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09] 동리와 목월
최초의 한문소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경주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가만히 새기다 보면, 경주는 원래부터 이야기와 노래가 풍성했던 곳임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신라 초부터 한가위 가배 행사에서 노래와 춤으로 축제를 벌인 전통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고, 뛰어난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노래가 시로 이어지고, 이야기가 소설로 이어진다면, 경주의 문학적 자원은 가히 대한민국 최고 역사와 최대 규모를 갖고 있다고 자부할 만하다.
한국전쟁 후에 청마 유치환 선생이 경주고등학교의 교장(1955-1959)을 지낸 적이 있다. 이때 그는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이 되면서 전국에서 작가, 예술인들이 그를 찾아 종종 경주에 들렀다. 그때마다 그는 쪽샘의 대폿집으로 지인들을 몰고 가서 경주박물관장이던 수묵 진홍섭, 마지막 신라인이라 불리던 고청 윤경렬을 비롯한 경주의 문인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경주를 방문한 여러 문인들과의 취중 소동 에피소드는 지역 내에서 꾸준히 회자되어 온다.
이와는 별개로 경주 출신으로 경주를 자신의 작품 세계에 깊이 반영한 경우도 있는데, 나는 여기서 한국의 대표적 작가 두 사람에 주목하고자 한다. 김동리와 박목월이다. 나는 이미 이 두 사람에 대해 각각 글을 쓴 바가 있다. (브런치 북 <모던 경주 1860-1945>에 박목월 편 “북에 소월, 남에 목월”, 김동리 편 “한국 근대문학의 괴물 소설가”를 참고하라.) 이번 글에서는 둘을 동시에 비교하면서 경주에서 이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여행을 어떻게 구상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도록 한다.
경주는 외부인에게는 화려한 관광지이고, 역사 유물이 많은 문화도시이겠으나, 정작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여느 지방의 중소도시와 다름이 없는 한계와 제약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젊어서 일찍 고향을 떠나는 것이 그의 영민함과 가능성의 표지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고, 나이가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 곳보다 깊은 충만감을 제공할 수 있는 곳도 경주일 것이다. 고향을 떠난 자와 고향에 남은 자가 제각각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양갈래의 감정은 쉽게 조화하기 힘들다. 그러나,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는 무던하게 만나는 지점이 넓어진다. 인생을 넓고 여유롭게 볼 지혜가 생겨날 즈음이면 우리를 길러낸 경주란 땅에 축적된 사연을 해석하는 안목과 감각도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아마도 내다보며 생각한 것과 돌아보며 얻게 된 것을 반복재현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넓히는 매우 요긴한 도구일 것이다.
경주시 성건동에서 태어난 동리 김시종(1913-1995)은 집안에서 훗날 미당 서정주가 ‘하늘 아래 제일로 밝던 머리’라 추모한 맏형 범부 김정설과 열여섯 살 차이가 나는 막내였다. 범부가 일찍부터 지역에서 불령선인으로 찍힌 탓에 동리는 경주에서 늘 감시받고, 주목받는 느낌, 무언가 충분히 발휘하고 표현하며 살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음을 토로했다. 그는 경주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중학 4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났다. 대신 그의 맏형이자 사실상 아버지의 노릇을 한 범부의 방대한 서가에서 폭식하듯 책을 먹어치우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 갔다. 그는 1934년 시 ‘백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필두로, 1935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1936년에는 <동아일보>에 소설 ‘산화’가 당선되면서 해마다 하나씩 신춘문예를 거머쥐며 그랜드슬램을 이루었다. 20대 초반에 무서운 기세로 등장한 신진작가였다.
목월 박영종(1915-1978)은 동리보다 3살 아래였다. 경주군 서면에서 태어나 건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대구의 계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인 1933년 동시가 당선되면서 ‘동요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19세부터 경주 수리조합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 그의 눈앞에는 김동리의 신춘문예 3관왕 제패란 대사건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향에 비슷한 세대로 교류를 하면서 동경과 선망이 교차했을 것인데, 목월 역시 오래지 않아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시인 정지용의 추천사,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 요적 수사(謠的 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조선 시다”는 극찬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그는 경주에서 외로웠다. 그는 반월성으로, 불국사로 온 사방을 다 쏘다니면서도 외로웠다. 1942년 봄 후배 시인 조지훈의 편지를 받고선 그를 경주로 초청해 보름을 함께 숙식을 하며 온 경주를 휘젓고 다닌 일은 문단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전해진다. 그 둘은 서로 상대를 위해 ‘완화삼’, ‘나그네’ 등의 시를 쓰고, 답시를 보내며 애정을 과시했는데, 목월이 26세, 지훈이 22세였던 시절이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목월의 초기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구름, 달, 저녁놀, 산그늘, 길 등은 그가 경주의 산천에서 늘 느껴왔던 쓸쓸하고 외로운 감성을 머금고 있다. 이 시인과 소설가는 20대 초반에 놀라운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며 등장한 혜성 같은 존재였지만, 그들에게 경주는 폐허였거나 강렬한 외로움에 사로잡혔던 ‘결핍의 공간’이었다. 인정욕구와 성취동기가 들끓었던 젊은 작가들에게 경주는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결해야 했고, 넘어서야 했고, 정주하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 오롯이 이들의 문학에 도약대로 기능할 것인지 그때는 미처 다 알지 못했겠지만, 그들은 불화하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갔고, 긴 시간에 걸쳐 그 쟁투가 빚어낸 결과를 우리는 그들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과 소설가는 기독교를 가운데 놓고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동리는 어머니가 당시 경주에 갓 시작된 최초의 개신교회였던 경주제일교회에 출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리의 학교 교육도 경주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와 대구의 대표적 개신교 사학 계성학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집안의 분위기는 엄격한 유교적 가부장 가정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맏형 김범부는 당대에 첫 손에 꼽힐 불교학자이자 동양학자였으니, 전통사상에 매우 친화적인 환경이었을 것이다. 동리는 범부의 서가에서 서양철학 서적도 접했으므로, 서양문명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와 동양의 사상, 특히 샤머니즘과의 충돌 양상을 가정 안팎으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리의 성건동 생가는 ‘읍성의 서쪽 동네’로 형산강변이고, 조금만 가면 <무녀도>의 주무대가 되는 애기청소에 닿는다. 애기청소는 북천과 서천이 만나 소를 이루는 위험한 곳으로 종종 아이들이나 신원을 비관한 이들이 빠져 죽기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무당들이 소 바로 앞까지 물 빠진 모래펄을 걸어가 굿을 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동리의 <무녀도>에 등장하는 개신교 신자 아들과 무당인 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아마도 그가 경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문명 간의 충돌 현상이었을 것이다.
동리의 <무녀도>는 여러 번 개작되는데, 초판에는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대목이나, 이를 ‘동정녀 수태’로 강변하는 대목이나, 아들을 살인자로 묘사하는 등의 강렬한 설정으로 무당인 어머니를 막다른 한쪽 끝으로 몰아가고, 그 반대편에는 이 어머니와 완전히 극단적으로 상반된 서양과 근대와 문명을 상징하는 개신교가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개작을 통해 과도한 대립으로 설정했던 장치를 많이 걷어내고 훨씬 온건해지되, 개신교와 샤머니즘이 대립하는 방식은 더 깊어졌고, 이를 관찰하거나 방관하는 주변사람들의 태도를 의식하며 작품의 구도를 복합적으로 만들어간다. 이 작품은 후에 장편소설 <을화>로 발전하게 되었고, 동서양의 대결이란 구도는 일찍부터 서양인들의 주목을 끌었던 매력적인 주제였기에 동리의 작품은 해외에 널리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목월은 훨씬 개신교 친화적이다. 그 가족들이나 목월 모두 일찍부터 경주의 개신교회에 나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역시 대구의 개신교 사학 계성학교 출신이다. 그는 ‘청록파’의 이름으로 조지훈, 박두진 등과 동인활동을 하던 시기에는 간결한 운율과 회화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시어로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고 나서 일상생활의 질박한 감각이 묻어나는 생활시를 많이 선보이는 시절과 토속적 언어를 재발굴하며 전면적으로 활용하는 시들도 많이 보이는 등 변천을 보이는데, 후기로 가면서 그는 개신교 신자로 성실하게 신앙생활하며 신앙시를 많이 썼다. 그의 마지막 시집이 유고시집으로 신앙시를 담은 <크고 부드러운 손>이다. 그에게서 개신교 신앙과 시세계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거나 갈등하는 양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신앙은 잘 소화되어 그의 시어와 생활감각 아래편에 촘촘히 깔린 듯한 인상을 준다. 목월의 개신교 신앙을 전제하고 그의 초기 시를 다시 읽어보면, 동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궤적의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느낄 수 있다.
이 시인과 소설가를 위한 공간이 경주에 마련되어 있다. 불국사 정문 바로 맞은편에 동리목월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각각을 소개하는 전시실이 있고, 생애와 작품에 대한 설명과 여러 유품과 자료를 볼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새롭게 건축예정인 시립도서관에 경주를 대표하는 이 작가들의 작품을 잘 갖춘 서가와 특별 공간이 꼭 생기면 좋겠다. 경주의 대표적 문인 두 사람의 책과 자료는 접근하기 좋은 곳에 제공되어야 꾸준히 지역 내에서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동리의 생가는 현재 해당 자리에 표지판만 남아 있고, 그 터에는 일반 주택이 지어져 있다. 거기서 가까운 강변도로변에 동리문학 비와 관련 장소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주요한 문학 작품 속의 공간을 찾아가며 작품 속의 묘사와 의미를 새겨보는 투어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목월의 생가는 건천읍에 복원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입구에 실물 크기 동상도 보기 좋게 마련되어 있다. 동시 ‘얼룩송아지’를 새긴 노래비가 경주 출신 시인들의 시비를 모아놓은 황성공원에 가장 먼저 세워졌고, 보문단지 순환도로에도 그의 시 ‘달’을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을 요즘은 접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의 시와 소설이 다시 읽히고, 그들의 문장과 문제의식이 새로운 시대의 독자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경주에서 이들과 인상적인 만남을 시작할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