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12] 고청 윤경렬
경주박물관의 월지관 뒤편으로 넉넉하게 꾸며진 연못과 한옥 건물이 한 채 있는데, 각각의 이름이 고청지(古靑池)와 수묵당(樹默堂)이다. 경주에서 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같이 시작한 수묵(樹默) 진홍섭(1918-2010) 경주박물관장과 고청(古靑) 윤경렬(1916-1999) 선생을 기억하여 붙인 이름이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이름이지만 윤경렬 선생은 현대인 중에 경주 사람들에게 가장 깊이 존경받는 분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요약하며 “내 평생의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술가로, 향토사학자로, 그리고 교육가로 출중한 면모를 보였던 그는 실향민 출신으로서 느끼는 회한과 어려움이 없지 않았겠으나, 한국전쟁 이후 경주의 역사와 문화, 예술과 교육에 비교불가한 깊은 족적을 남겨놓은 존재가 되었다.
윤경렬은 1916년 1월 14일 함경북도 주을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큰 형님의 도움으로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발간하던 잡지 <어린이>를 구독하며 경주의 민담, 전설, 역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접했다고 한다. 1928년 주을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카노코 인형연구소에서 3년간 수학했다. 1943년 개성에 고려인형연구소를 열었는데, 이 시기에 개성박물관장으로 있던 고유섭 선생을 만나고, 서양화가 오지호 선생을 만나 ‘한국의 미’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깨우침을 받는다. 개성에서 교사직을 잠시 했고,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2회 입선했다.
1949년 경주로 와서 한국풍속인형연구소 고청사(古靑舍)를 설립하고, 경주예술학교에서 강사로 가르쳤다. 경주에서 한국전쟁 시기를 힘겹게 넘긴 고청은 이 무렵 경주에서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나면서 지금까지도 경주 지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두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 첫째는 개성 출신인 수묵 진홍섭으로, 그는 1952년에 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윤경렬과 교류를 하다 아예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경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하며 ‘목요회’란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런 바탕 위에서 1954년 윤경렬은 진홍섭 관장과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를 시작하였다. ‘어떤 명목으로도 돈을 받지 않는다. 언제나 문이 열려있다. 수업은 존댓말로 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시작한 이 독특한 모임은 진홍섭 관장이 경주를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윤경렬의 헌신적 노력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지면서 경주 지역의 어린이들 수천 명이 거쳐간 거대한 운동으로 성장했다.
둘째는 경주 출신인 석총(石叢) 이상구(1920-1992)와의 만남이었다. 일본 메이지대 법대에서 공부하고, 귀국해서 짧은 판사 생활을 하다 1949년부터 경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그는 국내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던 인물로, 1954년 사재를 털어 ‘서라벌예술제’를 열어 국내의 내노라는 작가, 예술가들을 초청해서, 경주의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축제를 열었다. 윤경렬은 이 행사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는 8년 후 신라문화제가 열리는 모태가 되었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1956년에 이상구 변호사를 회장으로 하여 ‘신라문화동인회’가 창립되는데, 윤경렬은 부회장으로 동인회의 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987년에 회장직을 이어받아 경주지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역할을 감당했다. 미래세대인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과 어른세대의 책임 있는 사회적 역할이 윤경렬을 매개로 경주 지역에서 긴밀하게 연결되고 지속될 수 있었다.
그는 고청사를 운영하고, 근화여자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기도 했고, 국내외에서 ‘한국의 미’에 대해 다수의 강연을 하였고, 여러 권의 저술을 남겼다. 1999년 11월 30일 자택(현 고청고택)에서 향년 83세로 영면하였다. 그를 기억하는 경주 시민들은 지금도 특유의 흰 두루마기 차림에 흰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린아이에게 존댓말을 써가며 흥에 젖어 강의하는 그의 모습을 상기하곤 한다. 그를 ‘마지막 신라인’ 혹은 ‘영원한 신라인’이라 일컫는 것은 평생에 걸친 그의 헌신과 열정을 존경하는 뜻에서 나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의 천진스럽고 온화한 언행이 참으로 ‘신라적 면모’가 아닌가 느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은 평생 바위에 조각된 얼굴의 주인공을 흠모하며 기다려왔는데, 정작 말년의 주인공이 그 이상적 얼굴을 닮아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고청의 삶을 포개어 놓고 볼 때 이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신라를 사랑하다가 신라가 되어버린 사람, 그가 고청 윤경렬이었다.
그의 대표 저작 <겨레의 땅, 부처님 땅: 경주 남산>(불지사, 1993) 서문에서 그는 저작 동기로 “일제 통치 35년 동안 조선 총독부에서는 <경주남산의 불적>이라는 이름으로 남산을 소개하는 책을 냈습니다. 우리는 해방 후 반세기가 다되어 가는 데도 남산을 소개하는 우리 책자 하나 없더니, 경주시에서 <경주남산고적순례>라는 이름으로 남산을 소개하는 책을 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책도 구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후 새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더 소개하고 틀린 곳을 바로잡아 지표에 나타난 모양만이라도 남산을 알려고 하는 이들께 알리고저 부족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붓을 다시 들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남산의 주요 골짜기를 총 26개소로 구분하고, 각각을 다 살펴 총 29개장에 걸쳐 사진, 그림, 유적 설명, 관련된 전설이나 발굴 사연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책의 부록으로 수록한 ‘남산유적표’에 의하면 경주남산에는 절터 113개소, 불상 79개, 석탑 63개 등 총 330개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특히 그가 직접 손으로 그린 불상과 탑의 모양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고, 관련된 정보와 지식이 찾아보기 좋게 편집되어 있다.
이 책은 그가 평생 600번이 넘게 올랐던 남산에 대해, 일본인들이 1926년에 낸 책 외에는 변변한 자료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환갑기념으로 만들고자 했던 책이었다. 자료조사와 집필을 위해 다시 남산 답사를 시작하면서 원고 완료에 총 2년 반이 걸리게 되어 환갑은 그냥 넘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원고는 경주시에서 <경주남산고적순례>(1979)로 출간했고, 최종적으로 <겨레의 땅 부처님 땅>(1993)으로 발간되었다. 영어와 일어판도 나와있어서 경주 남산을 소개하는 가장 자세하고도 방대한 필독의 저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라의 아름다움>(동국출판, 1985)은 총 173쪽 분량의 작은 책자로, 지금은 절판되어서 구하기가 어렵다. 서문에, “이 책 이름을 <겨레의 아름다움>이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신라문화에 대한 만큼 백제문화에 대할 기회가 적었고 고구려 문화에 대할 기회는 전혀 없었으므로 <신라의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한으로 남는다”라고 했다. 총 6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페이지마다 주요 유물의 사진을 보여준 뒤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형식으로 구성되어서 매우 직관적이다. 흥미롭게도 종종 일본과 중국의 유물 사진을 신라의 유물과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박물관 학교나 대중강연에서 사용한 강의방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신라의 미감을 중국이나 일본 혹은 현대의 것과 비교해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런 구성은 ‘한국의 미’에 대한 당대의 통념에 대해 저항 혹은 교정을 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일 삼국의 문화유산에 나타난 미학을 어떻게 음미하고 평가할 것인가를, 고청은 학술적 토론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강의와 저술을 통해 대안적 해석을 제공하고,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다시 새겨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 많다. 각 장에 부여한 키워드들은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매우 긴밀하게 고청의 평소 지론을 반영하고 있다. 책은 서론으로 ‘밝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핵심에 두고서 논의를 시작하는데, ‘밝음’은 흰색에 대한 해석, ‘찬란함’은 금관 등에서 보이는 예술적 성취도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 그는 “일본 침략시대 일본 학자들은 한국 사람들이 흰옷을 즐겨 입는 것은 물감을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고, 또 대대로 계속되는 임금들의 폭정과 당파 싸움으로 문란한 정치에 시달려 자기들이 상복(喪服)으로 입는 흰색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한(韓)민족은 색깔의 즐거움을 모르는 슬픈 민족이라 말하여 우리들 정신에 열등(劣等) 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상은 밝음을 숭상하고 동경하며 살았으므로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에는 한결같은 밝음과 찬란함이 어리어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부를 만큼 흰색 옷을 즐겨 입었으며, 높고 신성히 여긴 산에는 밝음의 흰 백자를 붙여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 태백산(太白山) 등으로 불렀다. 흰색은 분명 우리 조상이 숭상하고 동경하던 색깔이었던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흰색을 즐기는 밝은 아름다움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만일 색깔의 즐거움을 모르는 슬픈 민족이라면 무지개 색으로 엮어진 아기들의 색동저고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 것이며, 찬란한 색깔들로 배색된 꽃버선이나 귀주머니 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고 말한다.
그는 이후에 이어지는 본문의 각 장들에서 경주의 고적들을 주제에 맞추어 포괄적으로 소개한다. ‘맑고 밝은 정신세계’에서는 돌사자상, 석굴암 인왕상, 도깨비기와, 사천왕상 발 밑의 귀신상, 얼굴무늬 수막새로 이어지는 위압적이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발견한다. ‘강한 힘과 부드러운 사랑이 합친 아름다움’에서는 고구려의 강한 힘과 백제의 부드러움을 신라가 받아들여 이 둘의 조화를 추구했다고 보았는데, 이 맥락에서 첨성대의 직선과 곡선, 태종무열왕릉비를 비롯한 여러 거북이 모양 귀부의 강인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이의 극치인 석굴암 본존불에 대한 감상까지 담아내고 있다. ‘한소리로 울리는 음악’에서는 성덕대왕 신종을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 비교하여 탁월성을 논하고,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백운교와 청운교를 통해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지상에 구현했다는 의미를 새겨준다. ‘하늘과 백성이 하나로 어울리는 아름다움’에서는 경주 남산의 바위와 석불에 담긴 민중적 염원을 읽어낼 수 있도록 이끌고, 동궁과 월지의 구조에 반영된 하늘과 바다를 해명한다. ‘하늘의 아름에 차는 둥근 아름다움’에서는 장독대, 기와집의 처마 곡선, 배흘림기둥에 드러나는 나이테의 곡선, 갓이나 옷감에도 그런 곡선이 엿보이며, 상모 돌리기나 강강술래에서도 원만한 둥근 것을 추구한 민족적 심성을 소개했다.
나는 어쩌면 이 책이 고청 선생이 갖고 있던 한국의 미 혹은 신라의 미에 대한 입장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저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접근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계속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중요한 준거점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한중일 삼국은 역사와 문화에서 공유하는 부분도 있지만, 분명 서로 간의 독특한 특징이 있을 것이다. 이를 음미하고 해석해내지 못한다면 독자적인 역사와 예술적 논의를 펼쳐낼 수 없을 것이다.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쳐오는 힘겨운 시대에 오히려 후세가 꼭 참고하여야 할 기준점을 설정해 주는 작업이 이렇게 마련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경주의 역사유물은 단지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만이 아니고, 예술적 감상과 해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어느 때보다 이런 접근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고청 선생은 그의 예술가적 문제의식을 신라의 역사유물을 이해하는 데에 직접 투사했고, 이를 일찍부터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와 방식으로 담아냄으로써 그 이후의 여러 세대에 빛을 던지는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고청의 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의식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당대의 한국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에 의해 규정되고 덧씌워진 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였다.
‘중국은 형태, 일본은 색채인데, 조선은 선이다’
‘조선인들은 흰옷을 입는데, 색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상복과 같다.’
‘조선의 미는 비애의 미다.’
고청 선생은 일찍이 인형제작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기술을 배워온 바 있다. 이것은 당시 조선보다 발달한 기술을 배워오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가 개성박물관장이던 고유섭 선생에게 “자네 손 끝에 일본 놈의 독소가 3년 배었다면, 그 독소를 빼는 데는 10년 이상 걸릴 걸세.”라는 말을 들으면서는 참으로 난감한 입장이 되고 만다. 고유섭 선생은 고청에게 백제 불상은 전라도 사람을 닮았고, 신라 불상은 경상도 사람을 닮았지 않았느냐면서 우리의 전통을 파고들어 보라는 조언을 남겼다. 개성에서 교류했던 서양화가 오지호 선생과의 대화에서 “어째서 흰옷을 입지?”라는 질문에, 고청은 보통학교 교과서에서 “조선사람은 물감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흰옷을 입는다”라고 배웠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사람은 당파싸움과 폭정에 시달리다 보니 색깔의 즐거움을 모르고, 상복을 연상하는 흰옷을 입게 된 슬프고 한 많은 민족이라 하였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시기가 1944년 어간이니 이미 야나기의 관점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조선인들 사이에도 교과서적 논리로 수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일본에서 민예(民藝) 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귀족 자제 등 엘리트 청년들이 참여하던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를 만들어서 동인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1913)했고, 유럽 유학을 다녀와서 도요대학 종교학 교수(1919-1923)로 있었다. 그는 1916년에 조선을 방문해서 경주 석굴암을 보고 이후 장문의 탐방기를 지면에 발표했고, 삼일운동 직후에는 이 운동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논설, 일제의 광화문 철거 시도에 대해서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논설을 쓰는 등 조선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유지해 온 대표적 친한파 인물이다. 서울에 ‘조선 민속 미술관’(1924)을 세워 도자기 전람회를 열었고, 한국의 미술과 공예품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고, 수집도 하였다. 자신의 미학관에 바탕해서 ‘민예’ 운동을 벌였고, 도쿄에 민예관을 설립(1936)하였다. 한국과는 꾸준히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1984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쓴 석굴암 감상문은 당시에 나온 글 중 가장 깊고 풍성하게 그 예술적 가치를 드높이 평가하는 내용이었다.
여러 글에서 그는 조선의 예술이 일본을 능가하며, 일본의 국가적 예술품 대다수는 조선에서 건너온 것으로, 그것을 제외하면 과연 일본에 무엇이 남을지 알 수 없다는 평을 공공연히 내어놓았다. 그의 조선예술에 대한 찬사는 폄하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예찬이었다. 그의 선의는 의심할 바가 없다. 그가 친한파이면서 한국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던 탓에 그가 1920년대 초반에 쓴 글에서 ‘한국의 미’를 ‘비애미’라고 파악했던 것은 찬반 논의 이전에 대중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그의 입장이 갖고 있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시인 최하림은 “야나기의 한국미술에 대한 이해는 사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정책과 그의 센티멘탈한 휴머니즘이 혼합 배태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민과 한국의 미술을 사랑한다고 부르짖는 이 미문가(美文家)의 문장이 당시의 한국인들을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흐느껴 울게 할 정도로 힘을 발휘했던 것은 그의 글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하고 어떠한 사고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슬픈 마음을 투시하고 그것을 쓰다듬어 주는 그의 글발이 말하지 못한 조선인들의 상처를 달래 주었음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야나기란 1920년대의 조선인에게는 그렇게 슬픈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존재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주인인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의 감상적인 언설(言說)은 미문(美文)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란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끼친 영향력은 크고도 깊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문화정치로 넘어가던 식민지 정책에 깊이 부응하는 결과를 낳았고,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을 오랜 시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한편에 제기된다. 반면에, 야나기 자신은 1920년대 초반에 썼던 글에서도 자신이 조선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입장에서 느낀 인상을 피력한다면서 자신의 생각이 아직 초입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고, 그가 이후 조선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면서 초기의 글에 나타난 평가가 적절치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한국의 미’에는 ‘강건함’이나 ‘위엄’ 등 다른 가치들이 풍부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의도 나온다.
야나기의 이런 논리에 대해서는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고유섭 선생이 자신의 첫 논문 <김동미륵반가상의 고찰>(1931)에서 삼국의 예술 특성을 형(形), 색(色), 선(線)으로 설명한 것은 “너무나 시적(詩的) 구별임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고청은 고유섭 선생이나 오지호 선생을 통해서, 혹은 그 이후 그 스스로의 공부와 문제의식을 통해서 야나기 무네요시로 대표되는 ‘한국의 미’에 대한 관념 극복을 중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음을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미’에 대한 이런 관념은 야나기 한 개인의 입장만은 아니었고, 당대의 한국인들에게도 폭넓게 퍼져 있는 생각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학술적 논쟁만 아니라, 대안적 해석이 나와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고청의 가장 큰 기여가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깊게 개입하여, 그 발굴과 보존 과정을 장악한 것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고 향유하는 것까지 좌우하는 것에 깊이 분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조선인들이 스스로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대를 향한 죄스러움은 그의 대부분 저작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야나기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수정해 갔는지와는 별개로 고청 선생에게는 이런 ‘조선의 미’에 대한 야나기류의 인식은 평생에 걸쳐 타파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고청 선생은 이런 과제를 학술적 논의를 하는 방식이 아니고, 경주에서 만난 신라의 고적 유물을 탐구해 들어가면서 대안적 해석과 감상의 차원을 여는 방식으로 풀어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를 기성세대의 생각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에서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앞서 살펴본 저서 <신라의 아름다움>에는 고청의 이런 문제의식이 실제 강의에 어떻게 드러났을지 짐작하게 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책의 구성에서도 통속적 이해에 맞서려는 그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국에서 학자들이 제기한 야나기 비판 논문과 고청이 교육과 강연을 통해 끼친 영향력 중 어느 것이 더 큰 교정효과를 발휘했을까? 간단히 그 결과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과제를 풀어가는 데에 있어 고청의 역할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긴요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경주박물관 뒤편이자 동남산 인근인 양지마을에는 고청 선생의 고택과 고청기념관이 나란히 서있다. 동남산 쪽으로 가는 길이면 언제나 들러볼 만한 공간이다. 경주의 고청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자원봉사로 번갈아 가며 고택과 기념관을 지키고 있어 안내도 받을 수 있고, 고택에는 홈스테이도 가능해서 이를 아는 이들은 종종 활용을 한다. 최근에는 고택 공간을 활용해서 작은 미술 전시회가 연중 이어지고 있다. 기념관에는 고청 선생의 일대기가 잘 전시되어 있다. 그가 직접 쓴 서신과 스케치, 그림, 기획서 등이 전시되어 있고,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시작하고서 윤이상 선생에게 교가 작곡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와 그렇게 받은 교가의 악보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본 전시물은 경주에서 소문난 주당들이 회합 후에 그 흔적을 남긴 것인데, 행사를 마치고 고청 선생의 집에 모여든 마해송 선생, 조지훈 시인에 진홍섭 관장, 동양화가 청강 김영기, 부산일보 사장 왕학수, 경주의 김준식 선생이 어울려 밤새 술잔을 주고받고 나서 이런 날이 평생 얼마나 있겠냐며 종이를 펼쳐, 청강 선생이 손가락에 먹을 묻혀서 감나무와 남산을 그리고, 다른 이들은 한문으로 한 문장씩 써넣은 것이다.
古都會友(옛 서울에 친구들 모였네-왕학수),
月下笑聲(달 아래 웃음 소리-김준식),
悠然見南山(유연하게 남산을 바라보네-진홍섭),
千年古都逢高友 此身淸日亦君恩(천년고도에서 훌륭한 벗을 만나니 이 몸이 맑은 날을 맞음 또한 그대들의 은혜로다-마해송),
觀酒醉月(술을 보며 달에 취하다-조지훈),
情 (윤경렬),
壬辰盛夏 集於孤靑山房 晴江題畫(임진년 여름 고청산방에 모여 청강이 그리다-김영기)
대단한 풍류가 아닐 수 없다. 고청 선생을 '마지막 신라인' 혹은 '영원한 신라인'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런 풍류를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를 통해 풍류의 마지막 자취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경주에 온다면 고청고택과 고청기념관을 꼭 한번 들러보기를 권한다.
양희송, "경주는 계속 재발견되어야 한다: 향토사학자로서의 고청 윤경렬, 그 유산과 과제"(고청기념사업회 포럼, 2025)
윤경렬, <영원한 신라인 윤경렬: 윤경렬 평생 이야기>(고청기념사업회, 2023)= 윤경렬,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윤경렬 평생 이야기>(학고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