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와 경주 근대사의 인상적 만남

[딮 다이브 11] 경주제일교회의 역사

by Harry Yang

경주에서 개신교 역사투어?

경주란 도시는 압도적으로 신라, 신라 하면 불교문화로 이어지다 보니, 경주에서 개신교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작업이 보편적으로 의미 있는 여행 테마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주도 근대화 과정에서 일제만 아니라 개신교와의 만남도 크게 경험한 바 있다. 더욱이 개신교는 경주의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에 매우 강력하게 개입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크게 봉사를 한 바 있다. 이런 내용은 지역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기에 아쉬운 부분이다. 이번 글에서는 경주가 의미 있게 새길만한 숨은 역사 한 부분을 발굴해서 소개하도록 한다. 개신교인이라면 자부심을 갖고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고, 개신교인이 아니더라도 경주의 역사를 풍성하게 되새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경주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로컬 딮 다이브 여행의 선택지가 하나 더 제공되는 것이니 환영할 일이 아닐까 싶다.


경주의 개신교 전래 역사

경주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1902년 성건동 197 번지 초가집에서 시작된 ‘경주읍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18년 노동동 176번지에 50평 규모의 한옥 기와집을 지어 옮겼고, 그때부터 ‘노동리 교회’로도 불리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데 1947년에 '경주제일교회'란 명칭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른다.


당시 경상북도 지역의 개신교 선교 기지는 대구였다. 게일(J.S. Gale) 선교사가 1889년 12월 31일, 데이비스(J. Henry Davis) 선교사가 1890년 봄에 대구를 방문했고, 베어드(W. M. Baird) 선교사는 1892년 혹은 1893년에 대구를 방문했다. 1895년에 그는 대구, 상주, 경주, 안동 등 경북 내륙지역을 빈번히 방문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1895년 베어드 선교사는 대구에 큰 기와집을 구했는데, 이것이 대구의 첫 장로교회가 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대구제일교회이다. 베어드는 생애를 대구에서 보내려 했었으나 1896년 선교지를 서울로 옮기게 되었고, 그는 처남인 아담스 목사(James Edward Adams, 한국명 안의와)에게 선교 베이스를 넘겨주었다.


아담스 선교사 부부는 1897년 11월 1일 대구로 이주했고, 존슨(W. O, Johnson, MD) 의사 부부가 겨울에 합류해서 대구 전도를 시작했다. 이들의 왕성한 사역으로 1899년 대구 선교기지 안에는 20개 장소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임을 갖고 있었고, 존슨 박사는 병원을 개원해서 진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동산병원의 시작이다. 그는 1923년 대구를 떠날 때까지 수십 개소의 교회를 설립했고, 1906년 계성중학교 등 수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장남 안두화 목사는 2대 선교사로 미국 북장로회 한국대표를 역임했고, 계명대학교를 설립했다.

1746665746ADD_thumb780.jpg 경주제일교회 초기 사진

아담스 목사는 1902년 봄 조랑말을 타고 대구에서 경주로 왔다. 경주 장날 읍성의 남문 앞 도로와 성벽을 따라 펼쳐진 시장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예수 믿으라”하고 외치고 쪽복음과 기독교 서적을 판매했다. 쉼터를 만들어 사람들이 와서 쉬고, 상담도 하고, 복음도 듣도록 했다. 이렇게 모인 10여 명이 1902년 5월 10일 성건동 197번지 초가집에 모여 첫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경주읍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 설립은 아담스 선교사가 했지만, 실제로 교회를 발전시킨 이는 맥팔랜드 선교사(한국명 맹의와, Edwin Frost McFarland, 1878-1970)였다. 그는 아담스 목사를 따라 경주에 와서 사역을 하다가 1904년 경주제일교회 초대 당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15년 서성오 목사가 제1대 한국인 목사로 부임할 때까지 10년 동안 목회를 했다. 그는 선교사역 중 20여 년간 20개가 넘는 교회를 설립했다.


1900년대에서 1910년대는 한국사회가 가장 격동적으로 변하던 시절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빼앗기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1907년 군대해산으로 흩어진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그 규모가 한때 7만 명에 이르렀는데, 일제는 이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의병소탕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1910년에는 한일강제합병이 이루어졌다. 1910년대에는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른 의병운동은 무장항일투쟁으로 전환하면서 국내에서 저항하거나, 만주 등 해외로 이주해서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려 노력했는데, 이 시기 일제는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시행했다. 개신교는 이 시기에 서양의 종교라는 외교적 보호막과 교육 및 의료사업을 전면에 내걸고 이런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한국사회 저변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1907년 평양에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 조선인 신자들이 숫적으로 늘어나고, 내용면에서도 강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전도의 열기가 불이 지펴지던 참이기도 했다.

201411080253_23110922838225_3.jpg 계남학교 교사와 졸업생 사진

경주에 첫 개신교회가 설립될 때의 그 낯섦과 기대감이 어떠했을지 우리가 다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교가 강성했던 지역적 특성에, 동학운동이 전국을 훑고 지나간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고, 머지않아 동학에서 파생된 천도교 역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시기였다. 경주제일교회 역시 교육운동을 일찍 시작했는데, 1909년 계남학교를 설립해서 학생들에게 근대적 교육을 제공했다. 이 학교는 해방 때까지 유지가 되는데, 늘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00-20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때로는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열기도 했다. 교회당 인근에 살았던 김동리가 계남학교를 다니다 대구의 계성학교로 진학한 것을 볼 때, 당시 개신교 네트워크가 사회 저변에서 작동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일 만세운동

경주에서 개신교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드러난 사건은 삼일만세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탑골공원에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대중적 저항운동은 민족운동 역사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 사건이었다.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 2인 등 총 33인이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했다. 가톨릭과 유교는 이때 참여를 하지 않았기에 큰 비판을 받았고, 불교도 내부적으로 참여가 힘든 구조였다. (가톨릭의 경우는 당시 정책적으로 일제에 협조하던 시기였고, 유림은 그 이전의 의병운동과 상층부의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상황이라 민중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의 운동에 대한 입장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알려진다. 아마도 동학과 개신교 등에 대한 계층적 거리낌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일운동 이후에야 민족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당시 교세로 보면 천도교가 최대 종교였고, 단일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개신교는 처음에는 참여에 부정적이었고, 여러 교단 대표자를 설득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남강 이승훈 선생이 나서서 교계를 설득하면서 적극 참여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개신교의 참여와 주도가 돋보이는데, 대구와 경주의 상황에서 그 사례를 잘 볼 수 있다.


영남권의 만세운동은 우선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서울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대구 YMCA 초대회장),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대구 YMCA 초대 총무)와 개신교 사학 교사들을 중심으로 3월 8일에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일에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등의 학생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 서문시장 인근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곧 1,000여 명이 참여해서 행진을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일제는 경찰을 투입해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지도부는 체포되어 몇 달씩 수감생활을 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도 있었다.

KakaoTalk_20260319_002531299.jpg

이 소식은 삽시간에 경북일대로 퍼져나갔고, 지역마다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주지역은 노동리교회(=경주제일교회)를 주축으로 준비해서 3월 13일 큰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하려고 했다. 교회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그런데, 이 거사 계획이 경찰에 알려지는 바람에 관련자들이 다 조사를 받게 되면서 3월 13일 거사는 불발되었다. 이때 제작된 태극기를 틀 아래 숨기고, 장독 안에 넣기도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거사는 3월 15일 봉황대 서쪽 공간에 장이 서는 날을 기해 시도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3월 15일 장터에 나와 있던 이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부르며 독립선언문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만세에 참여한 숫자는 100여 명으로 추측된다. 장터에 모여든 대중들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컸고, 준비 과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20-3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경찰이 바로 투입되어 관련자들을 체포했는데, 재판에 넘겨져 최종적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경주여행-랜드마크와-딥다이브-Google-Docs-03-19-2026_12_44_AM.png

당시 천도교 쪽이 교세도 크고,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경주지역에서는 1-2월에 전국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합을 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후 경주지역의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한 정황은 의외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체포되고 징역을 산 이들은 모두 제일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이었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개신교회 네트워크의 참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개신교인들이 이렇게 삼일운동에 참여한 경험은 이후 한국 개신교의 신앙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해방 때까지 경주제일교회 담임목사를 거쳐간 이들의 대부분이 삼일운동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만세운동에 참여했거나 조직했던 경험이 있었다. 1930년대 중후반이면 개신교가 교단차원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등 신앙적 내홍을 겪게 되는데, 그나마 이런 시기에 순순히 끌려들어 가지 않으려 버틴 데에는 목회자 자신들이 참여했던 삼일운동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경주제일교회에서는 1945년 7월 29일 예배 시 일본경찰이 목사의 설교를 중지시키며 예배에 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현장에서 교인들이 항의하다가 장로를 비롯 10여 명이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불과 2주 후에 해방이 되면서 8월 16일 전원 풀려났다. 파란만장한 시대였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이들의 명단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두 명이 있는데, 하나는 당시 담임목사였던 박영조(=박내영) 목사이다. 그는 교회에 2대 목사로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진행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10개월의 옥살이를 대구 감옥에서 하고, 출옥 후 바로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4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고, 대구 YMCA 활동과 이후 노회장 등 경북지역 개신교권에서 크게 역할을 했다. 다른 한 사람은 구속자 명단의 첫머리에 나오는 영수 박문홍이다. ‘영수(領袖)’란 목사를 도와 교회에서 가르침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평신도 대표 지도자이다. 이후 장로나 집사 제도가 발달하면서 사라지게 되는데, 박문홍 영수 개인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경주에서 그의 이름은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평신도 지도자로 교회 내에서는 영수의 역할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주요한 과제에 최전면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어쩌면 일제의 입장에서는 지역사회에서 훨씬 비중이 큰 요주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라 고적 환등영사회

1910년대의 경주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복원과 정비 사업을 거쳐 관광도시로 나아가던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에 터진 초대형 사건이 1921년 금관총 발굴이었다. 당시 봉황대 인근의 고분군은 봉분이 훼손되고 집터로 사용된 지 오래였다. 그중 한 집에서 수리를 하려고 마당을 파다가 심상찮은 보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아이들이 예사롭지 않은 구슬을 갖고 노는 것을 본 일본경찰이 공사를 중단시키고 상황을 보고하자, 유물에 조예가 있던 경주중학교 교사 오사카 긴타로, 대서인이자 경주에서 유력한 인물이었던 모로가 히데오 등이 달려왔다. 이들은 한양의 총독부로 연락해 지침을 요청했지만, 바로 답이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이 조상 무덤을 파헤쳐서 보물을 약탈해 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다. 이에 치안상의 우려가 제기되면서 경찰서장은 인부들을 시켜 유물을 바로 꺼내도록 함으로써 불과 몇 시간 만에 발굴을 끝내 버린다. 여기서 신라금관이 최초로 나오고, 금 허리띠 등도 출토되면서 이 고분을 금관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24년에는 금령총에서 금관, 금귀걸이, 기마인물형 토기가 나왔고, 1926년에는 서봉총 등에서 잇따라 금관이 출토되면서 언론에서는 대대적인 뉴스가 되었다. 경주는 ‘금관 도시’로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관광도시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금관총 금관을 놓고 경주 사회는 여론이 뜨거웠다. 무엇보다 이 특급 문화유산을 서울의 총독부 박물관에 갖다 넣겠다는 것에 반대 여론이 심했다. 이는 결국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고자 일제는 발굴 후 경주경찰서에 보관하던 금관을 이틀간 대중전시를 했는데, 하루에 4,000명이 와서 보고 갔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한편에서는 금관의 서울 이송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려 500여 명이 참가했다고 알려진다. 결국 경주 지역민들의 청원활동이 주효해서 금관은 경주에 보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런데, 금관을 그냥 보관할 수는 없으니 금관고를 우리가 모금해서 만들자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이 모금운동은 그다음 해까지 지속되어서 경주군청(지금의 경주문화원 전시관 자리)에 금관을 보관하는 금관고를 제작하게 된다.


금관 반출을 반대하는 이 청원서를 주도한 이가 경주기독청년회 총무였던 박문홍 영수였다. 그는 금관고 모금에도 깊이 관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제일교회 마당에서 계남학교, 경주 기독청년회, 동아일보 경주지국 등이 주관하여 금관고 모금 행사를 열었다. 언론에서 이 행사는 대단한 성황을 이룬 것으로 보도되었다.


"신라의 구도=민족적 생명이 약동하는 경주의 위문강연 성황 (4월) 10일 오후에 (동아일보 기자가 경주) 지국장과 가치 경주에 도착하야 … 9시부터 당디 댱로파 긔독교당 앞 널분 마당에서 지국장 사회에 그 교회 부속의 계남학교 녀학생의 합창으로 개회하야 즉시 (신라고적을 소개하는) 환등을 영사하얏는대 (밤 늦게) 회집한 군중이 팔백여 명에 달아야 널분 마당이 가득 찻스며 환영의 박수가 끈일 틈이 업섯다 (이어서) 신조선의 신생명이라는 문뎨로 강연을 시작하야 열한시 반에 맛치고 경주청년회원의 열렬한 연설이 잇슨 후 폐회하얏는데…경주인사는 이와가치 귀중한 예술을 오손(汚損)치 아니하라고 박물관 분관을 당디에 건축할 목뎍으로 방금 륙만 원의 긔부를 모집 중이라 한다. 조선을 위하야 우리는 그 성공을 비는 바이다." 1922년 4월 13일「동아일보」 3면 기사.


교회 마당에서 밤 9시에 시작한 행사는 11:30에 마쳤고, 800여 명이 모여서 성황을 이루었고, 향후 6만 원의 모금을 하려고 한다는 기사다. 이 날의 행사에는 경주의 고적을 소개하는 환등기 영사가 매우 주목을 받았는데, 계남학교는 1923년-24년에 경부선을 따라 대전, 경성, 개성, 평양, 신의주 등 전국적으로 신라고적 환등영사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계남학교의 운영을 위한 후원모금 행사로 기획되었지만, 2년간 전국의 주요 지역을 돌며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적 차원의 성과를 남겼다. 이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KakaoTalk_20260319_002027354_01.jpg
신문보기-동아디지털아카이브-03-18-2026_11_16_PM (2).png
경주제일교회 역사자료실의 수집품 중 환등기와 당시 동아일보 기사

"신라고적영사(映寫)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는 조선의 문화와 예술의 발상지로 조선인으로서 반다시 지(知)하지 아니하여서는 안 될 역사상 참고자료가 다(多)한대 금번 경주군 사립 계남교를 위하야 신라고적환등사진 순회영사단을 조직하야 가지고 조선전도를 순회하는 중 … 지난 16일 평양에 도착하야 즉시 평양신학교에서 영사를 행하고 17일은 숭실학교 강당에서 영사회를 개최한바 입장자가 7,8백 명에 달아야 대성황을 일우엇으며 … 첨성대, 무열왕비, 봉덕종, 석굴암, 다보탑의 신라 5대 미술과 박, 석, 김, 손, 이, 최, 배, 설, 정 9성의 시조강생원인이적(始祖降⽣原因異蹟) 등 …역사상 필요한 사진인 바…" (1923년 11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충남 강경(江景)에서는 지난 4일 … 시내 공립보통학교에서 … 신라고적 환등사진대회를 개최하얏는대… 영사함에 따라서 박수 소리가 연속하엿스며 … 일반관객은 적지 않은 감상이 유(有)하얏고 강경 미증유의 대성황으로 밤 12시경에 폐회하엿는대 …” (1924년 7월 8일 「조선일보」 기사)


경주와 개신교

봉황대의 뒤편 도로, 즉 봉황로 쪽에는 ‘경주 만세운동 자리’라고 되어 있는 비석이 있다. 1919년 3월 15일 만세운동이 이 자리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매년 기념일이 되면 뜻을 같이 하는 경주시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 경주제일교회는 자체적으로 교회의 초기역사를 정리한 자료를 발간하고, 관련 유물을 수집하여 개별 교회 차원으로는 드물게 매우 내실 있는 역사자료실을 조성해 놓았다. 사전에 교회 측에 연락을 하면 역사자료실 관람을 하고, 안내도 받을 수 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자료가 다수 수집, 전시되어 있다. 타 지역의 교회나 관심자들이 종종 찾는다고 한다.

KakaoTalk_20260319_001832225.jpg 경주제일교회 역사자료실
KakaoTalk_20260319_001915339_02.jpg
KakaoTalk_20260319_001915339_03.jpg
KakaoTalk_20260319_001915339_04.jpg
경주제일교회 석조예배당


경주제일교회의 석조예배당은 1950년에 건축된 것이 보존되어 있는데, 관련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와 있던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개신교계에서는 석조예배당을 이미 중요한 기독교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있고, 교회 측은 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인증받을 수 있도록 경상북도 문화유산으로 등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경주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석조예배당과 관련 역사를 경주 지역사회 공동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여기고 편하게 관람하고, 관련된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주변 경관을 정비하고 있는데, 안내판 외에 조경과 조명을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 마당이 열리고, 옛 예배당이 열려서 많은 이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자료

김한윤 집필, <경주제일교회 120년사: 1902-2022>(경주제일교회, 2023) * 비매품

최부식 지음, <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경주문화원, 2018) *비매품

아라키 준 지음, “경주 3.1 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경주제일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1호(2019), 149-185.





이전 16화“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