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08] 매월당 김시습
2026년 초반을 사로잡은 영화는 단연 단종의 슬픈 죽음을 다룬 <왕과 사는 남자> 일 것이다. 조선왕조 초반의 여러 정치적 격변 중 가장 대표로 꼽힐 큰 사건인데, 왕이 그의 삼촌에 의해 폐위되고, 그 삼촌은 곧 왕위에 오르는 권력 내부의 비정한 쟁투였다. 이 사건이 당시의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던졌을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세종대왕의 차남이었던 수양대군은, 자신의 형 문종이 연달아 부모의 상을 치르고 나서 병약하여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을 꿈을 꾸게 된다. 그의 명분은 자신의 동생 안평대군이 대신들과 결탁하여 어린 임금에 위협이 되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었다. 이는 계유년(1453년, 단종 1년)에 ‘국가를 어지럽히는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좌의정 김종서를 찾아가 철퇴로 내리치고,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들을 입궐시켜 명단에 따라(살생부) 살해하고, 동생 안평대군은 유배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그를 따랐던 이들은 측근 한명회, 권람, 신숙주, 정인지 등의 신하가 있었고, 세종의 맏형 양녕대군, 세종의 동생 효령대군 및 공주 등 왕족들 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1455년(단종 3년) 수양대군은 결국 단종에게서 왕권을 양위받고, 자신이 왕좌에 오른다. 그다음 해에 단종복위사건이 벌어진다.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에 연루된 인물들이 대거 처형된다. 이 중 후대에 <육신전(六臣傳)>이란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면서 ‘사육신(死六臣)’으로 불린 6명이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인데, 이들 외에도 당시 70여 명이 처형되었다. 거열형으로 찢긴 사육신의 시신이 서울 거리에 며칠간 걸렸는데, 이를 수습해서 노량진에 묘를 만들어 장사를 지낸 인물이 있었다. 그가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다.
이때 김시습은 22세 나이였지만, 그는 이미 조선사회에서는 셀럽이었다. 다섯 살에 이미 기가 막히게 시를 짓는 천재가 있다는 소문이 세종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신하를 보내 확인을 한 이야기가 세간에 널리 전해졌다. 그래서 별명이 ‘오세신동(五歲神童)’ 혹은 그냥 ‘오세(五歲)’라고 불렸다. 이름이 논어 첫 구절에서 따온 ‘시습(時習)’이었니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일찍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아 집 인근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러던 그는 10대 후반에 모친상을 당한다. 1452년 18세에 탈상을 하고 나서 송광사에 잠시 머물며 설준 스님 아래서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과거 공부에 매진하고, 이 시기에 결혼도 했으나, 이내 과거에는 실패하고 계유정난의 시기를 지나게 된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그는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들으면서, 사흘간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며 책을 불태웠다. 그리고 똥통에 빠지는 등의 기행을 하며 미친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아마도 강원도로 가서 세조를 피해 시골로 은거한 조상치와 박계손 등 영해 박 씨 7명과 겨울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로 가있다가 단종복위사건(1456년 6월)이 벌어지자 서울로 올라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사를 지냈다. 단종은 1457년 6월에 영월 청령포로 귀양 보내졌다가 10월에 사약을 받았고 죽음을 당했다. 세조는 1458년 봄에 공주 동학사에 단종을 위한 초혼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했는데, 동학사에는 이미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모신 ‘삼은각’이 있었고, 사육신을 기리는 ‘육신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김시습은 다른 이들과 함께 단종의 제사에 참여했다. 이렇게 그는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김시습은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출가해 ‘호탕한 유람(宕遊)’을 시작한다. 24세였던 1458년에는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을 돌았고, 그다음 해에는 강원도 일대 관동지방을 돌았다. 이 여행은 각각 <유관서록>, <유관동록>으로 엮었다. 1460년 10월부터는 호남지방을 돌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합천 해인사를 거쳐 1462년 늦가을에 경주로 들어온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김시습은 경주에서 총 8년여를 지낸다. 중간에 서울을 다녀오는 등의 시기가 있지만, 그의 인생에 어쩌면 처음으로 정착한 시절이기도 하다. 그는 경주 남산 용장사에 방을 얻어 지내다가 1465년에는 ‘금오산실(金鰲山室)’이란 이름으로 작은 암자를 하나 만들었다. 그는 거기에 매화를 심었고, 대나무와 꽃을 가꾸었고, 이후에는 차를 심어서 차밭을 일구었다고도 알려진다. 그의 호 매월당(梅月堂)은 그가 경주시절에 매화를 심고, 매화에 대해 많은 시를 남긴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경주에 와서 여러 유적지를 다니며 글을 남겼다. 그가 나중에 경주생활에서 쓴 글을 엮은 <유금오록>에는 그가 샅샅이 경주의 역사유적들을 훑으며 그 사연과 감상을 남겼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그렇게 전국을 소요하고, 글을 남길 수 있는 이가 드물었던 시기에 참으로 여행자의 삶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가는 곳마다 유명한 곳을 꼭 들르고, 거기에 대한 사연과 자신의 감상을 덧붙였으니 김시습의 궤적을 따라 조선 전역을 여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흥륜사, 황룡사지의 장육존상, 월성, 포석정, 오릉, 경순왕 묘, 계림, 집경전, 첨성대, 백률사, 석탈해왕릉, 김유신묘, 봉덕사 종, 불국사, 선덕여왕릉, 천룡사, 북천의 김주원 유적지 등을 돌아보았다. 경주는 천년 사직의 흥망성쇠와 인간군상의 귀결을 오롯이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이었고, 김시습 같은 이에게는 온갖 시상과 감상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가 특별히 마음을 두었을 인물로 나는 원효를 꼽고 싶다. 김시습은 분황사에 있었던 화쟁대사비를 보고 18행에 이르는 상당히 긴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뿐 아니라 시 형식도 과감해서 그의 다른 시들보다 단연 돋보인다. 원효가 승속을 넘나들며 거리의 아이들과 아녀자들에게까지 무상의 도를 깨우쳐서 많은 이들이 다투어 따랐다고 기록했다. 자신도 불교의 도에 대해 조금 알지만, 이 ‘서쪽에서 오신 분[달마=원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겠다며 시를 맺었다. 원효는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며, 자유인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중생의 마음에도 자유가 내재해 있다고 가르쳤다. 어쩌면 전국을 방랑하며 경주까지 흘러들어온 김시습의 가슴이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화쟁비 앞에서 그는 시적 형식마저 파괴하며 거리의 가수들이 즉흥적으로 랩을 내뱉듯 이 긴 시를 뿜어낸 것이 아닐까?
그는 경주에서 지내면서 적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를 알아본 선비 김진문, 주계정 등과 종종 어울려 놀았는데, 남천에 가서 목욕을 하기도 했고, 숲이나 들로 다니기도 했다. 백률사 옥판사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친교를 맺어 종종 초청받기도 했고, 지역의 양반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고, 남산이나 토함산에 함께 오르기도 했다. 경주에 부임한 부윤이나 통판 등은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그를 후대했다. 종종 초청해서 교류하는 자리가 있었고, 김시습도 글을 써서 주기도 하는 등 관리들과 관계도 무난했다. 이때의 김시습은 아마 경주에 아예 정착하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1468년 겨울에 김시습은 한겨울 내내 화로를 끼고 앉았더니 할 일이 없었다며 시 100수를 탈고해 <산거집구(山居集句)>라고 엮었다. ‘집구(集句)’란 여러 사람의 시구에서 문장을 따와서 새로이 시를 만든 것을 말한다. 그는 경주에서 꾸준히 책을 구해다 읽으면서 문장을 다듬었던 듯하다. 최초의 한문소설로 꼽히는 <금오신화(金鰲新話)>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책의 명칭과 여러 정황상 금오산실 시절이 가장 유력하다. 이 책은 ‘신들의 이야기(神話)’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新話)’이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몇 편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금오신화> 목판본에 포함시킨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이 이러하다.
낮은 집 푸른 담요에 온기가 남은 때
들창에 매화 그림자 가득하고 달이 밝아라
긴긴밤 등 심지 돋우며 향 피우고 앉아서는
세상에 없던 책을 한가하게 저술하노라(閑著人間不見書)
옥당에서 붓 놀릴 마음 없기에
깊은 밤 소나무 비낀 창 아래 정좌하였다.
차관과 동병, 오등 팔걸이뿐인 정갈한 방에서
글귀 찾아 풍류기화(風流奇話)를 적어본다.
그가 <금오신화>를 저술하는 고요한 밤풍경이 절로 떠오른다. 그의 이전 문장들이 늘 분노와 회한으로 거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면, 이런 자기 묘사는 평온한 내면에 도달한 면모를 보여준다. 나는 김시습이 경주에 와서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많이 편안해지고, 많이 웃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오죽하면 선비가 귀신과 연애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썼겠는가? <금오신화>는 여러 가지로 그 내용을 새겨볼 수 있지만, 내게는 세상 준엄했던 선비가 귀신과의 연애담을 써내는 대 파격을 시도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이야기들에서 선비와 미녀 귀신이 주고받는 한시들은 매우 격조가 높다. 아마 제대로 한시를 감상할 수 있어야 이들이 지금 주고받는 시구들이 고도의 플러팅에 해당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천상과 지하와 용궁을 오가는 판타지적 배경 설정도 흥미롭고, 이런 설정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며 여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김시습은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전의 인물이 맞는 것인지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다.
김시습의 글과 작품, 그의 행적에서 확연히 도드라지는 경주 시절을 곰곰이 새겨보는 작업은 경주를 여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매우 풍성하게 확장시켜 준다. 조선시대 최고의 여행자이자 작가였던 김시습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우리는 경주에서 발견한다. 그가 경주에서 만난 장소와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깊게 물들이는 좌절한 지식인, 시대와 불화한 의분 가득한 인물은 경주를 만나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비판정신이 무디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볼 ‘천 년의 역사’를 레퍼런스로 얻었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원효도 만나고, 왕들과 귀족들의 이야기도 만났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사랑의 절절함에도 눈길을 주게 되었다. 역사와 개인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이야기를 우리는 <금오신화>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1463년과 1465년에 불경간행 사업과 원각사 낙성식 참여를 위해 서울을 다녀온다. 1472년(성종 3년)에 38세의 나이로 상경해서 도봉산 아래 혹은 수락산에 폭천정사를 짓고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불교와 도교 관련 저술을 여럿 남긴다. 1481년 47세에 환속하여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사별한다. 이후 다시 관동으로 유랑을 떠나고 주로 강원도에 거처하다 1493년 59세의 나이로 부여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511년 유고 간행을 조정에 건의하면서 그의 글을 모으고 간행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1582년(선조 15년) 왕명으로 <매월당집>의 편찬이 시작되어, 율곡이 <김시습전>을 지었고, 그다음 해에 <매월당집>이 간행되었다. 1782년(정조 6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후대에 우러를 선비의 이상으로 완전히 복권되었다.
김시습의 금오산실은 아마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 부근이었을 것이다. 경주 남산 용장 초입의 주차장 한편에 매월당을 소개하는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금오신화>의 내용과 김시습의 시를 전시해 두었다. 등산하러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꼭 들러서 한번 보고 산을 오른다. 거기서 용장계곡을 따라 산행을 하다가 설잠교를 지나 산으로 올라가면 7-8부 능선쯤에 용장사지가 있다. 거기에서 남산에서 가장 매력적인 삼층석탑을 볼 수 있고, 마애불과 좌불을 직접 만져볼 정도로 가까이 볼 수 있다. 원래 남산 용장사지에 매월당 영당이 있었다는데, 현재는 감포의 기림사에 매월당 영당이 조성되어 있다.
분황사에 원효대사 화쟁비는 비석 윗부분만 남아있고, 비문은 파괴되어 볼 수 없다. 추사 김정희가 비석의 존재만 판별해 놓은 상태인데, 어쩌면 김시습의 ‘무쟁비’란 시는 그 비문의 간접 감상을 전해주는 것일 테다. 경주의 여러 유적들을 김시습의 시를 읽으며 다녀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가 경주 시절 지은 시들은 <유금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주에서 김시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글은 그의 특별했던 경주생활을 통해 강렬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경주의 공기에는, 특별히 여행자들의 마음에는 김시습만큼 크게 울림을 던져오는 인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시습은 여전히 경주를 찾았던 가장 대표적인 셀럽이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돌베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