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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Oct 01. 2023

뒤집혀도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

삼각형은 뒤집혀도 결국 삼각형이다.

                            

해외 외딴 시골 섬 생활을 수년째 해오며 가장 안타까울 때 중 하나가 보고 싶은 영화를 제때 못 보는 거다. 서울 생활할 땐 일주일에도 몇 편씩, 하루 왕복 4시간을 지하철, 버스에서 보내며, 잠들기 전에도, 시간만 나면 영화를 봤다. 잡지사 피처 에디터라는, 음악과 영화에 대해 떠드는 거로 밥을 벌어먹는 직업에 대한 책임감이자 자부심이기도 있지만, 영화는 고도로 압축된 삶이다. 영화 속 하나의 이야기가 영화를 보는 사람 각각의 개인사에 반영돼 또 다른 이야기로 탄생할 때 나는 언제나 영화의 예술적 마력에 희열을 느꼈다.    

  

‘영화를 본다’는 경험이 상징하는 건 누군가에게 ‘데이트’, 누군가에겐 ‘은둔’, 누군가에겐 ‘도피’, 누군가에겐 ‘꿈’일 것이다. 한 공간,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2시간이 넘게 오로지 같은 것에 함께 집중할 수 있는 경험을 우리는 앞으로 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팬데믹 이후, ‘영화’라는 개념은 ‘넷플릭스’로 더 빠르게 대체되어 간다. 잡지 일 할 때 알던 영화계 친구들도 여전히 배급사, 영화사, 극장에서 일하지만 하나, 둘 일자리를 잃어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2015년, 처음 이 섬에 들어왔을 땐 넷플릭스도 없던 시절(사실 2015년이 넷플릭스가 태어난 해이긴 하다)이라 랩톱 안에 수십 개의 영화 파일을 저장해 왔다. 따뜻한 열대바다 섬에서 좋아하는 다이빙 하고 글 쓰며 사는 삶에 감사하지만, <기생충>이 개봉했을 때도, <헤어질 결심>이 개봉했을 때도, 나는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슬픔의 삼각형>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한국어 포스터를 통해 국내 개봉 소식을 듣고도 한참 지나서야 마침내 OTT 서비스 왓챠에 영화가 업로드됐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왓챠 구독까지 시작했다.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슬픔의 삼각형>으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생에 한 번 받기도 힘든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감독이 스웨덴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영화를 보면 흥미롭다. 특히 나는 오랜 시간 해외 생활을 하며 한국어 대신 영어만 쓰고 유러피안들 속에 섞여 살다 보니 어릴 때부터 나고 자란 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깊게 각인되어 있는지 체험하며 살고 있다. 특히 작정하고 풍자하는 영화는 감독의 백그라운드도 찾아보면 좋다. 스웨덴은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가진 복지 선진국이다. 다이빙 동료 강사들 중 스웨디시가 많아 이런저런 얘길 했는데, 수입의 반 이상을 세금으로 떼어간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복지가 좋은 걸 수도 있다. 스웨덴은 그리고, 우리나라 아이를 가장 많이 입양했던 유럽 국가 중 하나(최진실이 출연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을 추천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눈과 눈 사이, 미간을 말한다.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압축된 패션계의 모델들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 바닥 경험이 있는 나에겐 참 매혹적이었다. ‘발렌시아가 룩’과 ‘H&M 룩’에 따라 모델의 표정이 바뀐다. 가끔은 이런 감독도 좋다. 거침도 숨김도 없다. 시원하게 대놓고 자본주의를 풍자한다. 감독은 여기에 젠더 이슈를 끌어들인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대우받고,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세상에 아직 얼마 안 되는 직업군이자 산업계다. 가부장적 사회 시스템에서 여상이 자신의 미모나 몸매, 매력으로 남성보다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 데이트 비용을 누가 내는가에 대한 젊고 매력적인 남녀 모델의 대화에 동시대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우고 있는 젠더 이슈를 맛있게 버무려 놓았다. 나 역시 여성으로서 임신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수입이 끊어져 결국 남자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늘 함께 한다.






호화요트에 모인 전 세계 부자들. 망망대해에 둥둥 떠 있는 배 안에 계급주의, 인종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가 뒤섞여 있다. 잘 나가는 여자친구 덕에 공짜 이벤트로 배에 올라 권력을 맛본 남자는 ‘칼’은 인물 자체가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 마당에 미국인 선장은 마르크스를, 러시아 사업가는 롤렉스를 이야기한다. 풍자와 해학, 혐오와 허무, 염세주의로 똘똘 뭉친 그들의 존재를 영화는 시원하게 토사물과 똥으로 표현한다. 은유나 반어법 대신 직설적인 펀치다. 내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봤다면 어땠을까, 분명 비위 상해 자리를 뜨는 사람도 몇몇 있었겠지.





역겹기까지 한 적나라한 풍자가 희한하게 속 시원하다. 자신이 판 수류탄에 맞아 배가 침몰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선진 백인 우월주의 뒤에 숨어 온갖 불평등하고 천박한 짓을 하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완벽히 갈아엎어 버린다. 계급의 전복은 상상 속에서, 영화 속에서 일어나기에 통쾌함을 준다. 하지만 삼각형은 뒤집혀도 삼각형이다. 절대 역삼각형으로 멈추지 않는다. 삼각형은 언제나 긴 밑변이 아래에, 하나의 꼭짓점이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이 삼각형이라면 이 세계는 결코 원이 될 수 없는 것인가.






무인도의 삶에서 생활 기술을 갖춘 에비게일이 새로운 꼭짓점이 됐다. 기쁨도 잠시, 그녀는 권력이 사라질까에 대한 불안과 집착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젠더 이슈를 던진다. '모계 사회'가 아닌 '가모장 사회'를 만든 그녀는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에게 묻는다. 패션쇼 런웨이, 호화요트, 무인도. 이 세 곳에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런웨이를 걷는 모델? 앞줄에 앉는 인플루언서? 그 때문에 자리를 뺏긴 서브-인플루언서? 아니면 그걸 인스타그램으로 보고 있는 팔로워? 호화요트에서라면? 크루즈 여행에 돈을 내고 즐기러 온 사람? 일하는 크루? 무인도에서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슬펐다. 인류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건지 절망해야 하는 건지 갈팡질팡하는 마음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영화는 꼭짓점뿐 아니라 밑면도 비판하고 풍자한다. 신랄하고 통쾌하게 우리를 비웃는다.           




+

<슬픔의 삼각형> 히로인 ‘야야’로 안정적인 연기를 보인 배우 찰비 딕 크릭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칸영화제 이후 얼마 안 돼서다. 그녀의 영혼이 편안히 쉬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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