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05] 벚꽃여행과 신라문화제
랜드마크 투어는 기본적으로 장소성을 핵심으로 한다. 그곳에 가서, 그것을 보는 것이 랜드마크 투어의 기본이다. 사람들이 꼭 와서 보거나 체험할 가치가 있어야 하고, 다른 곳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차원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경주를 찾는다. 이곳에 와서 고분 사이를 걷고, 첨성대 앞에 서고, 월성에 오르고, 불국사를 만나는 것이다. 다른 장소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이다.
그러나, 랜드마크 투어의 또 다른 양상으로 시간성이 핵심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 봄의 벚꽃을 보는 여행, 가을의 단풍 속으로 떠나는 여행, 겨울의 눈꽃을 만나러 산을 찾는 여행이 있다. 여름의 에든버러는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극단의 공연이 끝없이 열리는 세계 최대의 공연예술 축제 현장이고, 삿포로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엄청난 얼음조각을 볼 수 있는 얼음축제가 열린다. 여름의 끝자락 8월 말에는 네바다 사막에서 세계 최대 축제라고 불리는 버닝맨 페스티벌이 일주일간 개최된다. 이런 행사들은 시간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장소(place)보다는 사건(event), 흔히 축제라고 불리는 사건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사건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특별한 경험이 제공된다. 지구상에는 이런 랜드마크 축제들이 적지 않다.
경주의 랜드마크 투어는 대부분 장소성을 기반으로 하는, 그래서 언제든 찾아가면 볼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앞으로는 경주의 여행에서 시간성이 중요하게 고려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앞서 소개한 랜드마크 투어에서도 특정한 장소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시간이 있다는 것은 언급해 두었다. 석굴암의 일출이 대단한 것이면, 황룡사지의 일몰은 또 다른 장관인 것이다. 그런데, 경주에는 이미 장소만 아니라 시간성에 근거한 특별한 투어가 그동안 있었다. 몇 가지 주요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경주에서 시간성을 반영한 여행으로 가장 먼저 확립된 것은 꽃과 연계된 계절 축제일 것이다. 그 첫째는 아마도 봄의 벚꽃이 될 것이다. 진해의 군항제 정도가 서로 경쟁하는 행사였을 시절부터 경주는 벚꽃축제가 본격화되었다. 보문단지의 순환도로에 심어놓은 벚꽃나무가 먼저 유명세를 탔다. 보문단지 진입로가 아주 장관을 이루었고, 순환도로가 콘도 인근에서 크게 커브를 만드는 지점이 오랜 기간 사랑을 받던 위치였다. 이후 보문단지는 순환도로 전반에 벚꽃을 심었고, 앞으로도 매년 조금씩 더 풍성한 벚꽃길을 선보일 것이다. 그러나, 보문단지 순환도로의 벚나무는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 양편의 가로수로 조성된 탓에 안전문제에 유의하다 보면 찬찬히 살피고 감상할 여유가 없는 차창밖 풍경에 머무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대안이 된 것이 김유신장군묘 앞의 벚꽃길이다. 경주 버스터미널에서 서천 건너편으로 보이는 벚꽃길이 그것이다. 이곳은 현재 벚꽃시즌에 가장 붐비는 대표적 장소다. 사람들이 도보로도 접근할 수 있고, 충분히 넉넉한 인도 공간에서 사진을 찍다가, 차들이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도로로 우르르 몰려나와 멋진 장면들을 찍기도 한다. 낮시간뿐 아니라 심야까지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될 뿐 아니라, 시즌 후반부에는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꽃비를 이루며 떨어져 내리는 장면을 만날 수 있어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조금 덜 알려졌지만 명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보문단지에서 암곡으로 넘어가는 길에 만들어진 벚꽃길이다. 잘 성장한 벚나무들이 촘촘히 꽃길을 만들어주고 있다. 시내 지역에 비해 온도차가 있어서인지 며칠 정도 늦게 피는 편이라 경주에서의 벚꽃 체험을 더 오래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그 외에 겹벚꽃도 시차를 두고 피어서 피크 시즌을 놓친 이들의 마음을 달래준다. 전국적으로 벚꽃은 이제 너무 많이 심어서 과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경주의 벚꽃 시즌은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오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덕에 나름의 특화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식목일 즈음에 열리는 벚꽃 마라톤도 정례화된 축제의 한 부분이 된 것 같고, 꽃 보러 경주를 찾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야외행사들도 손님맞이에 애쓰고 있다.
경주는 가을 단풍이 유명한 곳은 아니다. 대신 첨성대 옆의 넓은 공간에 조성된 꽃밭은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꽃의 향연을 보여준다. 한동안 유행했던 핑크뮬리가 지금도 꽤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계절마다 꽃을 바꿔 심어 연출하는 정원은 해바라기나 튤립을 비롯해 색깔과 모양이 강렬한 품종으로 눈길을 끈다. 인근의 동궁과 월지 주변과 월성 주변은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연꽃정원이 볼만하다. 경주는 봄에서 가을까지 왕경지구에는 계절별 꽃을 볼 수 있도록 정원을 잘 조성해 두었다.
경주의 가을 행사의 중심에는 신라문화제가 있다. 이것은 매년 10월에 열리는 경주 고유의 지역축제인데 2025년에는 15만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는 196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실은 1954년 경주지역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서라벌예술제’가 그 효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경주의 석총(石叢) 이상구(1920-1992) 선생이 주축이었는데, 그는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판사생활을 거친 후 1949년부터 경주에서 변호사업을 하고 있었다. 문화예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는 지역의 문화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예술적 역량을 이끌어내는 후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초토화된 경주에서 전통에 바탕을 둔 문화 축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사재를 털어 ‘서라벌 예술제’를 시작했다. 지역의 많은 예술인들이 이에 호응해서 참여했는데, 이 일에 실무적으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고청 윤경렬 선생 등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2년부터 ‘신라문화제’가 시작되어 정례화될 수 있었다.
지역축제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던 이 시기에는, 가을의 신라문화제를 앞두고 각 고등학교에서는 가장행렬을 준비하였는데, 여학생 중에서는 그 해의 원화를 뽑아 가마에 태우고, 남학생 중에는 화랑을 선정하여 행렬 앞에 서서 수십 명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시내를 행진하게 했다. 남산에서 채화된 성화를 앞세우고, 신라역사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보여주는 대형 조각을 만들어 수레에 실어 끌고 가면 길가에 나온 시민들이 환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신라문화제는 시민들 전체가 한 가지씩 떠맡아서 참여하는 떠들썩한 축제였기에, 어린아이들은 거리로 나와서 구경을 했고,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알아보고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곤 했다. 백일장과 사생대회, 미술전과 시화전도 열렸고, 공설운동장에서는 고싸움 같은 큰 민속놀이가 행해졌다. 전국적으로도 아마 이런 정도의 축제를 이토록 오래 이어온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과거처럼 시민들이 대거 동원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여러 기획된 공연과 행사들로 프로그램이 짜이고, 멀리서 찾아오는 참가자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하는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 시민의 주도성과 참여의 수준을 어떻게 하면 더 깊게 할 수 있는지는 오랜 고민 거리이다. 경주에서는 연중 내내 다양한 문화행사와 축제들이 벌어지지만, 가장 오래되었고 대표성을 갖고 있는 신라문화제가 매년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기에 경주를 방문하면 그 해의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경주에 미술 갤러리가 여럿 생겨났다.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시회 역시 시간성과 함께 가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특별한 전시기획은 그 시기를 놓치면 같은 방식으로 만날 수 없다. 힐튼호텔 앞의 우양미술관은 최근 몇 년간 뛰어난 큐레이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5년에는 APEC을 맞이하며 백남준 작가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의 전시를 성사시켰다. 뒤 이어서는 영국의 대표적 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다. 경주 출신의 소산 박대성 화백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획전을 이어가는 솔거미술관, 화제를 불러 모은 국내외의 대형 전시를 꾸준히 유치하고 있는 경주예술의전당 갤러리, 사립미술관으로서 참신한 국내외 작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해내는 의욕적 행보로 떠오르고 있는 플레이스 씨와 오아르 미술관, 더안미술관 등이 연간 선보이는 전시회 일정은 한 번씩 경주를 다녀가게 만들 정도의 흡입력이 있다. 최근에는 국립경주박물관도 천마도 전시, 상형청자 전시, 금관 전시 등으로 엄청난 인파를 불러모은 바 있다.
음악페스티벌로 경주를 찾는 이들도 늘어나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한수원의 지역 문화사업 지원으로 그간 만나기 힘들었던 대형 콘서트가 과거에 비해 자주 성사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유명 연주자를 한 번씩 초청하는 형태에서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로컬에서 전국적 주목을 받는 페스티벌이 하나씩 만들어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내가 눈여겨본 것은 ‘황오동 카니발’이란 이름의 로컬 페스티벌인데, 이런 자생적 기획으로 전국의 페스티벌 마니아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현재는 수백 명 규모이지만, 모여든 관객들의 바이브로 볼 때, 이런 페스티벌은 지속만 될 수 있다면 경주를 기반으로 하는 매력적인 축제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전망이 절로 보인다.
지역마다 연극제, 영화제, 미술전, 음악제 등을 지역특화 축제로 승화시킬 수 있다. 경주는 아직 그런 특화된 예술 분야를 갖고 있지 않다. 부산영화제, 광주비엔날레의 뒤를 이어, 경주가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축제는 무엇이 있을까? 경주처럼 특별한 장소는 그 장소를 빛낼 특별하고도 고유한 시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장소에서 시간으로 눈을 돌려볼 때이다.
경주의 특정한 장소가 특정한 축제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확장분화되는 것을 기대해 본다. '경주는 이런 축제가 많은 곳'이라고 브랜딩이 된다면 이는 랜드마크 투어와 연계될 특징이 되겠지만, 개별 축제는 딮다이브 여행을 유발하는 특성이 된다. 일 년 내내 흥청망청하는 곳을 두고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곳은 그냥 유흥공간이다. 유흥공간이란 놀이에서 시간성이 배제된 곳이다. 그런 곳은 늘 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놀지 못하는 곳이다. 축제란 일상의 시간과 함께 존재하다가 교차하는 순간에 의미를 발생시킨다. 즉, 축제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일상성이 확보되어서 도드라진 대비효과를 발생할 때뿐이다. 경주의 특정한 지역이 특정한 축제와 연계될 수 있다면, 그 지역의 일상성과 맞물려서 그 특징이 강렬하게 대비될 수 있는 경우라야 한다.
지금 꾸준히 실험을 하고 있는 곳으로 우선 꼽을 만한 곳은 서악마을이다. 태종무열왕릉을 끼고 있는, 선도산 아래의 서악마을은 신라문화원이 상당 기간 노력한 마을 가꾸기와 문화유산 활용사업이 성과를 내어서 고분과 탑과 서원 등이 잘 정비되어 있고, 숙박시설, 카페, 공방, 독립서점 등이 고르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5월에는 작약음악회, 10월에는 구절초음악회를 연다. 장소성과 시간성의 결합을 잘 이룬 사례가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한 황오동 카니발은 아직 그 방향이 유동적으로 보이지만, 2025년에는 도시재생사업으로 마을호텔을 운영하는 황촌마을과 연계해서 진행하면서 로컬과 결합하는 유력한 모델을 보여주었다. 페스티벌이 기획사만의 사업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적극 참여하는 행사가 된다면 안정적인 발전과 로컬 축제라는 독특한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지 않을까? 축제와 마을이 서로 적극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는 경주시민들이 입주했던 국민주택 단지였고, 그 후 대학촌이었다가, 현재는 유학생과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 다양한 이민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성건동은 과감하게 다문화타운으로 특성을 잡아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인종적 구성에 따라 다양한 음식점, 빵집, 마트 등이 들어서고 있다. 지역의 인구구성도 많이 변했고, 초중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많다. 인종별 커뮤니티가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앞으로 이들의 문화예술적 특성을 반영한 사업이나 행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과거 엄청나게 국제화된 면모를 보였던 고대 신라의 포괄적 문화역량을 오늘날 되살려볼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사회와 다문화가 만나는 것은 필연이다. 피할 일이 아니면 즐길 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즐기는 일에는 축제만 한 것이 없다. 놀다 보면 친해지고, 알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경주는 과거부터 전 세계에서 찾아오고, 교류하는 곳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과거에 못 미치고 있는 형편이니, 자그마한 실험부터 시작해 보면 좋겠다는 얘기다. 로컬의 축제가 곧 글로벌 페스티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선용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