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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Oct 31. 2022

여자도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그 새삼스러운 사실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우아한 매니페스토.


넷플릭스엔 오묘한 남성 vs 여성 분위기가 흘렀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마초’ ‘형님’ ‘조직’의 키워드로 가득한 <수리남>과 여성적이고 우아한 줄만 알았으나 치명적인 독을 감춘 <작은 아씨들> 이야기다.


<작은 아씨들>은 공개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우선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그리고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의 작가 정서경과 <마더> <만추> <아가씨>, 그리고 <헤어질 결심>의 미술감독을 맡았던 류성희가 드라마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은 김희원은 <왕이 된 남자> <빈센조>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여기에 가난한 세 자매로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가 등장하고, 이들과 갈등을 빚는 ‘절대 악’ 또한 여성인 엄지원이 연기했다. 이렇게 감독, 작가, 미술감독, 주연 배우 모두 여성인 드라마를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박찬욱 없는 박찬욱 팀’이라 불리는 <작은 아가씨> 제작팀 중 정서경 작가에 대해 박찬욱은 <친절한 금자씨> 각본집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영화 경력 전체가 정서경과의 만남 전후로 나뉘게 되리라고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 영화에도 여성성, 아이다운 천진함, 동화적인 아름다움, 낙관주의, 설레임, 감사하는 마음, 쓸데없는 공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건 정서경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내게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조차도 정서경에 의해 일깨워진 것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만든 박장혁 촬영 감독이 여기에 합류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사람들이 한데 모였을 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모 아니면 도다. 정말 멋진 작품이 나오거나 망작이 나오거나. 전자일 경우 대가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에고(Ego)’를 낮추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후자일 경우엔 당연히 큰 인물들인 만큼 서로의 의견만 고집하며 튀려고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은 아씨들>은 작품을 위해 모인 대가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프로페셔널한 ‘애티튜드’로 탄생했다. 그래서 퀄리티 뛰어난 미장센과 음악, 미술, 대사, 연기, 연출, 촬영이 한 그림 안에 잘 섞였다.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을 멋진 명화를 한 점 감상한 듯한 호사를 누렸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원작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지만, 결은 다르다. 작가와 감독은 제작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길 원할까? 사랑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고, 모험도 아니고… 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 사회 곳곳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런 사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돈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은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도 우리는 돈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꿈을 꾸었나? 그런 것들을 쓰려고 했다. <작은 아씨들>은 소녀들에겐 영혼의 책이다. 소녀들은 누구나 자신이 네 자매 중 누구인지 생각하며 성장한다. 책 속의 자매들은 끊임없이 돈과 가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 자매들을 현대 한국으로 데리고 와 보고 싶었다. 메그의 현실감과 허영심, 조의 정의감과 공명심, 에이미의 예술 감각과 야심은 가난을 어떻게 뚫고 어떻게 성장해 나갈까? <작은 아씨들>이라고 해서 작고 소박한 이야기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자매들의 작고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들 아래에 우리 사회의 거대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동시에 흐르게 하고 싶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자매들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아주 높은 곳에선, 커다랗게 성장한 작은 아씨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작으면서도 크고, 낮으면서도 높은 이야기다.




왜 이 세상엔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는 죄다 남자로 표현될까?
왜 ‘여성’은 사이코패스조차 될 수 없을까? 




<작은 아씨들>은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는 여성이 여성의 시각으로, 여성의 방식으로 표현한 메니페스토와 같다. <작은 아씨들>은 여성의 ‘죄악’ ‘욕망’ ‘분노’ ‘복수’ ‘폭력’의 크기도 남성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선 원령가의 호위무사(이 또한 남성을 전제로 하는 단어이긴 하다), 또는 해결사 역할을 하는 실장 역시 여성이다. 미디어의 학습된 관념과 교육에 의해 그간 ‘남성’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범죄’ ‘폭력’ ‘욕망’ ‘죄’ 모든 걸 여성으로 치환했다. 일부러, 작심이라도 한 듯. 


드라마 중반까지만 해도 속을 뻔했다. 모든 갈등의 원인이 엄기준이 연기한 박재상으로 집중될 때 결국 그마저도 원상아(엄지원)의 계획과 게임이었다. 원상아가 오랫동안 베일 뒤에 가려진 사이코패스로 살아올 수 있었던 설정을 위해 세상의 온갖 ‘부’와 ‘우아함’을 갑옷처럼 껴입은 터라 극 안에서 그녀의 움직임이 조금 답답하고 무거워 보일 수 있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남성이, 오직 남성만이 크고 뻔뻔한 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아씨들>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취미이자 꽃으로 꼽히는 난초를 드라마에 들여왔다. 가장 여성적인 방법으로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폭력과 통제, 욕망이 남성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언어가 담론을 지배한다. 언어는 대부분 남성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하여, 담론 또한 남성이 지배한다. 


드라마 후반, 원상아가 왜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없었는지 묻는 장면에서다. “내가 여자라서?”라는 질문의 답 “미친년”이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다. 여성에게는 남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가 거의 없다. ‘미친년’이라는 욕은 ‘미친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인다. <작은 아씨들>은 묻는다. 원상아가 과연 ‘미친년’이라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기득권을 가진 남자들이 여성이 권력을 쥐는 것을 막기 위해, 명분을 위해 그녀를 ‘미친년’으로 만든 것인가. 


내가 바라는 세상의 변화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여전히, 어딘가에선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죽임을 당하고, 또 어딘가에선 열 살도 안 된 여자아이가 동네 이웃 아저씨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그 남성의 죄를 물을 권리마저도 남성들이 서로 나눠 갖는다. 여전히 여성은 입을 열 기회조차 없다. 


이 드라마가 당신에게 지나치게 불편하다면, 그동안 우리가 온 수많은 남성 중심의 한국 드라마의 전통적/관습적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구조,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이야기를 끌어가는 인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인물(작가, 감독, 미술, 편집 등)에 의해 길들여지고 학습된 자신의 자각 기준점으로 삼으면 어떨까.


<작은 아씨들>은 ‘가난한 자’의 ‘가난한 자다움’을 요구하는 세상에도 묻는다. 애정과 보상, 인내, 지나치게 자신을 절제하는 ‘가난한 자다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죽음은 돈 때문에, 돈에 의해, 돈을 위해, 돈을 좇다가, 혹은 돈이 없어서 죽는 것이다. 부자는 돈을 좇다 죽고, 가난한 자는 돈이 없어서 죽는다. 현장에서 일하다 죽은 이름도 없는 노동자는 돈이 없어서 그 일을 하다 죽었다. 돈이 있었다면 죽어도 선택하지 않았을 그 일을.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관심 갖고 이야기하고 탐구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성공해야 한다. 아직 여성은 서사에서 온전한 주연으로 제대로 선 적조차 없다. 그렇게 목소리와 존재감이 사라지고, 항상 무대 뒤 스태프 역할만 맡아온,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 경쟁에도 끼워주지 않는 세상에서 여성의 자존감은 낮아만 간다. 


싸우지 않으면 편하다. 포기하면 편하다. ‘가난’한 ‘여자’들의 민낯과 연대를 주제로 품은 <작은 아씨들>은 싸운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 감독, 작가, 편집, 촬영, 조명, 음악, 의상, 미술, 배우들의 얼굴까지, 모든 것이 한 마음으로, 한 방향으로 함께 움직인다. 원상아는 여자도 악랄한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이 남성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강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동안 미디어는 남성 사이코패스를 매력적으로 표현해왔다. 그 역할이 여성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저 ‘미친년’으로만 치부할 순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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