가르침에도 그런 내용이 등장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초기 경전에 석가모니 자신이 형상을 만들지 말도록 경계했다는 내용이 있고, 초기 불교에서도 붓다를 의식적으로 그리거나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을 그려도 붓다 대신 그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 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발자국, 그가 앉았던 좌대 등을 통해 그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식이었다.


석가모니(기원전 624년-544년 추정) 사후에는 그를 화장한 후 나온 사리 8 섬 4말을 불교를 추종했던 8개 국가에 나누어 이를 봉안한 스투파(stupa)를 세웠고, 약 300년이 지난 후 등장한 아쇼카 왕(기원전 269-232)이 이를 다시 꺼내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스투파 혹은 탑이 초기 불교 신앙에 중요했던 이유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란 의미 때문이었다. 이 스투파는 원래 거대한 무덤 같은 형태였으나, 중국으로 한반도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탑은 점차 사찰의 일부분으로 기능하는 조형물 형태로 변화해 왔다.


서기 1세기 무렵 인도에서는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 지역과 마투라 지역을 중심으로 쿠샨왕조가 대제국을 이루는 시기와 겹친다. 이 지역은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기원전 334-325)을 통해 서양의 문화가 깊이 유입된 지역이었고, 한 무제(재위기간 기원전 140-87)의 서방 확장으로 중국과도 접촉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간다라 미술’이라 불리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은 조형미술이 발전했는데, 대승불교와 맞물리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 처음 시작된다. 하나의 종교적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불교가 초기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그 다음에는 그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으로, 그 다음에는 그의 육체성을 재현하는 불상으로 신앙 수행의 방식과 방편을 다양화해 가는 것은 포교를 위한 자연스런 확장이자 선택이라 말할 수도 있고, 지속적인 일탈의 궤도를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이슬람에서도 신의 형상화는 깊고도 심각한 논쟁적 주제일 것이다.


어쨌든 붓다를 기억하는 강력한 방편으로 불상은 등장했고, 이내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간다라 지역에서 나온 초기 불상은 그리스 조각과 비슷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1세기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때에는 이미 불상이 종교적 예배의 주요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불교가 고구려로 전해질 때(소수림왕 2년, 372년)에도 불상과 불경이 들어왔다고 하고, 백제는 서해를 통해 중국과의 교류 폭이 더 넓었고, 불교의 수용도 깊고 넓었다. 신라는 김 씨 왕조가 본격적으로 확립되는 눌지왕(재위 417-457) 때에 묵호자가 들어오는 등 불교 승려들과의 접촉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후 왕들의 이름에도 불교적 뉘앙스가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법흥왕 15년(528)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 포교가 자유롭게 공식화되기 전에도 교류가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석불

한반도에 처음 불상이 들어올 때는 휴대와 이동이 가능한 크기의 금동불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식으로 사찰이 건축되고, 대형 불상이 조성되면서 금동, 청동, 나무, 진흙, 석재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을 텐데, 불상을 산에 있는 바위에 새기거나 조각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에서 석불을 보려면 그 특징에 따라 아래와 같은 코스를 제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남산 불상 코스

경주 남산을 소개할 때 한번 다루었지만, 동남산 코스는 산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도 주요한 불상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인 여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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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골의 감실부처(좌), 옥룡암(중), 보리사 여래좌상(우).

먼저 가볼 곳은 ‘할매부처’로 불리는 부처골의 감실부처다. 신라 불상의 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지역이든 불상이 처음 들어와서 제작을 할 때에는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얼굴형을 우선적으로 채택하게 마련이다. 이 감실부처에서 신라인의 얼굴을 읽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동글동글하고, 다정한 모습의 부처를 바위를 파서 감실을 만들고 조성한 형태는 외국의 석굴사원을 참고한 것일 수 있으나, 결국 이런 시도는 석굴암이란 전대미문의 석굴사원으로 귀결된다. 그 발전사를 되짚어간다면 첫 번째 자리에 놓게 되는 불상이다.


옥룡암은 거대한 바위의 사면을 둘러가면 빼곡히 불상을 새겨놓았다. 그 도상이 매우 다양하고, 전체적으로는 사면불 혹은 사방불의 개념을 담고 있고, 후면에는 마애 삼존불과 석불입상이 함께 있어서 석굴사원이 바위 안에 부처를 두는 음각의 기법이라면, 이곳은 부처의 빛을 사면으로 발산하는 양각의 사원을 이루는 구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리사에는 남산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전된 석조여래좌상을 만난다. 석굴암 본존불과 시대적으로는 선후를 다툴 것으로 보이는데 매우 유사한 준수한 얼굴형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미남 부처’라고 하기도 한다. 보리사 입구에서 약간 산길을 오르면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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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암 마애불(좌), 칠불암(중), 칠불암의 삼존불과 사면불(우)

통일전 주차장을 지나 염불사 아래의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40-50분 산행을 하면 칠불암에 도달할 수 있는데, 남산의 야외석불 중 국보로 지정된 삼존불과 사면불을 볼 수 있다. 주변 경관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이 암자에는 해외에서 온 비구니 스님들이 교대로 상주하고 있어서 차를 한 잔 얻어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여기서 15분 더 산을 오르면 새벽일출이 기가 막힌 신선암 마애불이 있다.


삼릉계곡 불상 코스

경주 남산의 삼릉코스는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인데, 산길 옆으로 계속 등장하는 불상들 때문에 매우 특별한 느낌을 준다. 50분 정도의 산행을 하면 상선암에 도착할 수 있는데, 거기서 다시 금오봉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남산의 대표적 마애대불을 보게 되는데, 대략 10개소 정도의 불상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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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 마애대불(좌), 선각 마애삼존불(중), 목없는 부처 좌상(우)

등산로 초입에서 흩어져 있던 불상과 석탑의 파손된 부위들을 먼저 보게 되고, 곧 ‘목 없는 불상’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부터 진행방향 좌측으로 조금 들어가면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하나씩 나온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서너 종이 된다. 조형적으로는 투박한 스타일이라 남산을 찾은 민초들이 저마다 바위 하나씩을 정해 치성을 드렸을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남산 전체가 거대한 사찰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바위에 이런 조각들이 있다.


산행의 중간쯤에서 만날 수 있는 ‘마애선각 삼존불’은 거대한 바위에 부조가 아니라 선각으로 삼존불을 새겨놓았는데, 오랜 세월의 풍화를 겪었겠지만 여전히 선명한 불상을 볼 수 있다. 상당히 균형감과 형태미가 돋보인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접근이 어려운 산기슭 바위 등에도 조각된 불상들이 몇 구 더 보인다. 안내판을 따라 잘 살피면 눈에 들어온다.


상선암에 도달하면 잠시 앉아서 땀을 말리고 쉴 수 있다. 이 암자의 뒤편 위쪽으로 지금은 접근을 할 수 없는 대형 마애불이 있다. 금오봉 쪽으로 계속 오르다 보면 멀리서 볼 수 있는 관찰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머리 부분은 부조로, 몸은 선각으로 되어 있는데 남산일대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불상이다.


삼릉코스를 오르기 전이나 하산한 후에 인근의 ‘배리 삼존불’을 들러 보아도 좋다. 불상은 단독으로 조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삼존불 형태로 나타난다. 중앙의 부처와 좌우의 협시보살상인데, 배리 삼존불은 신라 석불 중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인데, 경주 박물관의 삼화령 삼존불과 비교하며 보면 흥미롭다.


경주 박물관

경주박물관에는 돌부처가 엄청 많다. 불교미술관에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지만, 박물관 마당에 무심하게 전시되어 있는 중에도 석불이 많다. 쓱 둘러보면서 불교미술관으로 가면 좋다. 불교미술관은 로비에 석굴암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보살상의 실물크기 탁본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2.5m를 넘는 크기와 그 세련된 아름다움에 눈길이 절로 간다. 어차피 석굴암 내부는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박물관의 이 탁본 모형이 실제 석굴암의 일부라도 느낌을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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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순교비(좌), 삼화령 삼존불(우)
2025-10-26(85).heic 신라미술관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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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약사여래입상

전시공간 초입에 이차돈 순교비석이 있고, 이어서 인왕상, 돌사자상 등 여러 석조상들을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다양한 금동불을 본 후에 국보인 백률사 청동약사여래상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금동이나 청동불들은 그 내부를 비운 구조로 제작한 것이 흥미롭게 눈에 들어왔다. 부처든 보살이든 핵심은 내면을 비운 존재가 되는 것인 양 느껴졌다. 실제 사람 크기의 약사여래상의 정면도 멋있지만, 나는 후면이 더 울림이 컸다.


경주의 석조 삼존불 중 대표로 꼽힐 삼화령 삼존불을 볼 수 있다. 협시보살상이 마치 아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아기보살이라고도 부른다. 이 삼존불상은 약 4등신 정도의 비례에 동글동글한 외형을 보여주어서 독특한다. 이런 비례는 신라만의 것은 아니지만, 초기 불상의 도래 이후 시도된 다양한 비례 중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매우 성공적인 경우이지 않나 싶다. 석불이 가득한 전시실을 둘러보면 정말 많은 변형의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각자의 미감에 부합하는 석불을 만날 수 있을 터인데, 석불의 미덕은 그것이 꼭 화려함이나 사실적 비례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전시실 한쪽 벽에 경주의 주요한 불상을 영상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매우 볼 만했다. 박물관 바깥에 경주의 주요 불상이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1-2층 전시실을 이동하는 계단 중간단에 박물관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휴식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석조반가사유상이 하나 있다. 목부위 아래만 남아있는 파손된 형태이긴 하지만, 상당히 잘 만들어진 조각임을 알아볼 수 있는 석상이다. 반가사유상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한다.


석굴암

석굴암은 신라의, 아니 우리나라의 불상을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다. 본존불은 한국 불상의 이상적 원형을 제공한다. 한국사람이 불상이라고 할 때 자동으로 상상하게 되는, 그 형태, 자세, 얼굴표정, 전체적 느낌은 석굴암 본존불을 모델로 한다. 본존불을 둘러싼 부조들은 10대 제자상, 십일면관음보살상, 문수보살, 제석천, 보현보살, 범천 등이며, 머리 부분의 작은 석실들에도 보살상이 8개 들어가 있다. 본존불이 있는 주실만 아니라 통로를 거쳐 전실로 오면 여기에도 둘러싼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중상 등이 있다. 키가 2m 넘는 입상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석굴암 자체 만으로도 너무나 풍성한 석조불상의 향연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유리로 가려진 상태로 관람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내부의 이 놀라운 작품 대부분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국보24석굴암본존5 [사진제공(촬영자)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JPG 석굴암 본존불 [사진: 경주시]


그 외

경주 인근의 몇몇 산에는 유명한 불상군이 있다.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별도의 일정을 짜야한다. 경주 건천의 단석산 신선사에 유명한 마애불상군이 있다. 거대한 ㄷ자 모양 바위에 미륵삼존불을 비롯 10 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김유신의 수련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화랑과 미륵신앙의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태종무열왕릉 뒤편의 선도산 정상부에도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곳은 신라초기 창건과 관련된 성모신화가 있는 산인데, 거대한 삼존불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감포 쪽에 무예 재현과 템플스테이로 많이 알려진 골굴사는 거대한 바위산 곳곳에 굴을 파고 기도처를 만들어 둔 곳인데, 바위산과 어울리는 대형 마애불상을 볼 수 있다. 경주 남산의 남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열암곡 마애불상은 거대한 바위에 조성된 불상이 어떤 연유로 앞으로 넘어져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지면과 충돌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2025-10-27(174).heic 열암곡 불상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의 핫 플레이스인 ‘사유의 방’에는 국보 78호와 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 반가사유상은 일찍이 인도와 중국에서도 만들어진 바 있는데, 석가모니의 태자시절을 묘사하는 것이거나,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반가사유상 40여 개는 대부분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는데, 주로 7세기에 제작되었고, 8세기 이후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국보 78호와 83호도 그 출처를 신라로 보는데, 83호와 유사한 일본의 국보 목조반가사유상도 신라가 일본에 선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한다.

2025-10-26(12).jpg 경주박물관 석조반가사유상

신라에 반가사유상이 깊이 연결된다고 보는 정황은 여러 가지다. 원효가 <대승기신론소>에서 선(선) 수행을 위한 자세로 반가부좌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어서, 원효와의 관련성도 생각할 수 있다. <원효의 마음공부>를 쓴 강기진은 원효로 대표되는 재가불자를 중시하는 신앙 노선이 신라의 반가사유상 트렌드와 연관되는 것으로 본다. 그는 반가사유상을 '금강삼매상'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했다.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 후에 도솔천에 있던 미륵보살이 나타나 성불(成佛)하고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번 설법을 할 것이란 내용이 미륵신앙의 핵심인데, 신라에서는 이것이 화랑과 연결고리가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유신을 따르는 화랑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미륵신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3세기 경부터 미륵보살상이 점차 여성화되는 경향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신라에 와서는 선덕여왕을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며 초상조각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신라 바깥에서는 백제 지역인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이 중요하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본존불 옆에 협시보살 중 하나가 반가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삼존불은 세계적으로도 그 사례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양상이 단석산 마애불상군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도 다른 보살들이 손으로 반가사유보살상을 가리키는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장소가 화랑들의 수련공간으로 알려진 것은 반가사유상과 미륵신앙이 신라에 특별한 의미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경주 박물관에 있는 석조반가사유상과 신라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다른 다수의 반가상의 존재까지 감안하면 경주와 반가사유상은 매우 특별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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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좌협시보살상(반가사유상)[국가유산청].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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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좌)과 미륵반가사유상(상우), 단석산 마애불상군(하좌)과 미륵반가사유상(하우) [사진: 국가유산청]



참고서적

강기진 지음, <원효의 마음공부> (유노북스, 2026).

배재호 지음, <한국의 불상: 고구려, 백제, 신라 편> (경인문화사, 2023).

최성은 지음(안장헌 사진),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최완수 지음,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대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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