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이 '노천 박물관'이라고요?"

[딮 다이브 01] 경주 남산

by Harry Yang

'노천 박물관'이란 말

경주 남산을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노천(야외) 박물관(open air museum)’이란 말이다.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선생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여러 책자와 방송 등에서도 그렇게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입에서 순순히 나오지 않는다. ‘박물관’이란 매우 근대적 용어다. 문화유산을 모아서 전시하고, 관람하는 공간을 박물관이라고 한다. 그런 특정한 방식의 근대적 수집, 전시, 관람 행위가 발생한 이후에나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경주 남산에 엄청난 수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데에는 편리하지만, 근대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남산을 ‘박물관’이라 생각하며 다녔을 리는 없으므로 전체 역사를 통틀어 남산의 의미를 적절하게 지칭할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이 표현의 기원은 평생 경주 남산을 500회 이상 탐사하셨던 고청 윤경렬 선생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분이 쓴 <경주 남산, 겨레의 땅 부처님 땅>(불지사, 1993, 이하 <경주 남산>으로 약칭함.) 서문에는 “남산에 문화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남산 자체가 그대로 문화재인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분의 다른 저술과 강연 등에서 ‘노천 박물관’이란 표현이 대중화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 시절에 그렇게 쓰면서 남산의 풍성한 유적들을 강조했던 것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분도 남산 자체의 핵심을 포착하는 제목은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이라고 했지 ‘노천 박물관’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경주 남산을 포착하려 했을 때, 그분의 눈에는 겨레의 문화와 불교의 정신이 깃든 땅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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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윤경렬 선생의 저작은 남산 탐사에는 가장 깊고도 방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정평이 있다. 경주에는 이 책을 따라 남산을 골짜기마다 다녀보았다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고청기념사업회에서는 요즘도 가끔씩 남산 답사를 다닌다.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8km, 동서로 4km에 이르고,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이 주봉인 넓게 펼쳐진 산이다. <경주 남산>에 의하면, 서남산으로 16개 계곡, 동남산으로 16개 계곡, 남쪽 면으로 10개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절터가 113개소, 불상이 79개, 석탑이 63개 등 총 330개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출간한 지 30년이 지났으니 이 책의 정보는 새롭게 업데이트가 필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산 전체를 이만큼 꼼꼼히 답사하고 기록한 자료로는 필적할 것이 없다.


남산 탐사의 테마 잡기

남산의 유적 분포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경주 남산은 코스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70여 개 이상의 루트가 나온다고 한다. 남산에 가서 무얼 볼 것이냐에 따라, 어떤 주제의식을 따라 구성할 것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선택이 가능하다. 나는 처음에는 단순한 등산으로 남산을 찾았다. 500m가 되지 않는 높이에, 코스 개발도 잘 되어 있으니 반나절 정도 산행하기에 딱 좋은 만만한 산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평탄한 코스도 있고, 약간의 암릉을 오르는 맛이 나는 코스도 있고, 계곡도 좋은 곳이 있다. 그러다가 길 가에서 만나는 불상들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삼릉 코스를 오르다 보면 정말 다양한 석불들을 만난다. 목이 없는 좌불도 있고, 바위에 새긴 선각 마애불도 있고, 상당히 정교하게 조각된 불상이 있는가 하면 매우 투박한 솜씨로 새긴 경우도 있다. 이런 불상들을 상선암까지 올라가는 45분 동안 내내 길옆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여느 산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골짜기와 봉우리에 빠져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경주 남산을 해석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던 것이다.


동쪽의 토함산에 조성된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 최고의 종교적, 예술적 역량이 총동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의 결정체이지만, 왕경 바로 뒤편의 남산은 신라 역사 내내 민중들이 끊임없이 들고나며 축적한 종교와 문화와 사상의 층위가 다층적으로 집약된 원형질의 공간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토함산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탁월하게 성취된 불교적 이상 세계를 만난다면, 남산에서는 거칠고, 꾸밈없고, 때로는 격동적인 원초적 감성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주 남산의 이런 면모를 탐험하는 ‘딮 다이브’ 코스 다섯 가지를 제안한다.


1) 삼릉-금오봉 코스

반나절 등산으로도 적당하고, 올라가며 석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어서 대중적으로 많이 찾는 코스다. 삼릉 입구 주차장에서 진입하면, 바로 강문구, 배병우 작가 등의 사진으로 유명한 삼릉 소나무 숲을 만난다. 초입에 있는 3개의 고분과 인근의 경애왕릉까지 한 바퀴 둘러보고, 산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올라가면 목이 없는 좌불을 만난다. 이것이 첫 번째 만나는 불상이기에 왜 목이 없을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지진으로 인한 것인지, 조선 초의 척불숭유 근본주의자들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거기서부터 산행길 좌측 편으로 대여섯 개의 석불들이 차례대로 출현한다. 서로 다른 수준의 완성도를 비교 감상하며 올라가다 보면 그중에 선각마애삼존불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제작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에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독 삼존불 형태가 많은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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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의 불상(좌, 중), 상선암 마애여래대좌불(우)

약 45분 정도 산을 오르면 상선암이 나온다. 절 마당에 앉아 잠시 쉬며 호흡을 고른 다음에 이후 코스를 정한다. 바로 하산할 수도 있고, 온 김에 30분 정도 더 걸어서 금오봉까지 가겠다면 가던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된다. 경주 시내 쪽이 보이는 바둑바위에서 신선들이 놀았다는 전설을 상기하면서, 금오봉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예전에는 접근을 했지만 지금은 제한되어 있는 상선암 위쪽의 대형 마애여래대좌불을 멀리서 볼 수 있다. 능선을 따라 금오봉까지 가면 일단 상행 코스는 완료된다. 거기서 하산길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정하면 된다.


2) 동남산 불상 코스

내가 즐겨 지인들을 안내하는 코스다. 걸어서 반나절 정도 걸리지만, 차로 이동하면 조금 더 짧은 시간에 돌아볼 수 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으면 월정교나 박물관 아래쪽 월성교 즈음에서 걸어와도 된다. 이 코스의 시작은 고청기념관을 한번 먼저 다녀오는 것으로 하면 좋다. 경주 남산을 수도 없이 탐사하신 고청 윤경렬 선생의 고택과 기념관이 양지마을에 있다. 한 바퀴 둘러보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눈에 담아두고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첫 번째 갈 곳은 할매부처라고 불리는 감실 여래좌상이 있는 부처골(佛谷)이다. 진입로 입구에 주차하고, 걸어서 채 10분이 안 걸리는 산행이다. 커다란 바위를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주로 석회암에 거대한 석굴사원을 조성했던 인도나 중국과 달리 이곳은 화강암을 파고 새긴 석굴 불상이다. 6세기말-7세기초에 만들어진 가장 초기 불상으로 추정한다. 둥글둥글한 인상 때문에 할매부처란 별명을 얻었고, 민간에서도 많이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저것은 필연적으로 신라인의 얼굴을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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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실여래좌상(일명 할매부처)(좌), 옥룡암 부처바위(중), 보리사 석가여래좌상(우)

여기서 남쪽으로 300m쯤 떨어진 다음 계곡이 탑골(塔谷)이라 불리는데, 옥룡암이란 암자 옆에 사면에 다양한 상을 새긴 부처바위와 마애삼존불, 석조여래입상, 삼층석탑 등이 있다. 9m 높이의 거대한 바위 사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조각을 보노라면 진리의 빛이 바위를 뚫고 사방으로 퍼져나간다는 사방불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하다.


남쪽으로 400m쯤 가면 미륵골이라 불리는 계곡인데, 거기에 보리사가 있다. 보리사 왼편 뒤쪽으로는 거대한 바위들이 사찰을 덮치듯 몰려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바위군락 앞에 보리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남산에서 발견된 석불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광배 일부가 훼손된 것 외에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다. 특히 이 부처상은 석굴암 본존불을 보는 듯한 단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한눈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략 석굴암 건축 이후인 8세기 후반으로 시기를 추정하는 모양인데, 신라의 불상이 최고 경지의 미감을 보여주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후에는 인도나 중국풍을 따르는 경향도 나타나면서 신라 불상 고유의 느낌이라고 할만한 특징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석불의 연대기적 변화 양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 인도나 중국, 일본 등의 불상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더욱 도드라질 것이라 생각하는데, 불교 전래 초기에 불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신라인들 고유의 미감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불상을 통해 신라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 전시관에서 수많은 석불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이 동남산의 불상 3곳은 가장 간명하게 그 변화양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한달음에 둘러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3) 칠불암과 신선암 해돋이

동남산 코스에서 남쪽으로 통일전을 지나 염불사까지 오면 칠불암에 오르는 산행길 입구에 도달한다. 거기에서 50분 정도 산행을 하면 칠불암에 도착할 수 있고, 거기서 15분 정도 더 올라가면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신선암이다. 나무가 울창한 계곡 옆 숲길을 계속 걸어서 오르면 옛날에 고시공부하러 올라온 이들이 머물렀을 암자 건물이 보이고, 그 위 대나무 숲 너머에 칠불암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과 그 앞에 사면불이 있어 총 7개 불상이 있어서 칠불암인데, 이 불상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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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 전경과 칠불상

칠불암은 산 아래 비구니 사찰인 중흥사를 찾아온 전 세계의 비구니들이 차례로 순번을 정해 올라와 지키고 있어서 산행을 하다 보면 외국인 스님들의 환대와 더불어 차를 얻어 마실 수 있다. 칠불암 바로 위쪽의 바위 신선암에 새겨진 마애불은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동해의 일출을 바로 맞이하는 장소가 된다. 새벽 산행으로 여기서 해맞이를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유물이 된 사찰터가 아니라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산중암자를 만나노라면 여전한 종교적 활력을 느낄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인생의 걸음을 되새기는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칠불암 산행길은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가장 진지한 구도 행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2025-10-26(66).heic 신선암 마애불에서 보는 일출

칠불암 산행은 하산길을 어디로 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풍광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예 고위봉을 거쳐 산의 반대편 열반재 쪽으로 하산하는 것이 가능하고, 오른쪽 능선을 따라 조금 돌아가면 용장사지를 거쳐 삼층석탑과 불상을 보고 용장계곡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혹은 계속 능선의 임도를 따라가다가 통일전 쪽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하나 선택하면 출발지점 근처로 내려갈 수 있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열암곡으로 하산하면 땅과 5cm 간격을 남기고 앞으로 쓰러져 있는 유명한 열암곡 부처상을 볼 수 있다.


4) 선비길

남산을 오롯이 불교의 공간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조금 과한 것일 수 있다. 유학의 전통에서 보아도 남산에는 특별한 장소들이 있다. 향교에 배향된 우리나라의 유학자로 가장 오래된 이는 설총과 최치원인데 그 둘이 다 신라, 혹은 경주 사람이다. 최치원의 흔적이 가장 깊게 어린 곳은 남산이 시작하는 북쪽 머리의 상서장(上書莊)이다. 그가 왕에게 개혁정책을 상소하고서 응답을 기다리며 살았던 곳인데, 월성이 바로 내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그는 이후 기울어 가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합천의 해인사 인근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에 의분을 터뜨리며 세상을 등지고 전국을 방랑했던 김시습이 경주로 찾아와 8년간 머물렀던 용장사지가 있다. 후대의 선비들이 기억하고 사표로 삼았던 이들은 당대에 높은 벼슬을 하며 권세를 누렸던 이들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펴보지 못하고 불운하게 초야로 물러났으나 초연하게 자기 앞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었다. 우리 역사상 그 위상이 가장 높이 꼽힐 대표적인 유학자 두 사람의 자취가 남산에는 강하게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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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상서장(좌), 용장사지 탑(중)과 불상(우)

물론 최치원과 김시습은 유학자로만 기억되는 인물은 아니다. 말년의 최치원은 신선이 되었다고 할 만큼 선가(仙家) 사상에 친화적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가 남긴 비문 등에서도 그가 화랑, 풍류 등에 조예가 깊었음이 잘 드러난다. 김시습은 이 시기에 출가해서 설잠이란 이름의 스님이 되어 전국을 유랑했으나, 훗날 율곡에 의해 ‘심유적불(心儒跡佛)’이란 평가를 받을 만큼 ‘행적은 불자이나 마음은 유학자’로 여겨지기도 했고, 그 역시 선가(仙家)의 문헌과 논의에 깊은 족적을 남긴 존재로 알려져 있다. 즉, 경주 남산에 깃들었던 이 두 선비는 유불선을 아우르는 한국사상의 흐름에 굵은 획을 그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남산을 오르면 “‘한국적’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정통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이유다.

2025-10-26(243).heic 남산 부석

남산의 구석구석에는 불교 이전 혹은 불교와 더불어 공존했을 민간신앙의 흔적도 많이 보인다. 특히 바위에 얽힌 전설이 많다. 신선들이 놀러 와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 옥보고가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금송정(琴松亭)과 그 연주를 들으며 봉황이 내려와 앉았다는 봉생암(鳳生巖), 금오봉 아래 능선의 상사바위, 그 아래 부석(浮石), 그리고 여러 수행자들의 전설에 등장하는 계곡들은 민간설화와 신앙의 다채로움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단순히 미발전된 종교성이라 볼 것인지, 아니면 최치원이 나중에 정리하듯 유불선을 아우르는 풍류의 원형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신라에 있었다고 볼 것인지는 아직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경주 남산은 그런 기운과 사상이 꿈틀거리는 공간이었음은 분명하다. 풍류도를 체화하려는 시도가 화랑(花郞)으로 나타났다면, 한국사상의 원형 속에 진선미가 통합된 어떤 경지가 존재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를 탐사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남산의 봉우리와 골짜기와 바위를 뒤져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5) 서남산 역사 트레킹

서남산 쪽은 신라 역사의 시작과 끝이 묘하게 공존하는 장소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의 장소인 나정(蘿井), 6부촌의 위패를 모셔두었던 양산재(楊山齋. 지금은 육부전(六部殿)으로 되어 있다), 초기 왕궁이 있던 금성(金城)이 아닐까 추정하는 창림사지 등은 신라 초기의 역사가 펼쳐지는 공간이고,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와 경애왕과 귀족들이 죽임을 당했던 포석정은 신라가 결정적으로 기울었던 말기의 장소다. 역사의 시작과 끝을 한 번에 생각해보게 하는 곳으로 수많은 과거의 여행자들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토로한 글을 남기게 했다. 박혁거세의 무덤이 있는 오릉에서 시작해서 서남산 쪽으로 건너오면 둘레길을 따라 삼릉까지 평탄하게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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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삼층석탑(좌), 당간지주(중), 포석정(우)

차를 타고 서남산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내남이다. 이곳은 최부자집의 시조인 최진립 장군을 모신 용산서원이 있다. 거기서 더 내려가면 일제강점기에 최부자집과 협력하며 독립운동가로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박상진 의사의 묘가 있다. 박상진 의사는 현재 울산공항 인근의 송정이 출생지라 울산 쪽에서 기념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지만, 주요 활동 무대가 경주와 대구 일대였기에 경주지역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이곳 묘소를 찾는다. 이렇게 신라만 아니라 조선시대와 근대 역사도 서남산 일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사로 넘어오면 한국전쟁 전후로 남한에서 자행된 가장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곳도 내남면 일대였다. 거의 2,000년을 압축한 역사가 펼쳐지는 공간이 서남산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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