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

[딮 다이브 10] 경주 최부자집

by Harry Yang

시간의 검증

역사에서 거대한 격변이 일어날 때, 두 시대를 다 견뎌내는 것은 대체로 가능하지 않다. 한국 역사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던 시절을 다 버티고 살아남은 제도나 문화는 매우 드물다. 한 시대에는 유효했겠으나, 다음 시대에는 퇴물이 되게 마련이고, 한 때 아름다웠던 것이 다음 세대에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시간의 검증을 견뎌내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 세월을 거치면서 인정된 것에 우리는 예의를 갖추고 경의를 표한다.


경주의 많은 유물과 역사적 사건들은 주로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약 천 년에 걸친 역사적 무게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전환기는 아니었으므로, 그 시대에 대한 평가와 다른 시대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내가 흥미롭게 주목하는 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던 시절, 즉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의 경주이다.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때 일어난 변화는 지금까지도 경주의 도시 계획과 도시 브랜드에 깊게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란 외세의 힘으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그 이전의 전통은 이 시기에 완전히 단절되기도 했기에 일제강점기의 근대화는 어느 정도 단절적인 사건이 되고 만다.

‘경주 최부자’라고 종종 불리는 한 집안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가문의 기원은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 마지막 공적 활동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시기로 보면 전근대와 근대를 거쳐 한국 현대사의 초입까지 의미 있는 존재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아마 국내에서 이 정도의 인지도와 역사적 위상을 가졌던 가문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경주 최부자집을 살펴보도록 한다.


최부자집 내력

명칭이 ‘최부자집’이라니, 얼마나 부자였기에 그렇게 불렸을까 궁금했다. 흔히 이 집안을 12대 만석꾼이라 한다. 당시 많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들은 농민들에게 소작을 맡겼고, 그 생산량의 일정 비율을 소작료로 받았다. 즉, 소작인들과 중간관리자인 마름이 떼가는 것을 다 제외하고 소작료로 받은 수익이 만 석이었다는 뜻이므로, 실제 생산량은 그 보다 훨씬 컸다는 의미다.


간략히 계산해 보면, 논 1 마지기(지역에 따라 150-200평) 당 한 석, 혹은 한 섬(약 100kg, * 도정 전후인가에 따라 한 섬의 양은 차이가 있으나 계산상 편의를 위해 100kg으로 정해보자)을 받았다면 소유한 농지를 10,000 마지기 즉, 150만-200만 평으로 추산할 수 있다. 쌀 수입은 한 해 최소 1,000톤이라고 볼 수 있다. 구한말에 만석꾼 소리를 듣는 이들은 전국에 수십 명 수준에 불과했는데, 호남의 대지주이자 경성방직 등으로 최초의 근대적 산업 자본가가 된 김성수 집안의 토지가 1930년대에 13,000 마지기 규모였다고 알려진다. 최부자집의 재산 규모가 전국구급 토지재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재산을 12대를 이어온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부자집의 전통은 최진립(潛窩 崔震立, 1568-1636)에서 시작된다. 25세에 임진왜란을 만나자 의병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고, 이후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어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병사를 일으켜 왕이 피신했던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용인에서 전사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서 되었다. 그를 기념하는 비와 그의 위패를 모신 용산서원이 경주 남산 서남쪽의 내남면에 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 참여한 두 명의 노비가 같이 사망한 것을 보고, 이들의 충절을 기억하기 위해 최진립의 제사와 함께 제를 지내고 있다.


3대 최국선(1631-1682)의 시기에 황무지 개간과 이앙법 도입 등으로 만석꾼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데, 그는 이때 부잣집을 습격하는 도적떼인 명화적(明火賊)의 난리를 겪으면서 심지어 자신의 소작인들도 그 무리에 끼어있는 경우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집안에서 충노(忠奴)의 제사를 함께 지내기까지 했다지만, 가난한 소작인들의 상황은 또 다른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없애고, 소작농들과 수익을 반반으로 나누는 반분제를 도입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소작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그의 재산은 만석꾼의 수준으로 올라섰고, 이후 10대를 유지하게 된다. 초기 최진립으로 그 역사를 소급해서 말하기 시작하면서 최부자집을 12대 만석꾼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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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집 편액들 용암고택(좌), 대우헌(중), 둔차(우)

최부자집은 원래 내남 지역에서 큰 재산을 일구고 거기에 기반이 있었는데, 7대 최언경(1743-1804) 시절인 1779년에 지금의 교촌으로 들어오게 된다. 향교 바로 뒤에 집을 지었는데 지역 내 큰 부자의 교촌 진입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집터를 낮추고, 집의 높이도 향교보다 아래로 두는 등의 노력으로 지역민들의 반발을 무마하며 교촌 일대에 큰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 최부자집의 사랑채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선대 최부자들의 호를 담고 있다. 9대 최세린(1791-1846)의 호를 딴 ‘대우헌(大愚軒)’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 사는 집’이란 뜻이고, 11대 최현식(1854-1928)은 자신의 호 ‘둔차(鈍次)’ 즉 ‘둔해서 2등 하는 사람’이란 의미의 현판을 달아놓았다. 그의 아버지 10대 최만희(1832-1879)의 호는 ‘둔와(鈍窩)’인데 ‘움집에 사는 둔한 사람’이란 의미다. 부잣집의 어른들이 줄줄이 이런 호를 갖고 있는 것은 매우 독특한데, 자세를 낮추고, 겸손히 주변을 살피는 자세가 가풍으로 이어온 것이 분명하다.


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

최부자집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이 집안의 독특한 가훈(家訓)에서 비롯되었다. 육훈(六訓)이라 불리는 가훈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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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집 사랑채(좌), 마루(중), 곡간(우) [사진: 국가유산청]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하지 말라

과거시험의 소과를 통과하면 ‘진사’이다. 중앙 관료로 나아가는 길인 대과에 응시하지 말란 말이다. 양반 집안으로서 최소한의 공부는 하더라도 벼슬길에 나서기를 선택하지 말라는 경계이다. 이는 부와 권력을 동시에 추구하지 말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준엄한 교훈이다. 조선시대에 가훈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막는 집이 얼마나 있었을까? 이것이 만 석 재산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의 지혜였을까, 아니면 당시 중앙의 권력 쟁투가 그만큼 살벌했기에 경계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가훈의 첫머리로 출세나 벼슬을 경계했던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둘째, 만 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10대에 걸쳐 만 석의 재산을 유지한 비결 중 하나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일 텐데, 이들은 자신들의 부의 상한선을 설정했다는 말이다. 그를 넘어서서 더 큰 부를 얻고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지역과 소작농민들에게 수리시설을 정비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환원을 했다고 한다.


셋째,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

흉년이 들면 농민들의 삶이 궁핍해져서 싸게 땅을 팔게 되고, 부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불릴 최적의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땅을 넓혀가지 말라는 말이다. 가장 자본주의적 원리에 부합할 것 같은 상황을 착취의 기회로 활용하지 말도록 경계했다. 최부자집에서는 흉년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주고 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넷째,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 후기에는 객주나 여관이 있었으나 지방에는 미비한 경우가 많았다. 경주를 찾는 과객들은 으레 최부자집에 들러 방을 청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최부자집은 이런 관행을 아예 가훈으로 만들 정도로 손님 접대에 적극적이었다. 기록에는 하루에 200명의 과객이 찾았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니, 이들을 재우고, 먹이는 일이 큰 일이었을 것이다. 최부자집 광 앞에 있는 뒤주에는 집에 방이 없을 경우에는 손님이 쌀을 한 줌 집어서 옆집으로 가면 그 쌀로 밥을 해주고, 하루 재워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이런 연고로 최부자집은 전국방방 곡곡의 돌아가는 사정을 소상히 전해 듣고, 여러 가지 시류를 판단하는데 도움도 되었을 것이다. 경주를 찾는 유력한 이들도 최부자집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경우가 많았다.


다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백 리는 40km이다. 경주 인근 지역에서 굶주리는 이들은 최부자집의 긴급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굶는 이들을 위해 죽을 끓이는 솥을 걸어놓았었다고 한다. 부자의 사회적 책임이란 차원에서 돋보이는 가훈이 아닐 수 없다.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며느리가 부잣집에 시집왔다며 사치하는 일이 없도록 3년간은 가풍을 익히도록 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부자가 남을 위해 돈을 쓸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쓰는 데에 있어서 절제의 윤리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시대적 변동이 없었다면 어느 부잣집의 미담으로 끝날 수 있었을 최부자집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큰 부침을 겪는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내가 쓴 "최부자집의 독립운동"을 참고하라) 마지막 최부자로 불리는 문파 최준(汶坡 崔浚, 1884-1970)은 일찍부터 사촌누님과 결혼한 고헌 박상진(固軒 朴尙鎭, 1884-1921)과 교류를 해왔는데, 그는 1910년대 경상도를 배경으로 한 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관련 내용은 내가 쓴 “풍운아 박상진”을 참고하라.) 그는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판사 임용이 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로, 경주와 대구에서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이끌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였던 경주의 세금을 털었던 ‘아화 우편마차 강도사건’에도 이 둘이 직접 연루가 되어있었다고 알려진다. 박상진은 1915년 ‘광복회’를 구성해서 총사령이 되었는데, 재무부장이 최준이었고, 부사령이 김좌진이었고, 조직은 국내와 만주까지 아우르는 규모였다. 그는 무장강도, 친일파 처단 등의 무력투쟁 노선에 있었는데, 1918년 일제 경찰에 쫓기다가 생모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경주의 집을 찾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사형을 당한다. 36세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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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 박상진(좌), 문파 최준(우)

최준은 부산의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와 깊이 활동했다. 백산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국내의 재정지원을 감당하기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어 무역자금 형태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려고 했다. 그는 최준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고, 결국 최준은 1919년 백산상회의 핵심 자금원이자 사장으로 참여한다. 백산상회는 국내외에 다수의 거점을 두고 무역을 했지만, 사실상 독립운동 자금 공급에 주력했고, 한때는 임시정부 예산의 60%를 감당했다고 한다. 최준의 셋째 동생 최완은 임시정부의 재정부장으로 일했고, 막냇동생 최순은 백산상회에서 군자금을 담당했다. 최준은 모든 재산을 저당 잡혀서 이를 지원했는데, 1921년부터 거의 모든 재산이 은행에 담보로 잡혀서 운신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백산무역은 파산하게 되고 1928년에 해산하게 된다. 동생 최완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막내 최순은 해방 후 친일파 경찰이 보낸 서북청년단원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12대 만석꾼 최부자집의 재산은 이렇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거의 소진되고, 가족들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이 되면서 일제에 의해 동결된 재산이 풀리면서 일부 복원이 되었는데, 최준은 새롭게 건설되는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재산 일체를 새롭게 설립한 대구대학에 출연했다. 이 대구대학은 몇 년 후 당시 교육사업에 진출하려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제안에 따라 재단을 조건 없이 넘겼다가, 나중에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삼성은 사회적 지탄에서 벗어나고자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는 등 온갖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당시 박정희 일가가 운영하던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통합하여 영남대를 출범하도록 해버렸다. 이로써 최부자집 재산은 통째로 영남대 재단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는 몇 차례의 소송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부자집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수년 전 오래된 문서들이 대거 나오면서, 그간 말로만 전해오던 여러 이야기를 문헌자료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관련 연구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지역의 교육과 문화예술에 기여한 영역도 적지 않고, 최부자집을 다녀간 엄청난 사람들의 흔적을 꿰어보면 아마 한국 근대사의 비어있는 지식과 정보를 채워줄 대목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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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집 가양주 교동법주(좌), 한식 파인 다이닝 요석궁(우)

현재 경주에서 최부자집의 이야기를 찾아보려면 교촌의 최부자집을 다녀가 보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다. 사전 지식을 알고 가보면 사랑채에 걸려있는 편액도 달리 보일 것이고, 만석꾼의 쌀을 보관했던 광과 뒤주 등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최부자집의 역사와 인물, 교훈을 담은 책들이 시중에 꽤 나와있고, 이런 전통을 알리기 위해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가 아카데미를 열어 종종 흥미로운 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최부자집의 가양주로 오랫동안 알려진 교동법주에 들러 찹쌀로 빚은 달콤한 황금색 법주를 한 병 사도 좋다. 최근에는 최부자집의 다양한 가양주 전통을 발전시켜서 대몽제 등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파인 다이닝 한식 레스토랑으로 거듭난 요석궁과 카페를 운영하는 ‘하우스 오브 초이’란 회사도 만들어져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참고자료

최혁, <경주 교동과 최부자> (문상서사, 2022).

해리, “최부자집의 독립운동” https://brunch.co.kr/@harryyang/14

해리, “풍운아 박상진” https://brunch.co.kr/@harryyang/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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