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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06. 2023

‘백치’와 ‘미친년’ 사이에서 <페어플레이>

왜 아무도 이 방 안의 코끼리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가?




미국 극장 개봉 후 넷플릭스로 전 세계에 선보인 영화 <페어플레이>는 87년생 여성 클로이 도몬트가 극본을 쓰고 감독한 데뷔작이다.


<볼러스> <수트> <빌리언즈> 등 마초 에너지 가득한 미국 흥행 TV 쇼를 작업했던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여성이 여성의 시각으로 말하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쯤 되면 ‘페미니스트’ 레이블을 붙여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할 명분을 쌓는 이들도 많겠지만, 안 보면 자기 손해다. 영화는 그러한 일차원적인 논쟁을 넘어설 만큼 대담하고 용감하다. 환상적인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설득력을 단단하게 끌어올린다.






<브리저튼>의 피비 디네버가 ‘에밀리’로, 엘른 이렌리치가 ‘루크’로 분한 이 영화는 ‘2023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에서 첫 공개 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넷플릭스가 2천만 달러의 비딩에 성공하며 전 세계에 공개, 글로벌 차트 1위에 오른 바 있다.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십의 일종으로 정당한 승부를 의미하는, 주로 스포츠계에서 쓰이는 말이다. 영화의 제목이 된, 남성이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스포츠계에서 남성의 언어로 정의된 단어 ‘페어플레이’는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에밀리와 루크는 열렬히 사랑하며 결혼을 약속한 커플. 극도의 아드레날린과 스트레스 지수가 롤러코스처럼 치솟는 거친 사내들의 전쟁터인 헤지펀드에서 함께 일하며 둘의 관계를 숨긴다. 갑자기 공석이 된 PM(포트폴리오 매니저) 자리에 루크의 승진이 점쳐지며 에밀리와의 애정 관계도 무르익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에밀리가 PM이 되면서 상황은 반대로 치닫는다.





감각적으로 묘사된 심리 변화


스릴러의 장르를 빌어온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전통적 성 역할과 불평등, 불공정, 불합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파트너인 남성을 통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루크를 연기한 엘른 이렌리치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언급될 정도의 탁월한 연기로 사랑하는 약혼녀의 성공 가도에서 당연하다 믿었던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사랑하는 약혼녀이기에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실패감과 무능, 하지만 이런 감정을 어찌 다룰지조차 모르고 무너지는 심리 변화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만약 루크가 승진했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을 지울 수 없다. 회사에선 남성들로 가득한 집단에 있을 자격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며, 그런 전쟁터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능력으로 앞선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와의 또 다른 전쟁터가 기다린다. 너무나도 사랑한 커플이 ‘하필이면’ 남자가 아닌, 여자가 성공하는 바람에 갈등으로 치닫는 건 과연 우연일까. 


여우와 늑대의 탈을 바꿔 쓰며 사회가 덧씌운 여성의 이미지를 영특하게 역이용하는 에밀리도 흥미롭다. 실제로 나 역시 한국에서 사회생활할 때도 그랬고, 해외에서 다이빙 강사로 사는 지금도 그렇다. 때론 조신하고 말 잘 듣는 여자가 되어야 하고, 때론 목소리를 높이고 마초 성향을 드러내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백치’와 ‘미친년’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 하듯 가면을 바꿔 쓰는 여성들이 오늘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엘리펀트 인 더 룸


방안에 들어선 커다란 코끼리는 의도치 않게 모든 걸 부숴버린다. 하지만 아무도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코끼리에 대한 두려움인지, 상황 자체에 대한 불편함인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시도하는 감독은 코끼리의 ‘의도치 않음’을 이해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극강의 스트레스와 경쟁에 최적화되지 않은 루크의 성향을 묘사함으로써 “이것은 코끼리의 잘못이다”라고만 힐난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전통적인 성 역할과 역동적으로 변하는 시대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그저 학습된 사회적 기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제는 코끼리도, 그 코끼리에 겁먹고 방 안 코너에 숨은 누군가도 대화를 시작할 때라고 말한다. 


스스로 각성됐다 자부하는 남성들마저도 여전히 사회에서 여성의 재능과 성공으로부터 위협을 느낀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회. 왜 여전히 여성의 재능과 성공이 남성의 불안을 자극하고 적대시되는가. 왜 여성의 성공은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남성의 자리를 빼앗은 것으로 치부되는가. 


여전히 감독과 작가, 스태프가 대부분 남성인 쇼 비즈니스계와 영화계에서 남성 감독들에 의해 역사가 씐 스릴러 장르를 선택한 건 어쩌면 감독의 당당한 대면이자 선언일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스릴러 공식을 따르지 않고, 모던하게 비튼 감독의 시선도, 당당하게 마주한 엔딩도 좋다. 뜨겁고, 날카롭고, 시끄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는 영화는 눈부시다. 





아카데미 남여주연상 후보에 거론되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


<페어플레이>에선 감독의 재능만큼이나 에밀리와 루크를 연기한 두 배우도 빛난다. 경이로운 몰입감을 선사하는 연기를 통해 이야기는 힘을 얻고 방 안의 거대한 코끼리를 다루는 대화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젠더 이슈에 커리어와 로맨스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넣음으로써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해하고 싶고, 서포트해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기고 싶고,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질투에 눈이 머는 인간의 감정의 이중성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루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불손함을 스스로 알기에 더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 감정을 대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결국, 추악한 방법으로밖에 감정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루크는 아이러니하게도 에밀리를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직시하게 된다.





뜨겁고, 날카롭고, 시끄러운 대화의 시도


나는 <페어플레이>의 신파도 아닌, 순애보도 아닌, 피의 복수도 눈물의 응징도 아닌, 스마트한 엔딩이 마음에 들었다. 전통적인 스릴러 영화에서 여자가 칼을 쥐었을 때 죽이느냐, 죽임을 당하느냐 중 선택해야만 했던 기존의 법칙을 깨고, 에밀리는 자신의 커리어에 금이 가거나 자신의 인생을 못난 남자 하나 때문에 망치지 않으면서도 진정으로 이긴다. 2023년, 현재를 살고 있는 현대 여성의 현실, 딱 그만큼이다. 과장도 미화도 없다. 여전히 남성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스트립 바에서 독주를 들이키며 여성을 희롱하는 데 동참해야 하지만, 애초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미투 운동’ 이후, 목소리를 내는 여성은 마녀화되고 남성의 피해의식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페어플레이>에 피와 섹스는 있어도 능력 있고 재능 있고 똑똑한 여성의 파멸은 없다. 에밀리는 루크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지도 않는다. 에밀리는 복수 대신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루크에게 책임을 묻고 자신의 열등감을 직시하게 한다. <페어플레이>는 에밀리가 죽어야 루크가 살고, 루크가 죽어야 에밀리가 사는 제로섬 게임이 아님을, 이것이 우리가 꺼리는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임을 말한다. 가장 우아하고 매혹적인, 여성스러운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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