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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21. 2023

세상에서 가장 덜 호들갑스러운 종말 이야기

넷플릭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 넷플릭스



얼마 전 넷플릭스에 공개된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는 성인 애니메이션 종말론 코미디 드라마다. 총 10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됐지만, 순서와 관계없이 봐도 괜찮다.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 때문에 마치 10편의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물을 즐겨보지 않고, 요즘 여기저기 남발하는 종말론이 깃든 제목에 내키진 않았지만, 같은 이유로 흔하디흔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블루지한 톤의 그래픽 노블 같은 그림체로 풀어낸 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빙고. 첫 에피소드를 플레이하고는 이틀 만에 전편을 다 봤다.



정체불명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가운데 전 세계 인류의 멸종이 임박했다. 남은 시간은 7개월. 대부분은 자유를 만끽하며 거친 꿈을 추구하지만, 쾌락주의에 빠진 대중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 조용하고 항상 불편한 여성이 홀로 서 있다.



42세 습관 중독자 캐럴의 부모님은 종말을 앞두고 다자연애를 하며 호화 크루즈 여행에 오른다. 해외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스카이다이빙 영상을 보내온 동생 역시 남들처럼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캐럴을 걱정한다. 하지만 캐럴은 세상이 멸망하는 날을 붙잡고 싶지 않다. 그녀는 분노에 가까운 인내심으로 일상을 살아가며, 자기의 삶에 만족하며,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크게 방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캐럴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단조로움에 빠져 있다가 그 리듬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혼란에 빠진다. 이미 돈의 가치가 사라진 종말 직전의 세상에서 여전히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하고 싶을 뿐이다. 캐럴은 그저 자신이 있을 곳,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쓴다.






일상에 관한 러브레터


두 차례 에미상을 수상한 미국 TV 쇼 작가이자 프로듀서, <릭 앤 모티>와 <커뮤니티>를 만든 댄 쿠터만은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를 “일상에 관한 러브레터”라 말한다. 시끄럽고 적극적이고 에너제틱한 주인공이 아닌 조용하고 불안하고 수줍음 많은 캐럴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러면서도 캐럴은 조용하되 무기력하지 않고, 다른 이의 시각에선 무감각해 보이지만 세상을 조소하지 않으며, 수줍음이 많지만 솔직하고 재미있는 여자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재미있고, 슬프고, 달콤하고, 초실적이고, 멜랑꼴리하다. 우리 인생에서 파악하기 어렵고, 해석하기 어렵고, 배치하기 어려운 것들이 잘 짜여있다. 쇼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무드, 톤 앤 매너, 미묘한 뉘앙스가 디테일하게 살아 있다. 캐럴이 가진 설득의 힘은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전반 녹아 우리 삶과 일상을 진지하게 반추하게 한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단단하고 힘이 있다. 이 쇼는 단조로움이 주는 편안함에 관한 쇼이자 삶을 구성하는 틈새를 메우는 일상적인 의식에 관한 근사한 실존주의 코미디다.



*씬스틸러: 도나의 차 번호판이 CL - 2NE1 이다.



세상에서 가장 덜 호들갑스러운 종말 이야기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덜 호들갑스러운 종말 이야기이다. 아니,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하다. 종말도 일상이 된다. 종말에 가까워지는 세계는 이 쇼에서 곁가지 배경일 뿐, 여전히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쇼에서는 미미하게 거론될 뿐이다. 삶에 있어 종말은 내달리는 결론과 목적이 아닌, 삶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이 쇼는 종말과 ‘엔딩’ 대신 사람과 삶, 시작, 그리고 지속, 반복되는 일상의 힘에 집중한다.


삶에서 혼자,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불안해한다면 캘리를 만나보길. 복잡하고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엉망진창의 복잡한 삶을 즐기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방법은 오히려 그리 복잡하고 불안하지 않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이 쇼를 보면서 내가 잡지사 피처 에디터로 했던 박웅현과의 인터뷰가 내내 떠올랐다. 사이보그 인간이 되어 지구가 멸망해도 화성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일론 머스크의 야망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하고 있는 나는, 그래서 더욱 더 인문학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질문에도 답하는 AI의 시대에서 과연 나는 어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성찰한다.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존감이에요. 행복은 ‘찬란한 순간의 합’이에요. 절대 목표점이 아니죠. ‘점’이 아닌, ‘합’이란 말이에요. 인생을 산다는 건 ‘비어있는 목걸이 줄에 찬란한 순간의 진주를 몇 개를 꼽고 죽느냐’ 예요. 명문대에 가기 위해 명문고를 가려 노력하죠, 대학 합격하고 이틀 정도 파티해요. 또 삼성에 가려고 스펙 관리 시작해요. 그러다 삼성에 들어가면 또 이틀 정도 파티해요. 그리고 부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죠. 인생을 레이스라 생각하지 말아요. 이처럼 불행한 게 어디 있겠어요? 목표점만 바라보고 가다 보니, 찬란한 순간을 놓치는 거죠. 그렇게 올라간 목표점에서는 ‘이게 무슨 행복이야’하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지금 빛나고 있는 저 햇살, 어제 우리 딸애와 나눠 먹은 사케 한잔, 이런 순간들이 모여 행복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자존하는 사람은 중심을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깥을 봐요. 안을 보는 사람은 사색을 하지만, 바깥을 보는 사람은 눈치를 보죠. 스펙 관리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보다 ‘남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아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자존이에요. 


박웅현 인터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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