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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26. 2023

엄마에게 반드시 모성이 있어야 하는가?

10년 후 다시 본 <케빈에 대하여>



나의 근원적 불행을 정돈하다


“세상에 저런 엄마가 있어?”


2011년 세상에 나왔지만, 한국엔 2012년 개봉한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내 친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입술 안으로 답했다.


“응. 있어.”


당시 영화는 많은 이들의 첨언을 불러일으켰다. 영화에 대한 담론은 대부분 그릇된 모성에 대한 훈계, 그리고 ‘사이코패스’라 단정 지은 케빈을 통한 인간의 성선설과 성악설에서 맴돌았다.


10년 후 다시 본 <케빈에 대하여>는 나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나의 근원적 불행을 정돈할 공간을 만들어줬다.









영화 공개 당시 런던 비평가 협회상과 런던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여성 감독 린 램지가 각본을 쓰고 감독했고, 틸다 스윈튼과 에즈라 밀러가 출연해 그들의 배우 커리어에 최고로 꼽히는 연기를 펼쳤다. 린 램지는 이후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너는 여기에 없었다>로 2017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호아킨 피닉스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여행가 ‘에바’에게 아들 ‘케빈’이 생기면서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진다. 일과 양육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에바의 삶은 케빈의 이유 모를 반항으로 점점 힘들어져만 간다. 에바는 가족 중 유독 자신에게만 마음을 열지 않는 케빈과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케빈은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에바에게 고통을 준다. 세월이 흘러 청소년이 된 케빈은 에바가 평생 혼자 짊어져야 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데…




영화는 강렬한 붉은색으로 범벅된 토마토 축제를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에바가 등장한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성모 마리아’라도 된 듯한 포즈와 표정으로 나르시시즘과 자유, 쾌락을 만끽하는데, 이 모습은 사회적, 관습적으로 터부시되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선 안 되는 것을 에바가 하고 있다는 듯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애초에 임신을 원치 않던 에바였기에 케빈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에바. 어쩌면 케빈은 이를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에바의 뱃속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알아챈 듯하다. 10년 전엔 보이지 않았던 여성 감독인 린 램지만이 담을 수 있는 섬세한 시선과 질문이 영화엔 겹겹이 쌓여 있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에바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여성은 엄마가 됨과 동시에 일정 기준 이상의 모성과 희생의 의무가 주어진다. 사회가 엄마에게 요구하다 못해 강요하는 모성은 엄마가 한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자기애와 욕망을 포기하고 희생함으로써 자녀를 양육해 훌륭한 인물로 길러내는 것만이 여성의 자아를 실현시키는 ‘성모 마리아’가 되는 길이라 정의한다. 세상은 유난히 자식에 대한 책임을 아빠보다 엄마에 더 묻는다. 엄마에게 온전히 씌워지는 출산과 양육, 그리고 결과에 대한 사회의 뼈저린 평가와 책임은 불합리하고도 가혹하다. 현실에서만 봐도 자신의 일에 열심인 여배우가 이혼하면 ‘자식을 버린 이기적이고 독하고 나쁜 여자’라는 주홍 글씨가 새겨지지만 남자 배우에겐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에바는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기준 미달의 엄마인 여자다. 자식과 가까워지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자아실현으로부터 멀어지는 거라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에바의 부모 관계로부터 이어진 기질일 수도 있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보편적 엄마 상(狀)과 동떨어진 엄마들도 많다. 세상 모든 엄마에게 같은 수치의 모성을 기대하고 강요하는 건 그렇지 않은 엄마에겐 폭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는 에바를 엄마라는 이름의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녀의 모성을 이단이라 비난할뿐, 산후우울증과 독박 육아에 시달리며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인간, 여자로서의 에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국, 태초의 ‘이브’처럼 모든 건 에바로부터 시작해 에바로 귀결된다. 에바의 불경한 엄마로서의 역할은 케빈을 문제아로 만들었고, 결국 가정이 파탄나고 사회에까지 해악을 끼쳤다. 그리고 그 책임과 비난은 고스란히 에바에게 돌아온다. 뱀의 꼬임에 당해 ‘아담’을 유혹한 ‘이브’의 원죄다. 에바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말하는, 케빈에 대하여


‘가정 내 크라이슬러 증후군’이 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기는 증후군이다. 케빈은 유아 퇴행적이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갖고 있으며 커가면서도 더 이상 맞지 않는 어릴 적 옷을 입으며 심리적 퇴화를 보여준다. 사회적인 기준의 정상 발달 단계에서 한참 벗어나 있지만, 그 누구도 케빈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기를 꺼려한다. 케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누구든 외면해온 스스로의 검고 어두운 면을 꺼내놓아야 할테니 말이다. 우리는 그저 반사회적인 기질을 요리조리 숨기며 운좋게 잘 살아 가는 것뿐이고, 케빈은 그걸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이코패스’처럼 비겁한 단어도 없다. 문제있는 인간을 그렇지 않은 인간의 기준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 붙이는 이름표다. 인간을 커다랗게 뭉뚱그리고 그룹화 시키고 분류시킬수록 우리는 앞으로 더욱 더 케빈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에바와 케빈에 대하여


에바와 케빈은 일차원적인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서 일종의 권력관계로 변한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치르고 아들이 어떤 모습이든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엄마는 없다.


어린 케빈에게 숫자를 가르치며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에바는 1부터 50까지 막힘없이 읊어버리는 케빈에게 오히려 그 나이 또래가 풀기엔 어렵고 복잡한 덧셈 문제를 내며 힘을 뺏기려 하지 않는다. 에바의 의도치 않은 폭력으로 팔이 부러진 케빈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아빠에게 자신의 실수라고 둘러대자 이에 반박하지 않는 에바, 이후 이 사건을 에바의 약점으로 이용해 그녀를 통제하려는 케빈은 영화적 상상이 아니다. 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미묘한 권력 싸움을 일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마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바와 케빈은 닮은 구석이 많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권력관계에서도 서로는 일종의 동애를 발견하기도 한다. 케빈과의 관계를 극복하려는 에바의 수박 겉핥기식 노력의 일환인 미니골프 장면에서 에바는 사람들에 대해 시니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런 에바를 비웃으며 “내가 누굴 닮았는데?” 하는 케빈은 자신과 너무도 닮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증오한다. 멀어지고 싶으면서도 가까워지고 싶다. 에바도 마찬가지다. 에바가 경멸하는 케빈의 모습은 결국 에바의 한 조각이기도 하단 걸, 그것으로 결코 케빈을 비난할 수 없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알아차린다. 하지만 에바는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애와 자존심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결국 에바와 케빈, 둘 다 가련한 존재다. 결핍투성이인 둘이 서로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지지도 못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결국 무참한 폭력과 참혹한 파국으로 치닫고서야 항복하고 마는 고집 세고 미련하고 미약한 존재이다. 여기선 엄마도, 아들도, 누가 누구에게 생명을 부여했는지조차도, 어떤 권력관계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에바와 케빈을 둘러싼 세상에 대하여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 어떤 식으로든 결핍을 갖는다. 또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런 결핍을 채우거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반대의 경우, 이러한 결핍이 삶에서 영구적 장애, 혹은 더 심각한 문제로 발달한다. 케빈은 선천적으로 충동적이고 예민하고 감각을 추구하는 아이인데, 이러한 기질은 엄마인 에바로부터 물려받았다. 거기에 부모의 비일관적인 양육과 무관심, 방임이 더해졌다.

세상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결핍을 채우거나 해소하며 방황하고 좌절하고 구원을 얻는다. 어떤 이들은 글이나 그림, 음악 등 예술로 결핍을 승화시키고, 어떤 이들은 정치나 전쟁, 경제적 욕망을 통해 쟁취한다. 또 어떤 이들은 남을 해하거나 자신을 해하거나, 혹은 남을 해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구제불능으로 만들어버리는 형벌을 스스로 가한다.

케빈은 다른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못해 다른 이의 권리를 무시하고 침해하기까지 한다. 다른 이를 기만하고 통제하며 학대한다. 이는 케빈이 스스로 학대하며 형벌을 가함으로써 결핍을 해소하는, 어쩌면 케빈이 유일하게 아는 세상과의 소통 방법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란 어른들 모두는 백이면 백, 각각 저마다의 어린 시절 결핍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은 죽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발현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극복했다고 믿으며 자신의 현재 성품이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과 독립되었다 생각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에바는 사회적으로, 관습적으로 엄마가 자녀에게 응당 보여줘야 할 그럴듯한 모습을 흉내 내지만, 똑똑하고 예민한 에바의 기질을 물려받은 케빈은 오히려 그런 에바의 가식적인 모습을 조롱하며 온몸으로 거부한다.
 
결국, 케빈은 학교에서 나와 끝까지 엄마를 보란 듯이 응시하며 마치 전리품을 자랑하듯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까지 짓는다. 엄마라는 운명에 내려진 가혹한 형벌이자 그런 엄마의 아들로 태어난 케빈이 에바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는 모종의 테스트와 형벌과도 같다.
 


엄마는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인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엄마는 나를 사랑해 줄 것인가.
나를 받아줄 것인가.
나를 안아줄 것인가.



그리고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향한다.


10년 후 다시 본 <케빈에 대하여>는 ‘누가 가해자인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나?’를 묻는 영화가 아니었다. 에바 때문에 케빈이 그렇게 된 건가? 케빈 때문에 에바는 그런 엄마가 된 건가? 케빈은 ‘사이코패스’인가? 이런 질문들은 영화에서 중요치 않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정신적으로 학대받은 아이, 거기에 방관만 하다 자신의 힘과 권력, 영역 표시를 위해서만 선택적으로 개입하는 아버지, 육아에 갇힌 여성, 부재한 시스템, 그리고 관습적이고 본능적인 모성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중요하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나이에 본능적으로 엄마를 거부하는 케빈에게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너도 알지? 엄마는 매일 아침 소원을 빌어. 프랑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라는 에바의 말은 결국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거는 달라. 엄마도 나한텐 익숙하잖아”라는 사춘기 케빈의 말로 치환된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불편해?” 하고 묻고, “불편해? 자기 엄마하고 있는 게?”라고 답하는 케빈과 에바의 일상적인 대화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 더 슬프다. 어린 시절, 발달이 더딘 케빈이 차라리 자폐증이길 바랐던 에바는 정작 자신이 병원에 가 상담을 받고 치료받아야 했던 게 아닐까.





선에서 악은 보이나 악에서 선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에서 붉은색과 흰색으로 선과 악, 죄와 벌을 말한다. 영화의 시작, 붉은 토마토 축제에서 에바의 자유와 쾌락, 욕망을 상징하는 빨강은 그녀의 집과 차에 뒤집어쓴 붉은 페인트를 통해 죄로 변한다. 에바의 집 베란다 창가에서 나풀거리던 새하얀 커튼과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셔츠는 빨갛게 물들며 묻는다. 에바와 케빈,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서 과연, 선과 악, 죄와 벌의 구분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 <케빈에 대하여>는 현재 넷플릭스 코리아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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