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은 꽃미남 엄친아였을까?”

[딮 다이브 07] 화랑

by Harry Yang

묘한 기록들

‘미모의 남자를 골라 단장하고 꾸며서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되었다. 낭도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혹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며, 산과 강을 찾아 노닐어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37년)


몇몇 지인들과 6개월간 매주 한 번씩 만나 <삼국사기>를 읽었는데, 막연히 듣기만 했던 여러 가지 전설 같던 역사 이야기가 실제 사서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삼국사기>에 ‘화랑’은 꽤 비중이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신라본기’의 역사 서술에도 중요한 내용으로 언급되고 있고, ‘열전’ 편에 등장하는 삼국의 주요 인물들 중 화랑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왜 남자 청소년들 중 다른 자질이 아니라 굳이 ‘미모’에 뛰어난 이를 뽑아, ‘꾸미고 단장’했을까? 결과적으로 꽃미남이 뽑힐 수는 있다지만, 그걸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국가 편찬 역사서에서 이렇게 버젓이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싶었다. ‘도의를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며’, ‘산과 강을 찾아 노닐었는데, 멀리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었’ 던 이들의 정확한 정체가 무엇일까?

화랑이 등장하는 드라마들. <선덕여왕>(좌), <화랑>(우).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로 가끔씩 등장을 했던 주제였겠으나, 요즘에는 전 세계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휘어잡고 있는 한류(K-Wave)를 설명하기 위한 연구나 학술적 토론의 장에서 심심찮게 한국의 흥과 에너지의 원류를 이루는 기원이라며 불려 나오는 것이 ‘화랑’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핵심적 요소가 위의 인용문에 다 나온다. 미모, 화장, 우정, 음악, 유람, 여행… 매우 현대적인 항목들이다. 살다 보니 경주가 K-POP 공연을 상시로 유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류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지자체의 욕망은 너무나 선명해서 숨길 수가 없다. 여기서는 ‘화랑’과 관련된 전후좌우의 맥락을 살펴보고, 경주에서 이 주제로 탐험을 해 본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디를 가볼 수 있을지 제안해 보려고 한다.

화랑정신의 전개

그간 화랑 이야기는 20세기에 한반도에 벌어진 두 가지 시대적 요청을 배경으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의 극복이다. <삼국사기>에서 화랑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김동리의 맏형이자 경주가 낳은 구한말 최고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김범부 선생이 생전에 출간한 유일한 책이 <화랑외사(花郎外史)>인데, 여기서 화랑이야 말로 한국적 사상의 최고 요체에 부합하는 이상적 인간형으로 그려진다. 김범부 선생은 일제로부터 갓 해방된 나라에 필요한 것은 ‘국민윤리’라며 그 ‘나라 세우기’의 내용으로 화랑이란 인간형이 보여주는 미덕을 제시했다. 이런 맥락은 이후 ‘국민교육헌장’ 등의 국가주의적 교육 이념이 등장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김범부 선생은 한국전쟁 기간에 부산에서 출마해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서 교육 분야 등에서 활동하였고, 박정희와의 친분으로 5.16 쿠데타 이후 조직된 ‘5.16 동지회’의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사회적 활동에 대한 차분한 평가가 필요하다.)


둘째는 분단시대의 극복이다. 문교부 장관과 성균관대, 영남대, 동국대 총장을 지낸 리선근 교수는 자신의 저술 <화랑도와 삼국통일>에서 한국전쟁 이후 남북의 통일을 감당할 젊은 세대의 방향성을 삼국통일을 이룬 화랑들에게서 찾아보자는 취지를 내세웠다. 박정희 정권 차원에서 화랑 담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는데, 나라에 충성하며 임전무퇴의 상무 정신으로 남북통일을 이룰 이상적 인간형에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김유신 장군이 부각되는 것은 그런 시대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사례 모두 국가를 우위에 놓는 집단주의적 경향이 있다 보니, 오늘의 관점에서는 화랑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짙게 깔린 구시대적 발상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반면에 최근의 한류와 더불어 등장하는 담론에서는 거리낌 없는 개인의 개성 분출, 문화예술적 창의성의 폭발 같은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는 차이가 있다. 화랑 논의의 전개 양상을 보면 인류 보편의 가치를 향한 감수성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생각한다. 화랑이 때로는 히틀러 치하의 청소년 동원조직인 유겐트인가 싶다가,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는 보이스카웃 같은 것인가 생각도 하게 마련인데, 이런 여러 흐름들을 담아내며 새롭게 화랑 논의가 재정돈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21세기 초반의 세계에 20세기 중반쯤에나 유통되던 내용을 강변하는 시대착오 양상이 벌어질 수 있다. 더 나은 방법은 당연히 천 년 전 신라에서 우리가 새롭게 끌어올 교훈과 통찰은 없는 것인지 새겨보는 시도일 것이다.

화랑의 역사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화랑에 대해 언급할 때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인용하며,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겨났다”라고 했다. 화랑은 뛰어난 인재 육성과 발탁을 위한 제도였다는 이야기다. 신라사회의 10대 중반에서 10대 후반까지 나이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사회조직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공동생활을 하며 심신을 연마하여 호연지기를 길렀고, 진골과 4-6두품 출신들이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리고, 그중에서 리더가 되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천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화랑들은 화백회의에 참가자격을 갖고 있는 진골 귀족과 육부의 자제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전쟁이 벌어지면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는 사례도 자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화랑 제도는 진흥왕 37년에 미모의 두 여성을 낭도의 우두머리로 세우려고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었다가, 문제가 생겨 이를 폐지하고 화랑으로 전환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화랑 사다함 같은 경우는 진흥왕 재임기의 더 이른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나오고 있어서, 대략 진흥왕 시대에 화랑 제도가 공식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신라 초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 9년)에는 한가위 한 달 전부터 왕녀 두 사람을 세워 육부의 여성들을 둘로 나누어서 길쌈 대결을 시켰다. 한가위가 되어 승부를 가려서 패자는 승자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고,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노래와 춤을 즐기는 가배(嘉俳, 한가위) 행사가 있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있었던 일월(日月)과 관련된 축제 전통이 진흥왕이 두 여성을 세워서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풍월도(風月道)’와 관련이 있지 않았겠는가(<삼국유사> 미시랑 진자사조) 추측해 볼 수 있다.


화랑과 관련한 가장 유명한 언급은 역시 <삼국사기>에서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을 언급하며 “나라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름하여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가르침을 창설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실로 세 가지 가르침을 포함해(包含三敎) 뭇 중생을 교화하는 것(接化群生)이다. 말하자면 집에 들어와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같은 것은 노(魯) 사구(司寇, 즉 공자)의 가르침이요, 아무런 작위적 일이 없는 가운데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주(周) 주사(柱史, 즉 노자)의 근본 뜻이며, 모든 악행을 짓지 않고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동하는 것은 축건(竺乾) 태자(즉 석가)의 교화인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다.


요약하면 화랑이 따른 것은 ‘풍류’라 불리는 ‘현묘한 도’였다는 것, 그것은 ‘유불선의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이며, 이는 ‘뭇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이라는 평가다. 이런 내용은 화랑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청해서 얻었다는 ‘세속오계(世俗五戒)’ (사군이충 (事君以忠), 사친이효 (事親以孝), 교우이신 (交友以信), 임전무퇴 (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를 통해서나, 두 명의 낭도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자신을 수련하겠다는 다짐을 돌비석에 새겼던 ‘임신서기석’의 발견을 통해 실제로 확인된다. 그리고, 화랑의 무리들 안에는 불교 승려가 선생이나 낭도로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화랑은 미륵의 이상과 연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김유신을 따랐던 낭도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는데, 이는 곧 ‘미륵을 따르는 이들’이란 의미였고, 김유신이 수련했다고 알려진 단석산 바위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고, 바로 인근에 신선사(神仙寺)가 있는 것도 당시 미륵을 신선이라고 종종 불렀던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화랑이 단순한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한 제도만 아니라 종교사상적 운동 차원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단석산 마애불. 미륵불을 중심으로 10여기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도 화랑 혹은 이와 비슷한 명칭이 있는데 선랑(仙郞)-국선(國仙) 등으로 불렸고, 주로 팔관회 같은 국가적 제례나 행사에서 역할을 했다. 이 무렵은 이미 국가 엘리트 선발은 과거제도를 활용했기 때문에 선랑이나 국선 등은 도교적 분위기를 따라 제의적 역할을 하는 미남자 정도로 역할이 축소된 인상이 있다. 이후로 화랑이 종종 무당, 도사 등의 계열로 간주되면서 사회의 주류에서 이탈하는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화랑은 역사 내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를 겪는다. 우리의 관심사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시대 화랑의 역사와 의미를 잘 새겨보고, 경주여행에서 이를 어떻게 시도해 볼 수 있을까 상상해 보는 작업이다.


가장 최근에는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1989년, 1995년 발견) 관련 논란이 학계에 크게 있었다. 이 책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아닌가 하는 기대였다. 제1대 풍월주부터 시작해서 화랑의 계보 전체를 담고 있고, 화랑들의 은밀한 개인사 등이 상세히 나와있는 파격적 내용이었는데,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역할 등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상상력의 산실이 되었다. 현재 학계 전반적으로는 이 책을 박창화 선생의 창작 한문소설로 간주하는 입장이 강한데, 서강대의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 주해본을 출간하면서 관련 연구를 지속하고 있고, 문화부 기자 출신인 김태식 선생이 박사논문으로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를 내어놓은 상태로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은 상태다.


화랑들

다양한 화랑들의 일대기를 훑어보는 것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열전,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화랑들의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화랑외사>처럼 이를 모아서 별도의 책으로 묶은 경우도 있기에 화랑의 이야기는 다양한 경로로 접할 수 있다. 주요한 몇몇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


첫째, 사다함이다. 그는 내물왕 7 세손인 진골 귀족 출신으로 진흥왕 시대에 가장 대표적인 화랑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의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화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가 1,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15-16세의 나이에 신라가 가야국과 전쟁에 나갈 때 종군 요청을 하여 어렵게 허락을 받아내고서 선봉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왕이 내려준 300명의 가야국 포로를 다 해방시켜 주고, 왕이 내린 밭도 사양하고 오직 불모지를 개간하였다. 그는 벗 무관랑이 병사하자 이를 슬퍼하다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나이가 17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화랑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내용인데, 곱씹어볼 대목이 여럿이다. 오랜동안 문학적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사랑받았었다.


둘째, 가장 유명한 화랑 김유신이다. 그의 집안은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데, 조부 김무력이 진흥왕의 정복전쟁에 크게 역할을 한 장수였고, 아버지 김서현은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명부인과 도주하여 유신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그를 따르는 이들을 용화향도라 불렀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여러 산천에서 수련했는데, 오늘날 대구의 팔공산 동굴, 경주 건천의 단석산 등이 그 흔적이 있는 곳으로 꼽힌다.


선덕여왕 시절 김춘추가 고구려의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 떠날 때 목숨을 걸고 지켜줄 것을 피로 맹세했고, 그가 정한 시한 내에 돌아오지 못하자 군사 삼천 명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가려는 시도를 해 그의 무사귀환을 이루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와 결혼시켰고, 자신은 김춘추의 딸과 결혼해서 혼인동맹을 굳건히 했다. 그는 진평-선덕-진덕-무열-문무 등 여러 왕에 걸쳐 나라를 지키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일에 핵심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의 무덤은 십이지신상을 두른 독특한 형태의 묘로 경주 선도산 인근에 있고, 말을 타고 북쪽을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동상이 황성공원 내에 세워져 있다.

황성공원 내에 있는 김유신장군 동상(상), 김유신장군묘와 비석(하)


그의 일대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3편에 걸쳐 실려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인물도 받지 못한 특별대우이다. 단재 신채호가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비판하며 함께 신랄하게 평가절하한 대표적 인물이 김유신인데, 과연 그런 평가가 정당했는지 김춘추와 더불어 김유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천관녀와의 인연을 매몰차게 끊어낸 ‘말의 목을 친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녀를 기억하는 천관사 터(天官寺址)가 교촌과 남산 사이에 있다. 쉴 새 없는 전쟁 출정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가도 집에 들르지 못하고 다시 싸우러 나가는 길에 자기 집의 우물 맛을 보고 마음을 달랬다는 전설을 확인할 수 있는 우물 재매정(財買井)도 남아있다. 그를 모셨던 사당이 서원으로 남아있는데, 무신인 김유신을 배향한 것이 논란이 되자 설총과 최치원을 함께 모신 서악서원이 그곳이다.


셋째,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 집안이다. 김춘추와 그의 아들 김인문이 모두 화랑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서악마을의 태종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4기의 고분, 선도산 초입의 산자락에 조성된 진흥왕과 진지왕의 고분 등 무열계 고분이 서악 일대에 빽빽하게 모여있다. 화랑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절의 왕릉과 귀족들의 고분 사이를 걸으면서 그들의 일대기를 상기할 수 있다. 선도산 일대는 선도성모 설화와 더불어 신라의 기원에 대해 정사와는 다른 야사를 품고 있는데, 무열계 고분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이들이 신라의 주축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한 느낌이 강하다. 화랑의 자취를 훑으려면 서악의 선도산을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하다.

태종무열왕릉 뒤편의 고분군(좌) [사진: 신라문화원], 태종무열왕릉비 귀부(우).

넷째, 산재된 자료와 기록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가능하다. 향가 전통에는 찬기파랑가, 모죽지랑가 등 화랑의 덕과 풍모를 높이는 시들이 있다. 향가와 시, 화랑들의 여러 이야기를 그 배경이 되는 장소에 방문하여 낭송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경주 박물관에서는 화랑들의 학습계획과 결의를 담은 임신서기석을 볼 수 있다. 경주에는 교육시설로 70년대에 만들어져 청소년 교육공간으로 활용했던 화랑교육원이 동남산 지역에 있고, 대형 강당, 화랑 전시실, 청소년 수련시설을 포함하고 있는 화랑마을이 동국대 경주분교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화랑의 정신과 심신수련 활동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지금도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간단한 체험 활동 외에는 충분히 자리를 잡고 있는 프로그램은 아직 없어 보인다. 경주가 아닌 어느 곳에서 화랑되기를 시도해 볼 수 있을까? 기념관이 아니라 운동이 필요한 것일텐데, 진지한 접근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참고자료

박남수, <신라의 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 2013).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1997).

리선근, <화랑도와 삼국통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1999).

김범부, <화랑외사> (이문출판사, 1981). 해군정훈감실 1950, 중간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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