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딮 다이브 02]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잘 알다시피 경주는 압도적으로 신라의 도시다. 거의 천 년간 신라의 수도이기도 했고, 신라가 남긴 유산이 지금의 경주를 빛내는 대표적 문화유산들이 되어 있으니 그럴만하다. 하나, ‘신라 이후의 경주’도 경주다. 그 나머지 천 년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부침은 있었다지만 고려시대부터 동경(東京)으로 상징적 지위를 갖고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이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경상도 최대 도시로 정치적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로 경주는 역사관광도시로 재정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경주를 살펴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가보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는 그 시절에 형성되어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옥마을을 직접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양동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2010년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옥산서원은 2019년 '한국의 서원' 9개소가 지정될 때 다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민속촌이나 영화 세트장 같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고, 실제 5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씨족마을이다. 경주 손 씨와 여강 이 씨 집안의 종택과 집안의 여러 유력 인물들의 고택, 평민들의 초가집까지 옛날에는 실제 이렇게 마을을 이루고 살았겠구나를 다 볼 수 있다. 둘째는 조선시대를 다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다. 조선 초기 성리학을 정립한 대표적 선비 다섯 명을 꼽아 ‘동방 5현’이라 부르고, 문묘에 배향했는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그들이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은 이언적의 흔적이 깊이 배어있는 공간이다. 그를 알면 이곳이 더욱 흥미로워진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은 경주 시내에서 포항 쪽 방면으로 승용차로 30분 정도 거리인 안강읍에 있는데, 두 장소가 또 12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두 곳 다 제대로 보려면 여유롭게 한 나절 정도 시간을 잡는 것이 좋다. 이곳은 사전 지식의 유무에 따라 이해의 수준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곳이라,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다.
양동마을은 경주 손 씨와 여강 이 씨의 씨족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를 논하려면 자주 등장하는 3인이 있는데, 첫째는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 , 1433-1484) 선생이다. 그가 당시 풍습대로 처가인 양동으로 장가를 오면서 양동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손소의 아들 중 둘째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이 이후 손 씨 가문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고, 손소의 사위인 이번(李蕃, 1463~1500)에게서 난 아들, 즉 손소의 외손자인 이언적이 이 씨 가문의 유력한 인물이 된다. 두 가문 모두 장가들면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씨족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가문의 위세를 떨칠 인물들이 나오면서 대대로 이 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거주하게 되었다.
두 집안은 양동마을에 일종의 세력균형을 이루듯 대종택과 여러 주요한 고택을 지었고, 정자와 서당도 각각 두었다. 양동마을을 둘러보는 것은 이 두 집안의 주요한 건축물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주로 진행이 되는데, 워낙 마을이 넓어서 걸어서 이 모든 공간을 돌아보다가는 곧 지치고 만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손 씨 대종택인 서백당(書百堂), 이 씨 대종택인 무첨당(無忝堂)을 보고, 손 씨 집안의 어른 손중돈의 고택 관가정(觀稼亭)과 이 씨 집안의 대표 고택인 향단(香壇)을 본 후에는, 손 씨 집안의 정자인 수운정(水雲亭)과 이 씨 집안의 정자인 심수정(心水亭) 등을 돌아보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두 집안이 어느 정도는 경쟁적으로 건축을 한 셈인데, 대응되는 건축물에서 양 집안의 내력과 가풍을 읽어낼 수 있다면 매우 흥미로운 일정이 되겠으나, 그런 차이를 유의미하게 포착할 수 없었다면 조선시대 한옥 건축물을 원 없이 보고 온 기행 정도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과거의 건축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문가의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는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1편과 2편에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있는데, 딱 필요한 내용을 시원하게 짚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극 추천한다.
손 씨 대종택인 서백당은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키운다’는 뜻으로 쓴 사랑채의 당호이다. 이 집은 손소 선생이 짓고 살았던 곳인데, 이곳의 방에서 아들인 손중돈, 외손자인 이언적이 태어났기에 ‘큰 인물을 낳은 방’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고, 풍수가들이 이곳에서 세 사람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며, 앞으로 한 사람 더 태어날 것이란 여운을 남기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ㅁ자 형태로 안채가 단단히 가려진 구조를 갖고 있고, 지붕이나 건축양식이 비교적 소박한 편이다.
이 씨 대종택인 무첨당은 <시경>의 구절을 인용해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경계를 담고 있는 당호이다. 대청마루 건너편에는 ‘좌해금서(左海琴書)’란 편액이 있는데, ‘영남에서 선비가 머물고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 방문했을 때 쓴 글씨다. 집은 이언적의 부친 이번이 지었고, 서백당과는 동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후 이언적과 그 후손 대에 집이 증축되었는데, 서백당에 비해 누마루며 지붕의 위세가 당당하고 화려한 느낌이 있다.
종택에는 사당이 있고, 연중 여러 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안채에는 대청마루와 부엌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지금도 집안의 대소사를 감당해야 하는 종손의 역할이 매우 큰 편이고, 양동마을을 방문한 이들은 가끔 운이 좋으면 대종택에서 거주하는 종손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양동마을은 관광지이기는 하나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공간에 함부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거나, 소란을 피우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이 아버지 손소의 집에서 분가해서 살았던 곳이다. 그는 차남이었지만 장남이 장가들면서 관행대로 처갓집으로 떠나게 되자, 자신이 종손의 역할을 하느라 오랫동안 이 집이 대종택 역할을 했다. 서백당에 사당을 짓게 되면서 대종택이 서백당으로 옮겨간 것은 1924년 이후이다. ‘곡식이 자라는 들판을 바라보는 정자’란 이름대로 실제 안강 평야에 농사짓는 것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집을 지었는데, 이 당호는 후손들이 번창하고 성장하는 것에 대한 염원도 함께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할 때 병든 모친을 잘 돌보라고 중종 임금이 지어준 집이다. 이후 그의 동생 이언괄이 집을 이어받았다. 이언괄의 손자 이의주의 호를 따라 향단이라 부르고 있다. 집의 구조가 보통 ㅁ자 형태인데, 이 집은 일(日) 자 모양으로 매우 독특하다. 양동마을 들어서면 왼쪽 언덕 위에 바로 눈에 들어온다.
낙선당(樂善堂)은 손중돈의 동생 손숙돈이 지은 집으로 그의 후손 낙선당 손종로 대에 본가에서 분가해서 사당을 두고 새로 파를 세운 파종택이다. 수졸당(守拙堂)은 이언적의 넷째 손자 수졸당 이의잠이 세웠고, 그 역시 파시조가 되어 사당을 두면서 이 집은 파종택이 되었다.
손 씨 집안의 정자로 마을 깊은 곳 가장 경관이 뛰어난 자리에 있다는 평을 받는 수운정은 ‘물과 같이 맑고, 구름같이 욕심 없이 비어있다’는 ‘수청운허(水淸雲虛)’에서 취한 이름이다. 반면 이 씨 집안의 대표적 정자인 심수정은 마을 입구 쪽에 가깝고, 정자 중에는 그 규모가 가장 크다. 회재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하는 정자로 그가 쓴 ‘정이라는 한 자는 마음의 물이다(精之一字 心中之水)’는 글귀에서 그 이름을 취했다.
위의 내용에서 느껴지듯, 양동마을은 손 씨와 이 씨 집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문을 번성시킨 내력이 반영되어 있는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회재 이언적이다. 그의 외할아버지 손소도 국가 공신이었고, 대단한 경제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의 외삼촌 손중돈도 영남학파를 주도한 성리학자이자 고위 공직자 이력을 갖고 있었으나, 결국 이 모든 역사는 이언적의 화려한 등장을 위한 배경을 제공하고 만다.
그는 열 살에 부친을 여의고, 외삼촌 손중돈의 관직 생활 임지를 따라다니며 학문과 삶을 배웠다. 그에게 평생의 스승은 외삼촌이었다. 그는 23세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당시 ‘태극무극(太極無極) 논쟁’에 참여해서 논쟁하던 조한보와 손숙돈을 다 비판하며 이후 영남학파의 핵심이 되는 주리론 전통을 확립하며 화려하게 학문세계에 등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훗날 퇴계 이황으로 계승되는 입장을 선행해서 확립한 스승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큰 벼슬을 하지 못한 채 40세에 당시 실력자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관직이 박탈되어 낙향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안강의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세우며 은둔을 시작했다.
47세에 회재는 다시 관직에 발탁되어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53세에 경상관찰사가 되어 돌아왔고, 이때 양동마을에 무첨당을 짓고, 향단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57세에 부당하게 휘말린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당하고, 6년 후인 1553년 세상을 뜨고 만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는 가정사인데, 과거 급제 후인 25세에 그는 본부인 외에 석 씨 부인을 첩으로 얻었다. 그녀는 옥산에 거주할 집을 지었고, 회재는 본가의 무첨당보다는 옥산에 주로 거처하였고, 나중에 여기에 독락당과 계정을 추가로 지었다. 그 사이에서 난 아들 잠계 이전인은 나중에 회재의 유배지까지 따라가 아버지를 수발하였고,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이를 정리해서 펴내기까지 했다. 회재의 계보는 적서 차별 논란이 없지 않으나 현재 무첨당파, 수졸당파, 옥산파로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독락당(獨樂堂)은 회재가 인간적 애정을 갖고 가정을 꾸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가 중앙정계에서 퇴출되었을 때 그의 은둔 시절을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이기도 하다. 김봉렬은 독락당을 두고 ‘폐쇄적이고 움추러든 건축’이라고 평가했는데, 그가 읽어낸 독락당의 이모저모는 나의 해묵은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는 바가 있다.
첫째, 회재는 옥산으로 들어올 때, 그곳을 둘러싼 자연공간에 하나하나 직접 이름을 붙이면서 그의 형이상학적 세계관 속으로 재편시켰다.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부르는 이 작업을 통해, 그곳을 둘러싼 산봉우리를 각각 도덕산(북), 무학산(남), 화개산(동), 자옥산(서)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성리학적 세계관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적 전망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계곡의 다섯 장소를 물고기를 바라보는 관어대(觀魚臺), 목욕하고 노래 부르는 영귀대(詠歸臺), 갓끈을 풀고 땀을 식히는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평정하는 징심대(澄心臺), 잡념을 씻어버리는 세심대(洗心臺)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전체 자연을 자계(紫溪), 자기 자신을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자계옹(紫溪翁)이라 부르며 자연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관철시켰다.
둘째, 회재가 나중에 복권되어 경상관찰사로 돌아왔을 때, 가문을 위해 지었던 양동마을의 무첨당과 향단 등은 매우 힘차고 화려한 위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은둔시절 공간인 독락당은 외부에서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폐쇄성과 은둔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독락당을 찾을 때마다 도대체 집 전체의 구조가 파악되지도 않고, 예사롭게 벽과 골목으로 시야가 막히는 이 건물이 어떤 면에서 잘 지어진 것일까 의문이 일기도 했다. 심지어 ‘옥산정사’ 현판을 걸고 있는 독락당 건물의 지붕은 계곡 쪽은 팔작지붕이고, 다른 쪽은 맞배지붕으로 비대칭이다.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든 계정은 계곡에서 볼 때는 아름다운 건축양식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담을 따라가다 모서리에 만들어둔 마루 정도의 느낌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즉, 독락당이나 계정 모두 계곡을 향하는 시선만 배려하고 있고, 내부로 들어온 이들에게는 빈번히 시각적 가로막힘이 일어나고, 좁은 골목이나 중첩된 문의 배치 등 낯선 동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곡이 있는 동쪽을 향해서는 최대한 열린 구조이나, 남쪽 정문에서부터 들어오는 인간사회를 향해서는 차단, 회피, 우회를 일삼는 매우 불친절하고 폐쇄적인 구조란 얘기다. 이것이 이 집을 지은 자, 회재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질문이 김봉렬의 것인데, 나는 그 물음에 주저 없이 동의가 되었다.
셋째, 독락당의 건축에 투사된 회재의 세계관을 ‘세계와의 교류를 거부하는 위축과 퇴행의 반영’이라고 간단하게 처분할 수는 없다. ‘독락당’이란 명칭은 사마광의 <독락원기>에서 끌어온 것인데, 여기에는 ‘홀로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남들과 같이 나누고 싶지만, 세상사람들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혼자 즐기게 되었다’는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내가 회피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외면했을 뿐이란 얘기다. 이는 현실의 부당한 상황을 부정하는 일종의 정신승리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정신승리’를 비굴한 회피기제로 보겠으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출세하여 치국 평천하를 꿈꾸다가도 평생 몇 번씩이나 모함받고, 부당하게 유배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뜻을 꺾고, 꿈을 접고, 살 길을 모색하는 타협이 현실적 대안이고, 바람직한 선택일 수 있겠는가? 고금의 유학자들이 당대에 출세해서 권력을 쥐락펴락한 인물들이 아니라, 초야로 돌아간 산림처사들 중에서 시대의 사표를 구했던 것은 거기에 꺾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삐딱함’을 장착하고서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리고, 그 세계 속을 유영하며 세월을 낚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태극무극’ 논쟁에서도 나타나듯, 형이상학적 세계가 현실세계와 무관하지 않으며 깊이 연관되어 있다면, 저항이란 무릇 상상과 이론의 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독락당의 친절하지 않은 건축 양식은 이런 회재의 세계관이 그대로 관철된 것으로 볼 때라야 비로소 이해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이야기다. 나도 이런 설명에 설득이 되었다.
회재 이언적 사후에 얼마 오래지 않아 그를 기리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경주부윤 이제민이 발 빠르게 움직여서 1572년 독락당 인근에 옥산서원을 세웠다. 이는 곧 사액서원(1574년)이 되었다. '동방 5현'에 드는 회재의 존재감 때문인지, 옥산서원은 대원군 시절 서원철폐령을 따라 전국에 47개소를 제외한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살아남았다. 독락당 일대도 회재의 땅과 노비들이 적지 않은 규모로 운영이 되고 있었는데, 옥산서원이 사액되어 땅과 노비가 하사되자, 운영은 매우 안정적이 되었다. 경상도에 도산서원 다음의 규모였다는 평가다.
옥산서원도 어느 정도는 독락당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경향성이 읽힌다. 우선, 이 서원은 외부와의 시각적 교류가 정말 차단되어 있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앞에 무변루가 버티고 있는데, 기둥 위는 그냥 작은 창문이 있는 벽면이다. 누각 아래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안마당이 보인다. 좌우로 기숙사가 있고, 정면에 구인당이란 대청이 보인다. 그런데, 구인당의 지붕은 나름 멋을 낸 팔작지붕이지만, 좌우 기숙사가 바짝 붙어있어 구인당 좌우로 돌아나가는 공간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빡빡한 공간이다. 구인당의 대청에 올라서도 정면이 무변루를 넘어 계곡 쪽으로 조망이 전혀 나오지 않고, 좌우를 둘러봐도 산이나 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당을 둘러싼 네 변이 모두 건물로 조밀하고, 지붕 너머로는 하늘이나 나무 정도가 보일뿐 멋진 경관은 들어오지 않는다. 김봉렬은 이를 안동의 병산서원 같은 곳과 비교한다. 거기는 정면에 산과 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절경이다. 산수화의 이상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공간이다.
옥산서원의 이런 폐쇄성은 오직 학업에만 몰두하라고, 주변의 영향을 차단하려는 것일 수 있다. 멋진 산수는 이 강학의 공간을 열고 나가면 문밖에 펼쳐지는 것이고, 이곳까지 그 풍류를 끌어들일 이유는 없는 것일 테다. 그러나 그 차단의 결기가 이렇게 단단하고 보니, 이는 독락당을 그렇게 지은 회재의 어떤 면모가 고스란히 계승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옥산서원에서 꼭 보아둘 것은 이곳이 당대 최고 명필들이 남긴 현판과 편액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이다. 출입문 '역락문'과 입구의 누각 ‘무변루’는 한석봉의 글씨고, 정면의 대청에 걸린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것이다. 원래 있던 ‘옥산서원’ 현판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였는데, 화재로 소실되어서 다시 복구한 것을 보관하고 있다. ‘구인당’은 한석봉의 글씨인데, 구인당 좌우의 양진재와 해립재 현판 역시 그가 썼다.
구인당 왼편 구석에 있는 신도비각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억울한 누명으로 귀양을 간 회재의 연보를 고봉 기대승이 쓰고, 아계 이산해의 글씨로 비석을 만들어 1577년 세심대 옆에 세웠는데, 거기에는 회재 선생이 이기의 모함으로 인해 귀양 가서 세상을 뜬 내용이 소상히 담겨있었다. 1613년에 이기의 증손자 이안눌이 경주부윤으로 부임해 그 이듬해에 옥산서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회재의 후손들이 완강하게 그의 방문을 저지하자, 그는 맨발로 비석을 부여잡고 사과하며 이 비석을 고쳐 세워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여러 번에 걸친 그의 간곡한 요청과 사죄의 마음에 설득이 되어 회재의 후손들은 그 비석을 서원 내부로 옮겨 신도비각을 세웠다. 이안눌은 독락당과 계정을 수리하는데 정성을 다해 지원하였고, 임기 내 경주의 여러 곳을 살피고, 보수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역사의 악연을 후손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문서고에는 귀한 문헌자료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완본이 이곳에서 임진왜란을 피해 보존되었다. 안동의 만인소와 더불어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옥산서원의 '영남유생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1884년, 8,849명 서명, 너비 1.02m, 길이 100.36m, 무게 8.3kg)는 선조들의 민본(民本) 의지가 잘 드러난 문헌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